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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85

   – 무슨 일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루시네 아빠한테 좋은 말 좀 해줘. 성녀님. 난 바보라 뭐라 해야 될지 모르겠어.”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온 무감정한 목소리에 페이비의 표정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 …켄트 영애?

   

   “응. 나야.”

   “저도 있어요. 페이비.”

   

   – 조이? 설마 솔라딘의 3왕자님께서도 함께인가요?

   

   “그렇습니다. 성녀님.”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 걸까요? 페이비는 초췌한 베네딕의 얼굴을 살피며 고갤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알른 영애님과 연결된 수정구가 반짝이길래 영애님께서 무언가 전할 말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연락을 받으니 초췌해진 알른 백의 모습이 있었죠. 그래서 알른 백께서 제게 무언가 고해성사를 하고자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또 뒤편에서 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다니.

   

   – 으음. 일단 켄트 영애. 당신께서 영애님의 수정구를 가져오신 거죠?

   

   “응. 맞아. 성녀님이 필요했어.”

   

   – 다른 분들에게 협의를 구하지 않고요?

   

   “협의?”

   

   순진무구한 되물음을 들은 페이비는 지금의 상황이 한 사람의 독단임을 이해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알른 백께 도움이 필요하단 사실은 알겠네요.

   

   – 알른 백.

   

   “예. 성녀님.”

   

   – 당신께서는 저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페이비가 나지막히 던진 물음에 베네딕의 눈빛이 짙어진다.

   

   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으며 수많은 위험 속에서 왕국을 구원한 영웅의 기세가 페이비를 짓누르지만 페이비에게 흔들림은 없다.

   

   성녀이기에. 힘들어하는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사람이기에. 무너져가는 이에게 희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기에.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엄한 표정으로 베네딕을 마주 본다.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베네딕이었다. 그는 기세를 물림과 동시에 고개를 내저으며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군요.”

   

   – 그 때의 저는 영애님의 친구로 자리했으니까요.

   

   “과연. 알겠습니다. 성녀님. 이 못난 아비에게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페이비가 베네딕과 대화를 하는 동안 조이는 아서와 프레이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방 안에서 펼쳐질 이야기 신께서 품을 이야기일지어니. 저 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자리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둘만이 남겨진 후 베네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전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 그게 뭐 중요한가요?

   

   “예?”

   

   – 위대하신 주신께서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공평히 사랑하시니. 그 뜻을 펼치는 저 또한 마땅히 그래야죠.

   

   “허허. 이것 참.”

   

   베네딕은 페이비의 엄한 웃음 아래에서 방금 전 다른 세 사람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똑같이 전했다.

   

   자신이 딸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 평생 속죄할 수 없고 속죄를 바라서도 안 될 잘못에 대해서.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페이비는 베네딕이 입술을 꾹 다물고 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 알른 백작. 당신께서는 용서를 바라선 안 될 인간이라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 용서하고자 하는 이를 외면하는 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단 생각은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반박을 하려던 베네딕이었지만 그의 목에서는 말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 페이비가 한 말이 너무도 옳았기에 대들 수 없었던 것이다.

   

   – 성직자 중에서는 고행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고통 받는 것으로 신께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들이 말입니다.

   

   “예. 저도 들어본 바 있습니다.”

   

   – 그들의 행동 모두가 잘못되었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타인의 죄를 자신이 품겠다는 의지는 분명 고결한 것이니까요. 허나 모두가 옳은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고행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을 하는 자신에 심취된 자들은 분명 잘못되었지요.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자해이니 말입니다.

   

   “…”

   

   – 알른 백작.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베네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이비가 짐짓 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 당신이 걸으려는 가시밭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항시 의심하십시오. 할 수 있을 겁니다. 알른 백작께선 지혜롭고 선한 분이니 말입니다.

   

   “제가… 말입니까?”

   

   – 예.

   

   페이비의 굳건한 눈동자 앞에서 베네딕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나를 더 믿는 듯한 저 눈을 보라. 이 분께서는 진정 성녀라는 호칭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구나.

   

   “조언에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영애님께 받은 차고 넘치는 은혜 중 일부를 돌려드렸을 뿐이니.

   

   “루시가. 그렇군요. 이 부족하디 부족한 아비가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헤매는 동안 루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거네요.”

   

   베네딕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을 듯 했던 영웅의 어깨가 쪼그라드는 걸 본 페이비는 엄한 표정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부드러움을 되찾았다.

   

   – 알른 백작.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예. 성녀님.”

   

   – 아. 그리고 나중에 영애님께 꼭 연락해달라는 말도 전해주세요. 활짝 웃는 영애님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답니다.

   

   “아하하. 루시가 제 말을 들어줄 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말은 해보겠습니다.”

   

   – 꼭이에요! 약속하신 겁니다!

   

   방금 전의 근엄함은 어디로 내다버린 것인지 나이 대에 걸맞는 활발함을 보이던 페이비는 할 일이 있다며 수정구의 연결을 끊었다.

   

   방 안에 홀로 남게 된 베네딕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의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되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미련은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여전히 베네딕의 안에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는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대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바보 파파.”

   

   그 곳에는 루시가 있었다. 베네딕의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 있었다.

   

   루시의 충혈된 눈을 본 순간 베네딕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이 너무도 두려워 다시 집무실 안으로 물러나고 싶단 소망을 품었다.

   

   허나 베네딕은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고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루시의 친구들을 지나쳐 루시의 앞에 섰다.

   

   “루시.”

   “울었어요? 갱년기에요?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훌쩍훌쩍인 건가요?”

   “잠시 바깥에 함께 가주겠니?”

   “바보 파파는 생긴 것뿐만 아니라 지능까지 트롤을 닮은 건가요?”

   “…응?”

   “이렇게 귀여운 딸을 눈보라 속에 내던지겠다고요?”

   

   아. 맞다. 지금 바깥은 도저히 산책을 할 날씨가 아니었지. 감정을 수습하느라 급해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지 못한 건인가!

   

   “아니. 저. 그게.”

   “손은 또 왜 내미신 건가요.”

   

   베네딕이 속으로 자책을 하느라 말을 더듬는 동안에도 루시의 매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진득진득한 걸로 범벅이 된 더러운 손을 제게 잡으라고요? 무슨 의도인가요? 바보 파파에서 짐승 파파가 되기로 하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건 내 눈물이랑 콧물인데. 아니. 이게. 그. 그으으으.”

   

   어디서부터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을 풀어야 하는 거지? 이성을 되찾은 베네딕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중 루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듯 키득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해맑은 웃음을 말이다. 한참이나 쿡쿡대던 그녀는 멍하니 선 베네딕의 더러운 손을 기꺼이 붙잡았다.

   

   “에스코트까지 허접하진 않겠죠? 실망스럽기만 해봐요. 다신 바보 파파랑 안 놀아줄 테니까.”

   “…최선을 다하마. 루시.”

   

   *

   

   바깥의 눈보라는 산책을 나서는 데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주신의 신성이 있었으니까.

   

   햇살같은 따스함을 품은 신성은 눈보라 속에서도 흐려지긴커녕 오히려 눈보라를 물리쳐 주변을 쾌적하게 만들어주었다.

   

   “내 여러 성직자를 만나 보았다만 신성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구나.”

   “바보 파파. 그 딴 허접쓰레기들이랑 절 비교하는 건가요? 진짜 기분 나쁘네요.”

   “하하.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영 칭찬에 서툴러서 말이다.”

   

   베네딕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쉴 새 없이 내 눈치를 살폈다. 충혈된 눈동자가 영 부담스러웠던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베네딕의 시선을 피했다.

   

   ‘할아버지. 어떡하죠?! 어떻게 해야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급하게 조언을 구했다.

   

   솔직하게 말을 해서 난 지금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얼빠 여우를 괴롭히면서 울적함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프레이가 방 안에 쳐들어와서는 페이비와 연결된 수정구를 가져갔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 뒤를 따라갔더니 초췌한 얼굴의 베네딕이 등장한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베네딕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 보여서 일단 그에게 어울려주긴 했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냥 어울려줘라. 저 딸바보 녀석이 네게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느냐.>

   ‘그치만 너무 부담스럽다고요! 지금 저 눈을 봐요! 제가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는 순간 끅끅 거릴 것 같다고요!’

   

   아니 진짜 뭐냐고! 내가 잠시 울적해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누가 제발 나한테 설명 좀 해줘!

   

   “그. 루시.”

   “뭔데요. 바보 파파.”

   “못나디 못난 아비라 미안하구나.”

   

   얘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덕분에 부담스러움이 한층 더 늘어났잖아!

   

   뭐지? 진짜 뭐지? 베네딕이 잘못한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 예전의 루시가 베네딕한테 저지른 잘못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네가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금이라도 베네딕의 손을 내팽개치고 도망칠까 생각하던 중 베네딕이 꺼낸 말을 듣고 고갤 들었다. 그의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이 아비는 너무도 멍청하고 부족한 인간이라 스스로의 힘듦밖에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래서 네가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을 때도 그 손을 붙잡지 못했어.”

   

   지금의 나는, 루시의 과거를 보고 왔던 나는, 베네딕이 사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루시가 겪었던 슬픔과 좌절을 알기에 베네딕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다.

   

   그래서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베네딕이 사과할 대상은 내가 아니니까.

   

   눈 위에 무뤂을 꿇은 베네딕이 사죄하는 이는 내가 아니니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뿐인 나에게는 용서를 할 자격도,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을 테니까.

   

   “긴 시간이 지나서야 염치도 없이 사과하는 게 추함을 안다. 그렇지만. 난.”

   

   그 때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정이 차올랐다.

   

   미라의 모욕을 들었을 때 분노했던 것처럼.

   

   베네딕의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가라앉았던 것처럼.

   

   과거의 나는 이 감정의 원인을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이건 루시의 감정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차마 미워하고 증오할 순 없었던 아이의 마음이다.

   

   이게 왜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있다.

   

   이 마음이 지금 내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숙인 베네딕과 얼굴을 맞춘다. 그리고는 그의 그늘 아래에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파파.”

   

   마음에서 차오르는 말에 메스가키 스킬의 번역은 필요치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비는 탈주해서 루시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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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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