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산에 사는 사람 ( 2 )
에샤는 산에 익숙한 사람이다. 산에 익숙하다는 것은 새벽에 자욱하게 일어나는 운무에도 익숙하다는 뜻이다.
“……”
그렇기에 에샤는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운무가 자연스러운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평범한 운무가 아니네. 아직 시간이 새벽도 아니고, 주변 공기는 안개가 일어날 정도로 습하지 않아.’
에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한 점을 하나 깨달으니 점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어째선지 높은 산의 꼭대기에 누워있었지만… 에샤의 기억에 없는 산봉우리였다. 아이야테르 산은 아니라는 뜻.
에샤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는 것 또한 떠올렸다.
‘그러면 이게 자각몽이라는 건가?’
에샤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이리저리 둘러봤다.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 17살.
에샤의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존재감을 발하며, 시체 묻을 곳을 물색하는 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얼굴 진짜 장난 없네…”
“……?”
지금 무슨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에샤가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청명하게 맑은 하늘 저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확! 다가온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여, 듣거라. 듣고 또 들어 나의 말을 경청하여 듣거라.》
쿵. 에샤는 지체 없이 무릎을 꿇어 머리를 숙였다.
그가 눈을 마주치도록 허락받을 수 없는 존재가, 꿈이라는 통로를 빌어 찾아오셨다.
《에샤. 너, 산에 사는 사람아. 생을 마감하며 살아가는 아이야. 나의 말을 들어라.》
“…듣고 있, 습니다.”
에샤가 힘겹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깊은 동굴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7살에 걸맞은 꾀꼬리 같은 옥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는 생명의 끝을 고함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자이니. 내 그대에게 사명을 부여하노라.》
“…?!”
사명? 사명이라고?
에샤가 산꼭대기에서 산양이나 도축하며 살아가는 촌놈이라고 할지라도 하나 된 분의 일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 사명? 용사님 같은 영웅분들이 받으셨다는? 내, 내가?’
바닥을 보고 있는 에샤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뻐끔거리는 입과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에샤. 그대는 수많은 생의 종언을 고하였다. 그대는 가장 험한 산 위에서 살아왔다.》
“……?!”
《그러니 너, 산의 사람아. 너는 산에 자리 잡은 고목처럼 굳세고 올곧게 사고할 것이니. 그대에게 하나의 귀물을 내리노라.》
샤아아.
하늘에서 빛에 휩싸인 무언가 떨어지며 에샤의 품으로 떨어졌다. 옅은 온기를 품은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천칭이었다.
《그것의 이름은, 정의. 선업과 악업을 헤아려 생의 무게를 잴지어라.》
‘아. 고기 무게 재는 거랑 똑같이 생겼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에샤는 불경하게도 신께서 주신 저울을 고기용 저울과 비교해버리고 말았다.
《또한 이것은 그대의 사명을 도울 벗이다. 암살검이라 부르라.》
또 다른 빛이 떨어지며 에샤의 왼쪽 팔을 감쌌다. 단단하게 팔뚝을 감싸 안는 감촉에 멍하니 만져보았다.
날카롭게 돋아난, 마치 송곳을 닮은 칼날이 팔뚝 아래부터 숨어있었다.
“…이, 것은.”
《그 검으로 사람의 생명을 해칠 적에는 오직 악업의 무게를 지닌 자만 해할 수 있으니, 이를 명심하라.》
머릿속에 새겨지는 지식을 느끼던 에샤는 멍하니 왼손을 까딱였다.
슈칵!
손을 뒤로 젖히자 검날이 팔뚝을 따라 순식간에 뻗어 나왔다. 제법 기다란 검날이었다. 얼추 길이를 헤아렸더니 한 뼘에 가까웠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더니, 스르륵 칼날이 원래대로 들어가며 철컥 무언가에 고정되는 소리가 들렸다.
에샤는 생전 처음 보는 기물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 암살검을 한참이나 작동시켰다.
슈칵! …철컥. 슈칵! …철컥. 슈칵! …철컥.
눈을 빛내며 암살검을 가지고 노는 에샤의 모습은 새로운 검을 얻어 신이 난… 살인귀의 그것이었다.
《또한… 그대는 산의 사람으로서, 부패하고 썩어가며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고름에게 종언을 고할 것이다.》
“…어…”
부패? 민중? 고름? 종언?
심상치 않은 단어의 나열에 에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신께서 내린 것들이 정확히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헤아리기 어려운 보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 사람의 선, 악을 무게로 잴 수 있는 저울이라고?!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것들을?’
무거운 힘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법.
영웅에 대한 동경과 공명심으로 두근거리던 에샤의 심장은 점점 부담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고름에게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푸른 피를 지니고 태어나 권리만을 누리며 저들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방탕하게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는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을 일컫는다.》
“…!”
그쯤에서 에샤는 신께서 무엇을 말씀하는지 깨달았다.
‘귀족?! 지금 신께서 나에게 귀족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귀족의 선업과 악업의 무게를 매달아 악업에 더 무거우면 종언을 고하는 이가 되라는, 참으로 부담스럽고 무시무시한 말씀이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범부인데. 어떻게 제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을지… 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물려야 한다! 이거 받으면 나는 죽는다!’
에샤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자신은 그저 짐승을 조금 잘 잡는 백정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패한 귀족의 멱을 따라니?!
겁이 난 에샤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무표정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니, 가뜩이나 살벌했던 얼굴에서 더더욱 무시무시한 기세가 흘렀다. 얼굴에 새겨진 흉터에서 벌건 피가 흐르는 착각마저 들었다.
《에샤. 너, 산의 사람아. 머지않아 그대의 밑에서 사명을 함께 할 자들이 산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을 산의 사람으로 만들어라. 너를 따라 종언을 고하도록 하여라.》
“……”
에샤는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대는 종언을 고하며 사명을 다하라.》
“…ㅡ어, 어어!
그 말을 끝으로 에샤는 강한 돌풍에 휘말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ㅡ
쿵!
“윽!”
침대에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작게 신음을 흘린 에샤는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봤다.
“……꿈이었나?”
그냥 허황된 꿈이었다면, 그렇다면 그 무시무시한 사명도 그저 자신의 망상처럼 사라질…
“아.”
철컥.
왼손 팔목을 단단하게 감싸오는 감촉. 에샤는 천천히 자신의 팔목을 바라봤다. 서늘한 빛을 흘리는 암살검이 에샤의 한 줄기 희망을 무력하게 박살냈다.
“………하.”
에샤는 한참이나 한숨을 흘렸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팔목의 암살검은 에샤에게 냉정한 현실을 고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맡에는 청동 저울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쯤 되면 에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간밤의 꿈에서 신께서 나타나더니 덜컥 귀족의 멱을 따라는 사명을 던져주셨음을.
에샤는 어딘가 멀리 도망쳐서 숨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야. 관두자. 그런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인간이 아무리 도망쳐도 하늘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에샤는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하룻밤 사이에 평범한 17살인 자신에게 너무 무섭고 무거운 짐이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일단… 일단 집으로 가자.’
간밤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정신으로 더 이상 뭔가 하기 어려웠다. 에샤는 멍하니 짐을 챙겨 마을을 빠져나왔다.
터벅 터벅.
에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깎아지듯 가파른 벼랑을 따라 멍하니 걸어갔다.
‘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나는 그냥 산에서 카우투스 모가지 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17살이라고.’
휘오오오오오.
발 두 개가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보폭의 외딴 길을 성큼성큼 내디뎠다. 삐끗하면 곧장 떨어질 낭떠러지의 밑으로 구름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 곧 사람을 보낸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 사람들도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려나?’
걱정이 이어지니 근심이 끊이지를 않는다. 에샤의 표정은 계속해서 어두워졌다.
세상 심각한 표정의 에샤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쑥쑥 타고 올라갔다. 등에는 수십 킬로의 짐을 메고 있는 채였다.
‘휴우. 내가 그 사람을 이끄는 대장은 아니겠지…? 아니야
내가 대장일 수도 있어. 사람의 선악을 재는 저울까지 주셨잖아.’
에샤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입으로는 계속 한숨이 나왔고, 덕분에 늘 오가던 70도밖에 안되는 경사에서 비틀거렸다.
“어엇.”
물론 곧장 균형을 바로 잡았다. 마음 심란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이런 길목에서 비틀거리다니.
이후로도 에샤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오르고, 낭떠러지에 가까운 디딤돌을 밟으며 나아갔다. 두꺼운 팔근육이 불끈거리며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땀 한 방울, 거친 숨 한번 내쉬지 않았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 완등할까 말까 하는 아이야테르 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의 위엄이었다.
“아. 집이다.”
꼬박 한나절이 걸려서야 에샤의 정겨운 오두막이 보였다. 혼자 살고 있기에 아주 작은 크기였다.
에샤는 이토록 험한 산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과거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 열 명 정도 있었다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며 모두 산을 내려가 이제는 에샤 혼자였다.
끼익.
“다녀왔습니다.”
삐걱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가며 에샤는 대답할 사람 없는 인사를 건넸다. 적막한 공기가 에샤를 반겼다. 습관 같은 쓸쓸함이 에샤를 감싼다.
마을로 내려갈 때마다 에샤는 산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수밖에.
겨우 17살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한창 놀고 싶은 나이. 허나 에샤는 이 작은 오두막을 떠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좀 오래 걸렸죠? 엄마, 아빠.”
오두막 옆에는 작은 돌무덤 두 개가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 나이에 에샤 곁을 떠난 어머니와 잠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이었다.
“…휴.”
어머니 아버지는 한평생을 아이야테르 산에서 살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하나의 영광이자 특권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에샤 또한 아이야테르 산을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러니 어찌 에샤가 산을 떠나겠는가.
가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돌무덤 앞에 주저앉은 에샤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제 어쩌지.”
혼자 살면서 자연스레 혼잣말이 늘었다.
“…하아.”
땅이 꺼져라 나오는 한숨에 에샤는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귀족을 죽이라고? 내가 어떻게? 평범한 17살이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신께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셨지.’
사람을 죽이라니.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을…
“에휴.”
멍하니 앉아있던 에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복잡하니 일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릴 작정이었다.
메에에에ㅡ
아이야테르에만 사는 카우투스는 높은 절벽을 타오르는 독특한 짐승이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도 너끈하게 올랐으며, 바위를 마구 핥는 기행을 주로 보였다.
“너희들이 맛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카우투스의 고기는 손에 꼽히는 고급 식재료다. 덕분에 에샤가 이를 도축하며 생활할 수 있었으니.
에샤는 오두막 뒤의 절벽을 성큼성큼 기어올랐다. 절벽에 매달려있던 카우투스가 기겁하며 펄쩍 뛰어 도망갔지만, 에샤가 더 빨랐다.
“어딜!”
거미처럼 절벽을 횡으로 이동한 에샤가 카우투스의 뒷다리를 붙잡았다. 이후 에샤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메에에에에ㅡ…
애처로운 카투우스의 울음.
에샤는 착잡한 눈빛을 보내며 천으로 카우투스의 눈을 가렸다. 짐승을 도축하는 이의 예우였다.
정갈하게 손을 씻고 복장을 가다듬은 에샤는 송곳처럼 뾰족한 도축용 검과 작은 망치를 들었다.
도축은 짧고 빠르게 끝나야 한다.
일절의 고통 없이, 신속하게.
“고통 없이 보내준다고 약속하마. 너의 모든 것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부드럽게 속삭이며 카우투스를 쓰다듬었다. 애처롭게 몸을 떨던 카우투스의 몸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노려 카우투스의 눈과 눈 사이를 조준한 에샤가 빠르고 정확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푹.
부드럽게 파고든 칼이 일격에 카우투스의 뇌를 찔렀고, 카우투스는 아무런 고통 없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부디 안식을 누리기를.”
쓰러진 카우투스의 안식을 기원한 에샤는 카우투스를 거꾸로 매달아 피를 뺐다. 그러면서 계속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이런 평범한 자신이, 겨우 짐승이나 잡는 사람이 어떻게 귀족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니, 엣, 그… 도대체… 암살 타락이라뇨…? 정말이지, 독자님들의 놀라운 상상력에 저는 때때로 감탄을 참을 수 없습니다…! 에샤가 막 흑화하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 저로서는 정말이지… 엄지을 치켜 올릴 수밖에 없군요…!! 인간이 죽는것이야말로 친환경이라니… 정말 개쩌는 환경주의자 빌런이네요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