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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88

    <388 – 종말의 파편>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시초에 대한 비밀이 담긴 정령들의 벽화.

    동조마법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동조마법은 심리치료사들이나 요양보호사처럼 치유계 직업에서나 쓰는 초보마법인줄 알았는데!

     

    전혀 달랐다.

    오크노디의 마법은 알량한 감정 따위를 공유하며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어둠과 동조하여 스스로 마음이 병들어 은퇴하는 젊은 요양보호마법사나 범죄심리치료사처럼 병든 마음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성능 좋은 뇌는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마치 천재의 머릿속을 빌린 것처럼 쏙쏙 들어오는 정령어.

    이제는 알 수 있다.

    마나퍼즐이라는 열쇠를 기억재생마법이라는 자물쇠에 넣고 돌리라는 오크노디의 비유를.

     

    ‘부러울 정도로 똑똑해.’

     

    학식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교양의 의미를 알겠어.

    재단의 영재교육을 받은 아이는 정말 똑똑했다.

    세상에 즐길 것은 얼마나 많은가.

    또 배울 것은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놀거리와 배울거리 사이에서 일상생활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을 쌓는다.

    하층민이 엄두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층민이라고 아무나 도전할 것이 아니다.

    고리타분하고 외골수적인 학자들이나 파고들법한 고고학적 지식과 정령어에 매진한 오크노디.

     

    ‘자의는 아니겠지. 분명 저 아이도 재단의 강제되는 가르침 때문에 힘들었을 테고.’

     

    그렇지만 부럽다.

    가르친다고 배워서 소화할 수 있는 지능과 끈기가.

    11살 아이에게 품기엔 속좁은 질투심.

    그것이 화근이었을까?

    문득 도비는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묘한 지점과 마주하였다.

     

    [뱀파이어의 가능성]

     

    동조마법을 통해 머릿속에 재생되다시피 펼쳐졌던 동화의 너머에 또 다른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문이었다.

    크고 새빨간 문.

    고급스러운 양각이 아치형으로 둥글게 테두리를 따라 새겨진 문.

    최초의 뱀파이어 노스페라투부터 세간에 이름을 알린 밤의 귀족, 수많은 뱀파이어들의 이름이 새겨진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피처럼 끈끈한 감촉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점성이 짙다.

    감촉이 말하는 정답은 굳은 피.

    고작 호기심으로 열어도 좋을 문이 아니다.

     

    그런데도 열어버린 이유는 어쩌면 오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산학부 지망생이라도, 내 기술이 저 빛나는 재능의 주인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도, 그래도 세계제일의 교육기관에 들어왔잖아.’

     

    앞으로 한 걸음 더.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기연이 찾아올지도 몰라.

    욕심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열었다.

    열어버리고 말았다.

     

    지평선의 끝까지 핏빛으로 가득 물든 하늘.

    태양보다 커다란 붉은 달.

     

    수많은 생명들의 피가 강제로 축출되어 저 하늘 위의 달로 전락한 무참한 파멸의 순간을.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전신의 피가 빨려나가는 탈력감이 느껴진다.

    흐려지는 의식.

    느릿하게 다가오는 죽음.

    무너지려던 그의 의식을 거대한 마나가 파고들며 강제로 의식을 되돌렸다.

     

    “이, 이게 대체… 다 어떻게 된 일이지?”

    “블러디 슈퍼 문.”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중한 목소리에 그가 자신에게 기를 불어넣어준 장본인임을 깨달았다.

     

    “시조 노스페라투. 선조살해자 드라큘라. 그 뒤를 이어 최후의 뱀파이어로서 그들과 이름의 격을 천공에 새긴 자, 블라디미르의 작품인가.”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위로 꺾어야 겨우 얼굴이 보이는 거한.

    그는 키만큼이나 거대한 몸집을 지녔다.

    그런데도 도비가 느낀 가장 큰 거대함은 키도, 몸집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었군. 피의 혈족에게 열린 진혈쟁탈전을 모두가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어.”

    “수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도 관계없는 일이라고 무시했기에 그들의 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을 도울 종족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지.”

    “당신은 누구시죠? 어째서 그런 것들을 알고 계시는 거죠? 이건 다 뭐고요!”

     

    도비의 물음에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묵묵히 말할 뿐.

     

    “허나 인류에게는 우리가 남았다.”

     

    우리. 남자의 선언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모든 존재의 혈액을 탐하는 <세계영역>에 맞서 자신의 마나로 제 몸 안의 피를 지킬 수 있는 실력자들이.”

    “혈마법의 종주이자 최후의 뱀파이어 블라디미르의 혈성을 추락시킬 자들이.”

    “그렇다. 세계수호의 사명을 등진 학생회와 달리 쇠락해가는 세상의 끝에서도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은 자. 우리가 바로 별사냥꾼이다!”

     

    세상의 모든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를 순수한 피의 마나로 환원시킨 블라디미르.

    그가 모은 피의 마력의 결집체 블러디 문의 영향을 받아 지상에 창궐하는 피조물 블러디스폰의 군세들이 달에 닿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모여들었다.

    해발 12500m의 고산.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신정산.

    그 산의 주인은 새로운 신성으로 등극한 피의 신 블라디미르이며 인류의 문명은 이미 마나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존재들의 사멸로 멸망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신정산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가자. 이게 우리의 졸업과제다.”

    “!?”

     

    이 사람들, 설마 졸업을 앞둔 4학년들이었어!?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다.

    4학년이 되려면 3학년 동급생 열 명을 죽여야 승급한다는 교내괴담이 정말인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이것이 정말 동화 속의 각인처럼 과거의 일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지.

    그러나 물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신정산을 오르는 인류 최후의 전사들, 별사냥꾼의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으니까.

    설마 하는 그의 눈에 마치 이름표처럼 그들의 정체가 떠올랐다.

     

    [북부대공 아이린]

    [제국황제 야요이]

    [초신속의 록펠]

    [천음의 만델라]

    […]

     

    981기 1학년 상급반.

    혹은 전기수의 상급반 실력자.

    하나같이 아카데미의 네임드들로 이루어진 무리.

     

    이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동조의 기억.

    오크노디의 심층에 깃든 기억의 편린.

    자신이 멋대로 들추어본 그녀의 비밀.

     

    ‘오크노디는 세계가 멸망할 가능성 중 하나를 알고 있었어!’

     

    다른 세계에서는 언젠가 일어난 과거이자 아직은 찾아오지 않은 미래를 알고 있다.

    직접 체험했든, 누군가에게 기억동조를 받았든.

    저 작은 소녀가 어깨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가혹한 미래를.

     

    ‘그래서였나? 마주친 이래로 항상 무언가를 즐기려고 들었던 그 웃는 얼굴은.’

     

    멸망의 미래가 너무나도 참혹하기에.

    그 전까지 누릴 수 있는 짧은 평화의 소중함을 알기에.

    졸업 전까지 충분한 성장을 거두지 못하면 막지 못할 미래의 참극을 기억하기에.

    그녀는 웃음을 멈출 수 없다.

    그녀는 성장을 멈출 수 없다.

    즐거움, 강함.

    자신이 재능의 증거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이토록 참혹한 미래에 마음이 꺾이지 않고 맞서 싸우는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싸움은 나약한 그가 따라가기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블러디 스폰은 피로 이루어진 생명체. 액체를 몬스터의 형상으로 유지하는 마나역장을 파괴하고 동시에 마나역장을 재생시키는 혈액을 단숨에 증발시켜야 해치울 수 있다. 마주치는 모든 적에게 한 합의 공격에 전력을 다해서 무너뜨려라!”

     

    그 한 합조차도 그는 펼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힘을 끌어올려 헛된 공격만 반복하다가 블러디 문의 마력으로부터 체내마나를 지키던 자신의 역장만 무너졌다.

     

    “허억!”

     

    장막이 무너진 도비는 산 채로 피가 끓어오르며 피부 밖으로 기화하여 빠져나가는 끔찍한 경험을 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 * *

     

     

    지평선의 끝까지 핏빛으로 가득 물든 하늘.

    태양보다 커다란 붉은 달.

    한때 저 달의 일원이 되었던 도비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굵고 진중한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 이게 대체… 다 어떻게 된 일이지?”

    “블러디 슈퍼 문.”

     

    이전, 그에게 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자가 다시금 등에 손을 얹고 기를 채워 넣어주었다.

    도비는 자신이 블러디스폰 한 마리조차 해치울 수 없는 걸림돌임과 동시에 남자가 자신을 도와줄 이유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류 최후의 결사대에 함께 할 자격조차 없는, 소중한 기를 부질없는 목숨을 유지하는데 낭비시키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시조 노스페라투. 선조살해자 드라큘라. 그 뒤를 이어 최후의 뱀파이어로서 그들과 이름의 격을 천공에 새긴 자, 블라디미르의 작품인가.”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이야기.

    그러나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수치스럽다.

    나같은 건 남겨두고 얼른 떠났으면 좋겠다.

     

    “가자. 이게 우리의 졸업과제다.”

     

    그들은 떠났다.

    헛된 싸움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된 도비.

    신정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형형색색의 마나가 폭발하고 산의 일부처럼 커다란 초대형 블러디스폰들이 연달아 펑펑 터진다.

    하지만 동시에 느껴진다.

    저 정도로 거대한 폭발은 마나장막을 유지해가면서 낼 수 있는 화력이 아니다.

    필시 저 폭발의 주인들은 저 순간에 명을 달리했겠지.

    인간의 목숨을 불꽃 삼아 터지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잔인한 불꽃놀이가 신정산의 정상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잔인해. 너무 잔인하다고.’

     

    이런 게 인류의 미래라는 것도.

    자신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도.

    이 무력함이.

    이 절망감이.

    매 순간 뼈저리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정산의 정상에서 쏘아 올라간 빛줄기가 지상과 창공의 경계를 잇는 거대한 기둥이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목도했다.

    이 절망의 끝에도 구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블러디 문이.

    세계 단위의 영역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하늘의 색을 되돌린다.

    비록 세상은 멸망했을지언정 이 끝에는 인류의 승리가 찾아오는 것이다.

     

    ‘목격하고 싶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저 산의 정상에서.

    이 절망의 끝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

    간절히 바라는 그의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한 차례 열어보았던 피처럼 붉은 문.

    손끝에 잡혀드는 끈끈한 감각.

    도비는 기꺼이 문고리를 돌렸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리고 진실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네 차례다. 자폭해라, 아이린.”

    “잔인하구나. 해병, 당신이라는 남자는 언제나.”

     

    인류 최후의 영웅들을 한 명씩 폭사시키며 길을 여는 대장의 잔혹함을.

    도비를 살려주었던 남자.

    그가 자신의 입으로 죽음을 명령하고, 자신의 손으로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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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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