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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가습기에서 뿜어지는 물 가루처럼 흩어지는 보슬비.

    이미 옷은 푹 젖었고, 흩날리는 빗방울 때문에 눈도 뜨기 힘들 정도였지만 억지로 눈을 뜨고 골목 너머를 바라봤다.

    어둠에 잠긴 골목은 괴물의 아가리처럼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혜진아, 혜진아, 혜진아. 어디 갔니?”

    증오스러운 남자의 태연한 목소리.

    사방을 뛰어다니며 나를 찾는 발소리가 적막한 골목길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러길래 팔라고 할 때 진작 뿔을 팔면 좋았잖아? 이러면 우리는 일이 귀찮아지고, 너는 돈을 못 받아서 슬프고 말이야.”

    숨을 최대한 고르고 기회를 노린다.

    “거기에 한 번 잡혔으면 얌전히 있어야지, 기어코 거기서 탈출해? 매를 벌어요. 매를.”

    저런 놈에게 잡힐 순 없어. 

    서울로 향했던 언니를 찾아야하니까.

    “혜진아. 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걸어서 서울까지 가게?”

    언제나 비굴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놈이었지만, 전부 연기였던 걸까?

    비굴함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이야기를 해줘야지. 그 자살했다는 년. 내가 소개한 병원 가서 자른 거야. 웃기지 않아? 그렇게 당당한 체하던 여자가 뿔 잘리니까 바로 의기소침해지는 거 말이야.”

    까득. 이빨을 앙 다물었다.

    ‘신경 쓰이게 도발하는 거다. 무시해.’ 라고, 계속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신기하지 않아? 머리에 달린 뿔 좀 잘랐다고 정신이 병드는 거 말이야. 너도 곧 몸소 체험할 수 있을 테니 기대하고 있어.”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서 기회를 엿본다. 

    저 남자가 돌아서는 순간 반대로 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우선 여기서 벗어난 다음에 생각해야할 일이었다.

    남자는 내가 숨어있던 골목 입구 앞을 지나쳤다.

    이제 좀 더 숨어있으면 도망갈 수 있어!

    “아! 사실은 어디 숨었는지 방금 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 바로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고 놀라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깡.

    하지만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쇳소리가 내 머리에서 울렸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탁 풀려서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아, 그러고 보니 너희 언니 말이야. 지금 너처럼 우리한테 잡혔어. 바보 같은 게 자매가 똑같네.”

    힘겹게 위를 올려다보니 내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야구배트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

    부천 연구소.

    부천시 구석에 세워진 연구소.

    이미 망한 지 오래 지나서 사람 하나 없던 연구소.

    폐허처럼 방치된 연구소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허름했던 외관도 멀쩡해지고 직원들도 나타났다.

    하루아침에 멀쩡해져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요즘 공사는 정말 빠르구나.’ 하고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꼽자면, 직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음울하다는 점뿐이었다.

    그런 우울한 공기가 감도는 연구소 지하에서 연구소장은 경쾌하게 지팡이를 짚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격리실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소장은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벽면에는 트로피처럼 황금으로 만든 심장들이 잔뜩 벽에 걸려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파열음을 내며 녹아내렸다.

    소장은 그것을 메마른 표정으로 확인했다.

    “연구소 발견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뭐, 그래도 상관없지.”

    소장이 돌아본 격리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황금뿔이 돋아난 인간들.

    “재료는 이미 충분히 챙겨뒀으니 말이야. 그럼, 이제 다음 실험을 준비하게.”

    소장의 명령에 그림자에서 솟아난 연구원들은 황금뿔이 돋아난 인간 하나를 강제로 끌고나와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인류를 위한 연구를 시작하자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소장의 얼굴에는 가학심밖에 보이지 않았다.

    ***

    예린이 망가졌다.

    “사신아~”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우리 사신이는 안 사라질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앉아 있을 땐 언제나 뒤에서 날 껴안고 내 머리에 얼굴을 푹 묻고 있었다.

    움직일 때는 나를 품에 안고 다니거나, 겨드랑이로 들어 올리고 다녔다.

    솔직히 불편한데, 공급되는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아마, 내가 떠넘긴 황금 인형들이 뭔가를 저지른 게 아닐까 싶었다.

    귀찮지만, 예린이가 정상이 될 때까지는 특별 서비스를 해주기로 했다.

    몸을 뒤집어서 마주 안아주었다.

    예린이가 정상이 될 때까지만 해주는 특별 서비스였다.

    ***

    세희 연구소 소장실. 

    중뢰와 세희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서류 위로 손가락을 툭툭 두들기며 세희가 말했다.

    “귀여운 강아지 관리 비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네? 이정도면 무리를 해서라도 강아지를 정식으로 인수하는 게 나아 보이는데, 어때?”

    “회색 사신이 귀여운 강아지를 ‘조련’한 뒤로 얌전해졌습니다. 그 악명 높던 귀여운 강아지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말이죠. 이정도면 꽤 무리를 해서 귀여운 강아지를 인수하더라도 충분히 수지가 맞을 것 같습니다.”

    중뢰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정보를 늘어놓았다.

    “사신이 없어도 말을 잘 듣는다고?”

    “네, 사신이 무서워서인지 사신이 주변에 없어도 충분히 협조적으로 움직여주더군요. 다만….”

    “다만?”

    “사신이 연구소를 떠난 기간 동안 측정한 데이터입니다.”

    중뢰가 간단한 수치와 사진이 첨부된 보고서를 세희에게 넘겼다.

    “귀여운 강아지의 체장 데이터?”

    “네, 회색 사신이 연구소를 완전히 떠난 뒤부터 강아지의 체장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돼? 원래 귀여운 강아지 체장이 50cm정도였지?”

    “네, 처음 귀여운 강아지를 인수했을 때 체장이 50cm였습니다. 회색 사신이 조련한 뒤론 20cm로 줄어들었죠. 그리고 회색 사신이 완전히 연구소를 벗어난 뒤, 하루에 약 1cm씩 커졌습니다.”

    “크기가 커져서 문제가 생긴 거야?”

    “네, 크기가 증가할수록 그와 비례해서 공격성이 증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회색 사신이 연구소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20cm가 되긴 했습니다만, 귀여운 강아지 인수에 꼭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사신이가 데리고 온 도마뱀 사례가 있지. 그 도마뱀 데려온 지 3일 만에 잊혀서 유기된 것 같던데, 귀여운 강아지는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관심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개집에서 자고 있던 귀여운 강아지를 강제로 깨우거나 이유 없이 두발로 걷게 만들더군요.”

    “사신이가 그렇게까지 괴롭히는 오브젝트는 처음 보네. 대부분 처음에만 관심을 갖다가 순식간에 관심을 잃어버리던데, 특별히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사신이는 개처럼 생긴 오브젝트는 다 싫어했던 것 같아.”

    세희는 서류는 모아서 서류철에 집어넣고는 일어섰다.

    “지금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회색 사신이 언제까지 관심을 둘지 잘 알아보자고.”

    그렇게 중뢰와 세희의 대담은 끝이 났다.

    ***

    정처 없이 걷기만 하는 선배를 따라가고 있었다.

    “선배~ 이제 그만 좀 돌아가죠?”

    “힘들면 먼저 돌아가. 나는 의뢰를 받고 돌아갈게.”

    의뢰를 찾아 떠난다기에, 어디선가 의뢰라도 받아왔나 싶었더니….

    이상한 헛소리만 하면서 걷기만 하고만 있었다. 

    딱히 의뢰를 찾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돌아다니기만 했다.

    이렇게 의미 없이 걷는 것보단 사무실 전화 앞에 서서 의뢰를 기다리는 편이 더 의뢰를 받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지만 선배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해가 지평선에 걸려 석양이 질 때도, 해가 완전히 넘어가 밤이 됐을 때도 계속 걷기만 했다.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앞으로만 걸었다.

    진작 서울은 벗어나 버린 지 오래였다.

    한밤중에 도시 밖, 사람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무슨 의뢰를 받는다는 건지.

    게다가 이슬비가 오고 있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더욱더 줄어든 상태였다.

    “사건이군.”

    선배는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둑어둑한 골목에서 한 여자가 야구배트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내가 처리할 테니, 증거용 영상 좀 촬영해 줘!”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머리에 열이 올라서 잘 들리지 않았다.

    등에 메고 있던 친숙한 도구를 꺼내들었다.

    해머.

    망치.

    나는 익숙한 감촉을 느끼며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뒤에서 선배의 한숨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

    후배는 폭력 상황에서는 가끔 미쳐 날뛸 때가 있었다.

    미쳐 날뛰는 후배는 나보다 싸움을 잘한다. 

    가끔은 오브젝트의 영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느긋하게 뒤에서 폭주하는 후배의 모습을 진득하게 촬영했다.

    영상에는 여자를 납치하려다가 화들짝 놀라는 남자 3인조가 제대로 잘 찍혀있었다.

    남자들은 망치를 휘두르면서 벽을 차고 날아다니는 광인을 보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

    무섭지, 화난 후배는 무섭다.

    헥헥, 숨을 몰아쉬는 후배를 뒤로하고 기절한 소녀를 흔들어서 깨웠다.

    멍한 표정으로 일어난 소녀에게 명함 한 장을 들려줬다.

    “안녕하세요. 혹시 의뢰할 거리가 있지 않으신가요?”

    여자는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표정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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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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