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
비이이이이무?
이것들은 비무 못 하면 뒈지는 병에 걸렸나.
왜 귀찮게 공개적으로 비무 신청을 하고 난리야. 거절하기 곤란하게.
이거 아마 노린 거겠지?
나는 나만큼은 아니어도 꽤 덩치가 큰 언 뭐시기와 눈을 마주쳤다.
호승심에 가득 찬 눈.
필시 나와 싸우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것이리라.
남자가 질척 대는 건 취향이 아닌데.
서역 출신 무인이라는 게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건가.
“비무라…”
“무릇 무인이란 검객끼리 만나면 검을 맞대고, 권사끼리 만나면 주먹을 맞대어 친교를 나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처음 듣는 소린데.
“그러니 서역의 권과 중원의 권을 맞대어 견식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상황상 거절하기는 곤란하니, 내 선택지는 하나뿐인가.
나는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나 윌리엄 마셜, 비무를 받아주겠다. 비무 장소는 어디로 할 테냐?”
“감사하오. 이 객잔 옆 공터가 괜찮아 보이더군.”
이렇게 된 김에 중원의 권이라는 게 어떤지 한번 볼까.
나는 먼저 몸을 돌려 객잔 바깥으로 나가는 언철산의 뒤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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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의 권법. 과연 어떨지…’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돌려가며 몸을 푼다. 내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무림인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준비였지만, 그래도 그는 이런 식으로 몸을 풀어주곤 했다.
“이거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되는구만.”
“철풍권 대협과 청안사자의 대결이라니. 한동안 공짜 술 얻어먹기 딱 좋은 이야기로군.”
“이 사람아, 또 얻어먹을 생각만 하는가?”
“하지만 남이 사주는 술만큼 맛있는 게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건 맞지.”
구경꾼들과 해남검문의 사람들이 공터를 둘러쌌다. 객잔의 주인도 비무가 벌어진다는 소식에 꼭대기 층 창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른 객잔이라면 말리러 들어가거나 한숨을 쉬었을 테지만, 그는 이 장사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장사꾼이었다.
상업의 도시지만 무림인들도 많이 돌아다니는 만큼, 차라리 비무할 장소를 제공해서 적당히 볼거리를 만드는 게 이득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공터를 작은 비무장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객잔에서 싸움이란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요소였으므로.
“왕삼아. 화주 좀 가져오거라.”
“예, 대인.”
“서역인과 중원인의 대결이라…”
흥미가 가득 담긴 눈길이 윌리엄에게 쏟아진다.
‘전장에서 결투했던 때가 생각나는데.’
윌리엄은 이제는 색이 빠져 붉은색만이 선명한 기억을 떠올렸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터번, 구릿빛 피부. 그리고…살의로 가득 찬 눈.
눈을 두어번 깜빡인다.
어느새 그의 상대는 언젠가 보았던 중국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무복을 입은 근육질의 남성으로 바뀌어있었다.
살의 대신 호승심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
윌리엄의 입가에 실소가 지어졌다.
‘아직도 영 어색한데.’
“본인은 진주언가 가주 언철악의 차남이자 무림 동도들에게는 철풍권이라 불리는 언철산이오! 이 비무에서는 언가권을 사용하겠소!”
“나는 서역에서 온 윌리엄 마셜. 가문은 없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청안사자라 불리고 있더군. 사용하는 아츠. 너희들의 말로는 무공이라고 해야되겠군. 여튼 로마 검투술을 사용하겠다.”
오른발을 앞으로 숙이고, 상체도 살짝 숙인 채로 두 팔을 가슴 높이까지 올린다. 간단한 자세였지만, 특별한 무의 이치가 느껴지지 않는 묘한 자세.
‘소문에 따르면 사자가 노려보는 것 같은 안광을 가진 자라고 했거늘,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나.’
세상 소문이란 게 부풀려지기 마련이라지만, 야성미보다는 이성적인 인상을 풍겼다.
물론 그 거대한 체구에서 오는 압박감은 무시할 수 없었지만 듣던 것처럼 모두를 압도하는 기세가 아니었기에, 몇몇 구경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유권인가 강권인가. 일단은 강권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윌리엄은 앞으로 나서지 않은 채로 언철산을 관찰했다. 중원의 무공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그지만, 강권과 유권은 느낌부터 달랐기에 어지간히 기이한 무공이 아닌 이상 티가 날 터.
‘철풍권이라 했으니, 강권에 가까운 모양이군.’
한쪽으로 쏠렸느냐, 아니면 중도에 가까운가.
그런 고민을 당장 하는 것은 그리 효율이 높지 않을 터.
이대로 가다간 계속 대치만 하게 될 터.
빠르게 끝내고 싶었던 윌리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수는 양보하지.”
“그럼 가겠소.”
핫! 하고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언철산의 신형이 잔상을 그리며 윌리엄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당한 속도.
윌리엄은 언철산의 주먹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몸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풍압이 윌리엄의 옆머리를 뒤로 넘겼다.
‘확실히 강권이군.’
주먹에 실린 기세를 보아하니 잘못 맞으면 뼈가 부러질 터. 윌리엄은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움직임으로 언철산이 주먹을 회수하고 다시 내지르는 주먹을 손등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앞으로 걷어낸 손으로 얼굴을 향해 내지른다.
언철산은 이 정도는 쉽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꺾어 공격을 피해냈다.
둘은 서로의 공격이 실패하자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첫 교환은 서로 무위로 돌아간 상태. 하지만 둘은 서로의 첫수를 통해 상대를 파악했다.
‘동작이 간결하군. 하지만 특별한 무리가 들어가 있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상승무공이 그러하듯, 특별한 무리를 담고 있지 않은 반격. 언뜻 보면 권법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주먹질에 가까웠지만 권사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실전적인 권공이로군!’
대개 상승무공일수록 평범한 무공에서는 보기 힘든 동작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상승무공이란 단순한 몸의 움직임이 아닌, 하나의 이치를 내공이라는 수단을 통해 현실에 재현시키는 것이기 때문.
요컨대 고절한 내공과 원리를 활용하기에 기이한 동작을 사용해도 실전적인 무공과 능히 겨룰 수 있다는 뜻.
하지만 윌리엄의 동작에선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일부러 숨기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단지, 언철산은 그의 권법에서 무언가가 모자라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을 뿐.
한편, 윌리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언철산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다른 게 아니라 그는 보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괜스레 공격에 나서면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상대가 시정잡배라면 보법이고 뭐고 바닥에 얼굴을 갈아버렸겠지만 상대는 무림 세가의 자제.
본인보다 경지가 낮아 보이더라도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굳게 단련한 하체로 중심을 잡고 강하게 내지르는 일 권이라.’
무릇 모든 무술은 하체가 안정되어야만 한다.
인간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존재이기에.
그렇기에 윌리엄은 오른발을 앞으로 슬쩍 내민 채 무릎을 굽혔다.
아무리 보법을 쓸 수 없다고 한들, 기초적인 움직임 자체는 배우는 법.
윌리엄은 몸을 숙인 채로 땅을 박찼다.
덩치 탓에 정말로 맹수가 달려오는 듯한 기세를 풍기며 윌리엄이 언철산에게 달려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언철산에게로 향했다.
올곧지만 단순한 돌격.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당장이라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윌리엄의 모습에 언철산이 뜨거운 눈으로 자세를 잡았다.
방심 따위는 없다.
미지의 적에게 방심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언철산의 다리 간격이 벌어지고,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그리고 달려오는 윌리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변초 따위는 없는 정직한 주먹. 하지만 파공성이 들릴 정도로 빠른 일격.
윌리엄의 눈이 그 주먹을 쫒았다.
그리고는 오른발을 바깥쪽으로 벌리고 언철산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그 순간 싸움이 결정되었을 터.
하지만 언철산은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었다.
‘발차기인가!’
권법이라고 하지만, 결국 권법에는 각법 또한 포함이 되어있는 것. 윌리엄은 명치를 향해 날아오는 오른발을 확인하곤 공격 대신 왼팔로 발차기를 막아냈다.
서로의 몸에 충격이 달린다.
‘강철로 된 기둥을 차는 것 같군!’
하지만 윌리엄은 팔에 느껴지는 고통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지근거리까지 달라붙은 상황이기에, 언철산은 그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철판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정권이 아님을 모르고.
순식간에 앞섶을 잡힌 언철산의 몸이 원을 그렸다.
잘못하면 곧바로 땅에 메다 꽂힐법한 위기.
하지만 순순히 당해줄 언철산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다리를 굽혀 바닥에 발을 박아버리고는, 하체의 힘으로 메치기를 버텨냈다.
윌리엄은 비틀린 자세로 언철산을 잡고 있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었기에 손을 놓고 몸을 돌려 언철산의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언철산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대단하군! 무당의 태극권에서나 볼법한 수를 펼치다니 말이오!”
둘이 다시 한번 거리를 벌린다.
“아쉽군. 방금 한 번에 끝낼 생각이었는데.”
“하하! 그래도 이 몸이 비무 경험은 풍부하다오!”
언철산이 호탕하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허초를 허초로 맞받아치다니, 이거 박빙이로구먼.”
‘생각보다 상대하기 번거롭군.’
주 장기인 검을 든다면야 손쉽게 요리하겠지만, 맨주먹으로 상대하기에는 다소 귀찮은 상대.
‘튼튼한 놈인 것 같으니 한 번에 몰아치는 게 낫겠군.’
윌리엄의 신형이 다시 한번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검투술은 공세에 들어설 때 진가를 발휘하는 아츠였으니까.
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