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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39.

       

       람파이드는 품 속에서 투루스 한 자루를 꺼냈다.

        

       방금 전 투루스를 던지고, 아래층으로 몸을 숨기면서,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갑판을 한번 흘깃했다. 그는 곧바로 시선을 원 위치로 돌렸다.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녀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것도 아닌 움직임을 제한하는 거에는 도가 튼 시르바느니까.

        

       이미 배에 잠입을 하면서 구조는 확인을 마쳤다. 이곳 아래층에는 위층 선실로 통하는 작고 짤막한 통로가 하나 있었다. 노움용으로 보이는, 유사시에 탈출을 위한 비상용 같았지만 지금은 그저 그에게 좋은 이동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날렵하게 몸을 던졌다. 그 노인보다는 살짝 키가 크긴 하지만 드워프인 그에게 그 통로를 통한 이동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실에 조용하게 몸을 올린 그는 은밀하게 주변을 훑었다. 선실에는 황금빛 신성력이 옅게 퍼져 있었다. 어떻게든 바깥으로 신성력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거센 배의 움직임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금방 흩어져 버린다.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참으로 성녀답지 않은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과 달라진 것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 다친 자를 쉬지도 않고 치유하던 그 모습. 반년전이나 지금이나 에실리아는 여전히 성녀였다. 그녀를 곁에서 가장 가까이 지켜본 자신만은 알 수 있었다. 람파이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성녀님.”

        

       그가 빙긋 웃으며 에실리아를 불렀다. 공중을 부유하던 황금빛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허공으로 녹아 들었다. 긴장한 것인 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람파이드는 부드럽게 그 움직임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여전히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성녀는 서랍과 침대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성녀의 얼굴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람파이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러면 마치 성녀가 그를 반기지 않은 것 같지 않은가. 람파이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 어떻게?”

        

       성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시선을 창문으로 던졌다. 거세게 퍼붓는 비와 그 소리 때문에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마 기사님이 당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의 호위기사는 다름 아닌 살아있는 죽음, 제르피에드 림 세드바이갈이니까.

        

       그녀는 람파이드를 날카롭게 노려 보았다. 람파이드는 더욱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고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이만 돌아가시죠, 성녀님. 방황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런 성녀님과 어울리지 않은 곳에서 머무는 건 여기 까지만 하십시오. 저런 더러운 노인네와 어울리니 제가 치워드려야 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요? 더러운…노인네? 지금… 지금… 판바노 영감님을 그 따위로…!!!”

        

       “아, 그런 이름이었습니까? 예, 말씀드렸다시피 더러운 노인네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성녀님 같은 고귀한 분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멍청이 아닙니까? 지금 곁에 있는 그 기사도 그렇습니다. 그 노인네보다는 낫지만 이런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배에 성녀님을 머물게 하다니, 참으로 불민한 자 아닙니까? 성녀님의 자애를 받을 가치도 없는 자들입니다.”

        

       람파이드는 더욱 웃었다. 미소가 아니라 거의 광소였다.

        

       “그러니, 돌아갑시다. 이런 고결한 당신께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가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당신의 자애를 가치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저는 성녀님의 곁을 보필하겠습니다. 원래와 같이 당신을 지키셔 말입니다. 자, 갑시다. ‘나의’ 성녀님.”

        

       그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따라 성녀는 람파이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 젊은 드워프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성녀에게 그 얼굴은 웃음이라기 보다는 일그러진 형태에 가까워 보였다. 성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람파이드의 손을 쳐냈다. 람파이드의 얼굴이 진실로 일그러졌다.

        

       “저는 당신만의 성녀가 아니에요. 람파이드.”

        

       에실리아는 그대로 침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침대에 기대어져 있는, 무엇인가들을 집어 든 성녀는 집어 든 그것들에 적합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람파이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녀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성녀님? 레이피어와 맹고슈? 어디서 병정놀이라도 배우신 겁니까?”

        

       그러나 성녀의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더더욱 레이피어와 맹고슈를 든 공격 자세를 풀지 않았다. 람파이드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거 내려 놓으십시오. 총교단에서 내려온 명령은 성녀님을 다치게 하지 말고 사로잡아 오라는 거였습니다. 거칠게 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실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더욱 자세를 숙였다. 전형적인 레이피어의 공격 자세였다. 람파이드는 더 이상 짜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웃으며 투루스를 빼 들었다.

        

       “하하하…! 성녀님께서 너무 온실에서 자라 바깥의 무서움을 잘 모르시나 보군요. 뭐, 좋습니다. 지금 가르쳐주면 그만이니까-!”

        

       마지막 외침은 거의 노성이었다. 그는 투루스를 휘둘렀다. 어차피 대성당 내부에서만 생활한 성녀다. 검은 집어본 적도 없다. 몇 년 동안 치유만 해왔을 뿐. 그런 성녀가 지금 검을 집어 든다고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총교단의 명령도 있으니, 대강 받아내다가 기절을 시키면 그만이다.

        

       그랬기에, 성녀가 맹고슈로 투루스를 정확히 막아낸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뭣…?!”

        

       그는 순간적으로 다음 동작을 이어가지 못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동작을 멈추자, 성녀의 눈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떨리지만, 정말로 올곧은 눈빛이었다. 마치, 자신의 쇄골을 향해 달려드는 레피이어처럼. 람파이드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람파이드는 투루스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피가 흐르는 자신의 쇄골을 감쌌다. 짜증은 거친 분노로 바뀌었다. 람파이드는 미친듯이, 아니 정말로 미친 것처럼 투루스를 휘둘렀다.

        

       에실리아는 레이피어로 막으려고 했지만, 애초에 레이피어는 방어력이 출중한 검이 아니다. 그리고 람파이드는 그녀보다 더욱 힘이 강했다. 레이피어가 손에서 튕겨 나갔다. 두번의 요행은 없었다. 성녀는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이 씨발년이-! 내가 뭐가 다르냐! 내가 뭐가 달라! 내가 저 더러운 새끼들하고 다른 게 뭐냐는 말이야! 내가 더 많이 곁에 있었다! 내가 너를 훨씬 더 많이 지켜 왔어! 너는 성녀잖아! 성녀라고! 나를 자애롭게 보듬어 주는 성녀란 말이야-!!”

        

       투루스의 칼날이 아슬아슬한 빛을 뿌리며 성녀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 선실의 문이 박살났다. 람파이드와 에실리아는 모두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람파이드는 어찌 보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들어온 것을 쳐다봤다. 들어온 자는 목덜미에 투루스를 박은 거구의 기사였다. 투루스를 목덜미를 박아 넣고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일견 괴기하기 까지 했다.

        

       람파이드가 투루스를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암살자였다.

        

       첫 번째로, 투루스는 투척용 단검이며 각도를 잘 조절해서 날리면 다시 회전하면서 던진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단검이라는 근거리 요소와 투척이라는 원거리 요소가 합쳐진 매력적인 무기다. 원거리에서 상대를 제거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도 암살자인 그의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이유도 그가 암살자라는 이유에서 파생한다. 기본적으로 투척용이기는 하나, 단검인 투루스는 유사시에 근접전으로 가도 별 문제가 없다. 특히나 단검이라는 특성상 품에 숨기기도 쉬우며, 비좁은 곳에서 크기에 구애 받지 않고 검이나 창과 달리 보다 마음대로 공격이 가능하다.

        

       람파이드는 왜 투루스가 훌륭한 무기인지 온몸으로 절감했다.

        

       제르피에드가 투루스를 목덜미에 박아 넣고 온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선실의 크기는 좁았으며, 그가 서 있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창을 마음대로 휘두를 만한 공간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덜미 한 쪽에 박혀 있던 투루스를 뽑아 람파이드를 향해 투척했다.

        

       날카롭게 날아간 투루스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그 반가운 마음을 표출했다. 에실리아를 향해 투루스를 겨누고 있던 람파이드의 팔이 단면을 보이며 추락했다.

        

       “크아악…!! 이 씨발 새끼가아-!”

        

       비록 한 팔은 잃었으나, 머리 하나는 남아있었기에 람파이드는 그 분노를 숨기지 않고 제르피에드를 노려보았다. 데스나이트와 람파이드의 눈이 마주쳤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한 쪽은 감정에 빠져 있었고, 다른 한 쪽은 무심했다. 당연하지만, 무심한 쪽은 데스나이트였다.

        

       곧 죽을 적에게 굳이 관심을 줄 필요는 없었다. 제르피에드는 목덜미에 박혀 있는 다른 투루스를 뽑아 람파이드의 목을 베었다. 여전히 거칠게 욕설을 뱉던 람파이드의 입에서 욕설 대신 피가 솟구쳤다. 드워프의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르피에드는 곧바로 성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실리아. 괜찮소?”

        

       성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피에드는 망토로 자신의 레이디를 감싸며 속삭였다.

        

       “미안하오.”

        

       에실리아는 고개를 마구 가로 저었다. 제르피에드는 다시 한번 낮게 속삭였다.

        

       “미안하오. 호위기사인데, 그대를 이런 상황에 빠트리고 말았군.”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레이디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 다른 두 색의 눈동자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에실리아는 천천히 다시 그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단, 나가지. 상황을 살펴야 하오.”

        

       에실리아는 부들거리며 끄덕였다. 성녀는 일어서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벌어진 엄청난 상황들로 인해, 부들거리는 그녀의 가냘픈 다리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했다. 제르피에드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에실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다가 호위기사의 품에 떨리는 머리를 묻었다.

        

       선실 바깥에는 아까 보다 더욱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천둥 번개의 포효도 심해져 갔다. 배는 더 이상 바다의 거친 감정을 감당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방향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성녀가 비를 맞지 않게 망토를 더욱 끌어올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데스나이트와 성녀의 눈 앞에, 한 형체가 잡혔다.

        

       그것은 쓰러진 판바노 선장이었다. 노움이라는 신장이 그다지 크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옆에 누군가가 기어가고 있었으므로.

        

       각각 하나만 남은 팔다리로 그를 향해 기어가던 시르바느가 데스나이트와 성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비바람으로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굉장히 기괴하게 보였다. 시르바느는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아아아…! 아아아…! 망할! 망할-! 이 망할 것들이-! 허억…! 허억…!”

        

       짧고도 강렬한 괴성을 토해낸 시르바느는 마치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 마냥 에실리아를 바라보았다.

        

       “마, 맞아…! 성녀…! 너 성녀잖아! 서, 성녀님! 이렇게 빌게! 내 팔다리 고쳐줄 수 있잖아! 그렇잖아?! 제, 제발…! 제발 고쳐줘! 서, 성녀잖아! 고쳐줄 거지? 응? 그럴 거지?”

        

       시르바느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나, 웃는다기 보다는 웃는 걸 흉내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데스나이트에게 안겨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성녀는 말을 뱉었다. 마치, 폭풍우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당신은, 판바노 영감님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도……!”

        

       성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해요. 자기에게만 소중한 게 아니라고요. 왜 당신이, 람파이드와 같이 다녔는지 알 것 같군요. 저는, 당신만의 성녀가 아니에요.”

        

       성녀의 말을 들은 시르바느는 더욱더 얼굴을 괴상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구 외치던 그녀는 판바노의 몸을 남은 한 손으로 잡았다. 그녀는 입으로 판바노를 잡아 끌었다. 순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제르피에드는 다음에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년.”

        

       그 심해처럼 깊고 차가운 말에 에실리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성녀는 조심스럽게 호위기사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핏빛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성큼거리며 시르바느에게 다가갔다. 자기 혼자 죽을 수 없다며, 판바노 옹을 끌고 가려는 그 미친 년에게로. 제르피에드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시르바느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갑판 너머, 포효하는 바다를 향해 시르바느를 내밀었다. 시르바느의 몸뚱이에서 피가 빗물을 타고 미친듯이 쏟아졌다. 어느새, 냄새를 맡은 것인지 청상아리와 백상아리 몇 마리가 밑에 모여들었다. 시르바느가 미친 년처럼 광소하며 말했다.

        

       “왜! 죽이려고?! 정말 죽이려고?! 성녀잖아?! 성녀인데, 나를 죽이려고!!”

        

       시르바느는 데스나이트의 품에 안겨 있는 성녀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노려보려고 했다. 데스나이트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그녀의 머리를 비틀어 오로지 자신만을 보게 만들었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 끝마저, 스스로를 편하게 하지 못하는 군.”

        

       시르바느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에실리아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려고 했나? 판바노 옹을 데려가지 못하니, 그녀의 죄책감이라도 데려가려고? 그녀는 너의 알량한 혓바닥에 놀아날 만큼 나약하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의 짐을 질 필요도 없지.”

        

       시르바느는 왜냐고 묻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망망대해로 떨어진 후였다. 그 별식을 기대하고 있던 상어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지금껏 내지른 소리 중에서 가장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마,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제르피에드는 기사답게 답을 해줬다.

        

       “너는, 내가 죽일 필요도 없다.”

        

       망망의 대해가 거친 포효로 동의했다. 엄청난 울부짖음이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와 성녀는 그 소리 속에서 한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녀를 안은 데스나이트는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에실리아는 데스나이트의 품에서 갑판 위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귀를 판바노의 입가에 가져갔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는 신음하고 있었다. 에실리아는 그의 상처를 소매로 틀어막은 채 신성력을 퍼부었다.

        

       “으…. 하, 씨발….”

       “말하지 마세요!!”

        

       에실리아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데스나이트는 곧 의아한 점을 느꼈다. 신성력을 저렇게 퍼붓는데도 환부가 치유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는 판바노의 표정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을 앞둔 자의 표정.

        

       데스나이트는 그 사실을 에실리아에게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성녀였다. 신성력이 닿으면서 치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계점을 넘었다는 것.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치료하려고 했다.

        

       “뭐야…. 너 성직자였냐…? 쿨럭…!”

       “말하지 말라고요!!”

        

       에실리아의 소매가 피로 얼룩졌다.

        

       “너나 힘 쓰지 마….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하하…. 씨발, 그것 보다… 내 배에 오른 그 잡것들은 어떻게 되었냐…?”

       “둘 다 죽었소. 하나는 목을 베었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던져줬소.”

       “뭐…?! 미친…! 그걸 던지면 어떡해…! 여기는 가장 깊은 해역이란 말이야…! 피냄새를 풍기다니…! 여기에는… 쿨러헉…!!”

        

       판바노가 말을 잇기도 전에 거대한 소리가 진동했다. 천둥소리나 바다소리와는 달랐다. 데스나이트는 몸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더욱 거칠게 배가 요동쳤다. 기괴한 소리가 바다로부터 흘러나왔다. 마치 그것은 파도가 각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피냄새를 맡은 바다의 굶주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켄Kraken. 무려 100 큐빗이나 되는 심연의 공포였다.

        

       파도를 움켜쥔 것처럼 보이던 그 촉수들은 이내 배를 움켜쥐려고 달려들었다. 가장 거대한 촉수가 메인마스트를 휘감았다. 판바노는 킥 하고 웃었다.

        

       “하… 미안하네… 씨발…. 나 하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뒤지네….”

       “그게 왜 어르신 때문이에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흐흐흑…!”

       “지랄…. 내 배에 오른 승객 지키지도 못한 건 내 책임이지….”

        

       데스나이트는 등에 메고 있던 파르티잔을 움켜쥐었다. 배를 휘감은 거대한 촉수를 필두로 크라켄이 머리를 보였다. 둥그런 입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빼곡했다. 만찬을 보며 크라켄은 군침을 흘렸다. 크라켄의 입에서 혀가 뻗어져 나왔다. 데스나이트는 그 다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판바노는 자신의 상태를 잊었다. 천둥소리보다, 바다의 해일소리보다 더욱 큰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박살난 메인마스트와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 그리고 추락하는 크라켄의 사체였다. 그는 눈을 그저 깜빡이기만 했다.

        

       데스나이트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미안하오, 불청객들을 상대할 때도 최대한 배를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

       “미친… 큭큭…! 너, 대체 뭐냐…? 크라켄을 일격에 쓰러트리는 놈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

        

       데스나이트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는 말해주기로 했다. 자신이 기사도를 따르는 것처럼 일생을 바다를 따른 이 노인에게 그는 경의를 바치기로 했다.

        

       “제르피에드 림 세드바이갈.”

        

       판바노는 미소를 지었다.

        

       “살아있는… 죽음…? 큭큭큭…! 대단하군…!”

       “…내가 원망스럽지 않소?”

       “내가? 왜? 생사대전 때문에? 지랄마….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대단하군…! 내가 본 것 중 최고야…! 살아있는 죽음이라니…! 지금껏 정말 많은 것들을 봐 왔어…. 고대의 마신의 대신전…. 가장 깊다는 해구…. 외딴 섬에서 초월의 시대에 있던 이름없는 국가의 비석도 봤지….”

        

       데스나이트의 몸이 움찔했다. 유언이었다.

        

       “너 만큼 대단한 걸 본 적이 없어….”

        

       노인의 눈은 맑았다. 죽음의 순간에 노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났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 내 아내와… 아들에게…. 내 일생의 모험담을 들려줄 수 있어…. 내가 돌아가면… 내 남은 몸뚱아리는… 바다에 줘…. 내 가족에게…. 내 고향에…. 푸른물수리는…. 가지고 싶어하는 뱃사람에게 줘…. 야… 살아있는 죽음. 너 이제… 키 몰 줄 알잖아…. 설마 살아있는 죽음이 그걸 못하지는 않겠지…? 동부 대륙 말이야….”

        

       데스나이트는 노인의 손을 붙잡았다. 판바노는 피식 웃었다.

        

       “물론이오.”

       “그래…. 다행이네… 마지막엔 제자 한 명 두고 가서….”

        

       

       판바노는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생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은, 그렇게 바다로 돌아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아아아!!! 두 시간안에 6,000자 쓸 줄 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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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고슈: 레이피어를 쓸 때.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보조용 단검.
    맹고슈는 왼손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온 것으로 이렇게 단순한 이름이 붙은 이유도 간단하다.
    바로 오른손잡이들이 왼손잡이들 보다 많아 레이피어를 오른손에 잡고, 보조용 단검을 왼손에 잡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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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데스나이트는 성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Score 3.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trayed by her own Order*, the Saint begged the death knight to become her guard—the death knight who could destroy the world. *tl note: she was betrayed by the church, not her own doing. Author Notes: Contains Authentic fantasy, and wholesome love. I hope this brings you the reader a little bit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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