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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허리띠 왜요.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그러자 늙은 거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술 안 뺏어 먹겠다는 뜻이었다.

         

       “흠흠,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게나.”

       

       “하아. 그래서, 뭐야요.”

         

       안 뺏어 먹겠다니 봐준다.

         

       “노부는 누곡이라고 하는 거지일세. 때로는 수비구라 불리기도 하지.”

         

       수비구 누곡.

       청은 몰랐지만 유명한 거지였다.

       별호부터가 비밀을 잘 지킨다고 했으니, 중원 천지 개방도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었다.

         

       물론 비밀을 지키는 이유가 신의 따위의 고리타분한 가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본인이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고자 한다고 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 될 테니 비밀을 말해달라는 뜻이었다.

         

       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사람은 본디 비밀을 알면 퍼뜨리고 싶어 온몸을 비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살아있는 갈대밭을 자처한 거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심신의 안정을 얻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사정 모르는 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자, 왜 한숨을 그리 쉬는가?”

       

       “이젠 거지까지 통성명을 하자 하길래요. 내 팔자가 아주. 이 몸뚱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 거지.”

         

       늙은 거지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당돌한 아해가 사내놈이었으면 당장에 한 대 이상 쥐어박고 무림식 예절교육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년의 여아다.

       여아를 두들겨 패는 일은 무림의 원로가 하기에는 너무나 가볍고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다.

         

       이 고약한 계집.

       거지 알기를 아주 거지같이 하는, 진짜 거지 같은 년이로구나.

         

       음?

         

       누곡이 흠칫했다.

         

       거지 알기를 거지같이 알지 그럼 어쩌랴.

       거지 주제에 누굴 보고 거지 같은 년이라고 욕을 한단 말인가.

       언제부터 존경받는 존장으로 목에 힘을 주고.

       거지새끼가.

         

       이것이 술 한잔에 땅을 베고 하늘을 이불로 덮어 천하를 침상처럼 노닐던 신선 이철괴의 도리와 닿았다.

         

       순간, 누곡의 중심에서 내기가 일었다.

       한없이 껄렁하고 건들거리며 비틀거리는 형편 없는 진기의 흐름.

       그러나 그 속은 능히 천지를 품는 아량이다.

         

       누곡은 어렴풋이 초절정 후기에 진입했음을, 한 발짝 그 세상에 발을 디뎠음을 알았다.

         

       누곡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청은 자기 깨달음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깨달음만 듬뿍 담아준 것도 몰랐다.

       그저 정색을 했을 뿐이었다.

         

       뭐지? 조울증인가?

       하기야, 거지로 늙었으면 그럴 만도 한데.

         

       한참을 저 혼자 깔깔거리던 누곡의 목소리가 인자해졌다.

         

       “그래, 이 늙은이가 주책맞았네. 거지 주제에 이름 대면 누구나 다 알거라 생각했으니, 주책맞은 노욕이야. 낯이 다 뜨겁구먼.”

       

       “왜, 뭐, 유명하신 분이세요?”

       

       “그런 편이긴 하지. 그래도 이 근방에서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명한 거지인게 뭐 자랑이라고.”

         

       청의 반응이 뾰족했다.

       원래 인심은 내가 행복해야 나오는 법이어서, 청의 상태가 인심 쓰기에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누곡은 그저 좋은 표정이었다.

         

       “그래. 그렇고말고. 거지가 유명한 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나. 지나가던 거지도 비웃겠어.”

         

       때려도 느낌이 없으면 때리는 것이 아니다.

       긁어도 긁히지 않으니 청의 맥이 빠졌다.

         

       “그런데, 선자. 태평검문이 그리 막돼먹지는 않은, 그래, 따지자면 백도 정파라 하는 놈들 중에는 그나마 괜찮은 놈들이라네.”

       

       “뭐. 그런 것 같았어요.”

         

       이류 나부랭이 말단들의 업이 저 정도면 그야 그렇겠지.

       청이 순순히 긍정했다.

         

       “그런데도 그리 두들겨 패고, 검까지 뺏어 쫓아보내야 했나?”

       

       “그나마 정파 같으니까 봐준 거예요. 사파니 뭐니, 나쁜 새끼들이었으면 한 놈도 살아서 못 나갔어.”

         

       그쪽이 더 좋았을 텐데.

       청이 입맛을 쩝 다셨다.

         

       “오호라. 사파 놈들이면 다 죽였을 게다? 거 무시무시한 선자로군.”

         

       말은 그리 하면서도, 누곡의 표정이 조금 더 인자한 빛을 띠었다.

         

       “그래도, 굳이 끼어들 필요까지 있었던가?”

       

       “기분도 안 좋은데 꼴뵈기 싫잖아요.”

       

       “꼴뵈기 싫다?”

         

       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누구랑 떠들고 있으니 혼자 청승맞게 술이나 푸는 때보다는 좀 나은 것도 같다.

         

       그래. 오늘 인심 좀 썼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늙은 거지.

         

       “보호비를 받았으면 당연히 다른 업체가 뜯는 삥도 막아줘야지. 여기 사장은 만만하고 그 뭐야. 다른 업체.”

       

       “조호방일세.”

       

       “어쨌거나 걔네는 안 만만하니까 약한 놈 골라 괴롭히는 거랑 뭐가 달라요. 문파랍시고 떼로 몰렸으면 남자답게 한판 붙던가 그럴 자신 없으면 보호비를 포기했어야지.”

       

       “그야 그렇다마는, 선자가 무림 방파 돌아가는 꼴을 몰라서 그렇다네.”

         

       누곡이 말했다.

         

       만약 싸운다면 문파가 일시에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피가 흐른다.

       또 중소 문파가 으레 그렇듯이 위로 또 비호하는 큰 세력이 있어 잘못하면 큰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

         

       그렇다고 청의 말대로 보호비를 포기했다가는 그저 손 놓고 사업장을 우수수 빼앗기지 않겠냐고.

         

       청이 누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는 뭔데 피의 실드를 치고 있지?

       혹시 그쪽에서 뭐 밥이라도 얻어먹나?

       내가 눈꼴셔서 패겠다는데 지가 왜?

         

       “아씨. 그럴 거면 정파사파 흑도백도 뭐하러 구분하고 앉았어요? 칼 든 놈들 뭉쳐서 안 든 사람만 골라 등쳐먹을 거면서. 태평검문? 태평사업으로 이름 바꿔야겠네.”

       

       “흐! 크흐흣흐……!”

         

       늙은 거지가 별안간 빵 터졌다.

       뭐가 그리 웃겼는지 아예 배를 부여잡고 이마를 땅에 붙여 꺽꺽 숨막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그치지 않는 웃음이었다.

         

       청의 표정이 점점 식었다.

         

       이거 그냥 미친 거지였네.

       역시 거지 새끼들은 이래서 안돼.

         

       한때 거지와 험악한 사이였던 청이었다.

       거지를 혐오할 자격이 있었다.

         

       청이 신경을 껐다.

       동이를 들었다 놨다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몇 번일까.

       늙은 거지가 그제야 다시 허리를 펴고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혹시 스승님의 함자를 여쭈어도 되겠는가?”

         

       뭔데 우리 사부님 이름을 묻지?

         

       청이 일 없다고 쏘아붙이려다,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늙은이 특유의 그 정감 가득한 얼굴이 있다.

       사부가 청을 바라보듯이 하는 그런.

         

       심지어 내내 틱틱거리며 대들기만 했는데!

         

       마음이 약해진 청이 순순히 대답했다.

         

       “서문씨에 수 짜 린 짜 쓰시는데요.”

       

       “아! 서문 선배님!”

         

       누곡이 아는 척을 했다.

       청이 재차 확인했다.

         

       “사부님을 아세요?”

       

       “전에 몇 번 뵈었지. 이십 년 전쯤 여릉에서 이 늙은이와 함께 싸워 주시기도 했고. 그래, 아직도 마음에 안 들면 곧장 주먹이 먼저 나가시던가?”

         

       청이 바로 납득했다.

       아! 핵꿀밤 아시는구나! 그거 정.말.로. 아오.

         

       “신녀문의 선자였구먼.”

       

       “그건 아니구요. 외문제자라 하셨어요.”

       

       “호오, 외문제자라. 그건 정말 드문데……”

         

       아끼는 제자라면 문파 밖에 둘 이유가 없다.

       스승이 제 모든 것을 물려주고자 하는 데에는 역시 중화 인민 누천년 사상의 정수, 꽌시가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문파라는 뒷배경, 내부의 직위와 위치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또 신녀문이라 하면 조금 짚이는 바가 있기는 했다.

       본래 제자의 외출이 거의 불가능한 신비문파가 아니던가.

       굳이 문외로 두어 자유를 주어야 할 이유는?

         

       “선자의 경지가 절정은 넘겼구먼.”

       

       “넘었다뇨. 무려 후기거든요? 이 몸. 고수.”

         

       누곡이 감탄했다.

         

       “혹여, 올해로 연치가 어찌 되는가?”

       

       “정확히는 몰라요. 사부님은 스물쯤 된다고 하셨는데.”

       

       “선배님께서 대붕의 새끼를 품으셨구나!”

         

       누곡이 더더욱 감탄했다.

       약관에 절정 후기라니.

       그야말로 다음 대의 천하제일인이 유력한.

         

       “……!”

         

       누곡의 머리에 순간 벼락이 쳤다.

         

       예전 정파 무림의 거두는 구파일방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구파라 했다.

       일방이 쏙 빠지고 만 것이다.

       개방, 탈락.

         

       전부 무천대제 선배님 덕분이었다.

       무천대제의 개방 혐오는 유명했으므로.

         

       방금의 깨달음이 무천대제의 혐오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긴 했지만.

       거지도 못 되는 새끼들이라고, 새삼 아프다.

         

       누곡은 처음에 청이 저를 대한 태도와 눈빛을 떠올렸다.

       지독한 거지 혐오였다.

         

       ‘야단났구나. 이거 잘못하면, 또……!’

         

       잘 보여야 한다.

         

       천하제일인 까진 아니라도, 차기 여중제일인임에는 확정인 아해가 아닌가!

       여류 무인에게 여중제일인이 하는 말이 가진 파괴력이란, 실제로 인생을 뒤바꿀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

       

       “그, 선자는 거지와 악연이라도 있는가? 거지라고 나쁜 인간들인 건 아닌데.”

       

       “아휴, 말도 마요. 순 나쁜 새끼들 뿐이야.”

         

       청이 말을 쏟아낼 준비를 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와 그것마저 빼앗으려 드는 추악한 기성 세력의 견제, 그리고 그 패악질, 거점을 두고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치열한 전선에서의 나날들…….

         

       그러나 막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태평검문이 다시 나타났다.

         

       울퉁불퉁한 얼굴의 남강정을 필두로, 스무 명 정도 되는 무인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청의 표현대로 엄마를 데려온 것이다.

         

       남강정이 삿대질을 했다.

         

       “저기, 저 여인입니다!”

         

       계집이라느니 년이라느니 나쁜 말들 놔두고 하는 언어 선택이 나쁘지는 않았다.

       피 안 보고 두들겨만 팬 보람이 있다.

         

       청이 실실 헤픈 미소를 머금었다.

       안 그래도 슬슬 쑤시는 차에 2차전 시작이다.

         

       청이 주탁에 손을 탁! 내리쳤다.

       그리고는 묵직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태평검문의 중년인이 먼저 입을 털었다.

         

       여기에 개방의 칠결개, 집법장로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중년인이 공손하게 인사를 붙였다.

         

       “수비구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오호. 안경일검 자네로구먼.”

       

       “안경에 계신 줄 알았다면 문으로 모셔드렸을 텐데, 소식이 어두워 결례를 범했습니다.”

       

       “됐네. 거지새끼가 무슨 대접을 다 받겠나. 말은 고맙구먼.”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어라. 이러면 나가린데.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르신. 혹, 그, 소저와 일행이 되십니까?”

       

       “흠흠. 그게 말일세.”

         

       누곡이 청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제가 해결해 주겠다는 그런 뜻이었다.

       실제로 누곡에게는 그 정도의 권위가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늙은 거지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앉았네.

       애초에 그냥 상종을 하지 말걸. 텄네.

       거지새끼들은 왜 항상 이렇게 내 앞을 막지?

         

       오히려 역효과가 났지만.

         

       “내 사정을 들어 보니 자네들의 잘못이랄 것 까지는 아니어도, 세심하지 못한 부분이 있던데 말이야……”

         

       청이 낙담하며 술잔이나 채웠다.

         

       청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어린아이 머리만 한 술동이를 한 손으로 대충 집어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술을 따르는 기예였다.

       고수가 보여주는 성취기도 했다.

         

       청이 쟤네는 쟤네끼리 놀겠거니 하고 신경을 아예 꺼버리고 술이나 펐다.

         

       그러다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드니, 멀끔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흥분된 기색으로 외치듯 말하는 것이었다.

         

       “소저! 대련을 합시다!”

         

       청이 반개한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뭐야, 이 새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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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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