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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2차 평가전에서 카일 공자가 획득해온 문양을 바닥에 버렸다라…, 그럴 아이가 아닌데 이상한 노릇이군.”

       “그 점에 대해선 충언을 남겨두었습니다.”

       “어쨌든 혼약대전에 잡음이 생길만한 일은 자네의 판단에 의거해 처리하게나. 대면식이 끝나면 급한 용무로 수도성에 잠시 다녀와야 하니까.”

       “예.”

       

       그렇게 보고를 마친 겔우드가 가주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대공께서 노여워 할까 싶어 아카데미 측의 불쾌한 의사 표명은 보고하지 않았다.

       국왕의 개인적인 선처만 받았을 뿐, 아카데미 학장 입장에선 불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 건 이해했다.

       신성하고 공명정대한 배움의 터에 위장 잠입한 일은 잘못된 것이 맞으니까.

       더군다나 왕립 아카데미의 2대 학장은 엘페리온 왕국의 5대 대공 중 한 명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조사를 강행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인지하였기에, 대공께서도 조심스런 조사를 지시한 것이었고.

       

       다만, 그것과 별개로 조사 과정에서 무언갈 쉬쉬하려 하는 듯한 아카데미 측의 태도는 의문스러웠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폐쇄는 부패를 낳기 마련이다.

       폐쇄적인 곳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보다 은폐하는 것을, 변화보단 유지를 좋아라 하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왜인지 불길했다.

       현재 르미앙 윈터펠이 보이고 있는 심리적 불안정이 그 ‘쉬쉬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듯 했으니까.

       

       그녀를 갓난 아기 시절부터 봐온 겔우드였다.

       물론 제 새끼마냥 돌보지는 않았지만, 모시는 이의 급진적인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우둔하진 않았다.

       

       묵인하고 있었던 것은 모시는 이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었을 뿐.

       르미앙 윈터펠이라면 현명히 혼약대전을 이끌어가리라 믿었으니까.

       그 믿음이 흔들린다면, 대공전하의 말씀대로 자신의 선에서 미연의 방지를 감행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어젯밤, 엘든의 편지를 난폭하게 찢어버리며 광분하는 르미앙의 모습은 불안할 정도였다.

       처음엔 엘든이란 최종 후보의 기권이 외려 그녀의 환심을 샀다 여겼다.

       우승 가능성이 현격히 낮은 후보의 훌륭한 전략이라 여겼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르미앙은 엘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런 둘을 응원한 것은 혼약대전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이었다.

       혼약대전의 궁극적인 취지는 제 마음을 움직인 ‘사랑’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고, 그 과정이 과하지만 않으면, 그 과정이 혼약대전의 격을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없었다.

       대공가 막내딸의 언니도, 오라버니도 모두 같은 과정을 거쳤었고, 모두 성황리에 혼약대전을 마무리 지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차 평가전에서 르미앙은 제 언니와 오라버니들과 달리, 최종 후보들에게 해선 안 될 결례를 저질렀고, 그것은 혼약대전의 격을 떨어뜨릴 정도로 무례하고 황당무계한 행실이었다. 

       게다가 그날 밤엔 보여선 안 될 추태마저 보였다.

       엘든 공자의 정중한 편지를 찢어발기며 날뛰던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확신할 수 있는 겔우드였었다.

       자신의 믿음이 그릇된 방만이었음을.

       

       왕립 아카데미의 미적지근한 태도.

       기권자를 옭아매려는 르미앙의 태도.

       

       이 혼약대전이 단순한 혼약감 찾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확정되지 않은 추론을 대공전하께 보고해 사태를 번잡히 키우는 것보다, 조용한 진상 규명과 수습을 택한 겔우드가 제 집무실에 도착했다.

       대공께서도 그랬다.

       자리를 비울 자신을 대신해, 잡음이 생길만한 일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거해 처리하라고 말이다.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감시자부터 떼어놓아야겠군.’

       

       진작 했어야 할 일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감시꾼이라 할지라도 북적이고 한정적인 공간에선 노출될 위험이 높음을, 꼬리가 길면 언젠가 밟힐 수 있음을 일렀었지만, 변화의 이유를 알고 싶다는 대공녀의 아집에 의해 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

       평가단을 공식적으로 치워놓고 비밀 감시꾼을 붙였다는 것이 들통난다면 대외적으로 비난 받을 게 당연지사였다.

       불안정한 르미앙의 아집에, 불필요한 위기를 감수하는 건 이쯤에서 그만 둘 일이다.

       

       더군다나, 변화의 이유는커녕 소득 하나 없는 보고만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고.

       

       그리 생각한 겔우드가 밤이 깊도록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자정이 약속된 시간이었다.

       하루간 밀착 감시한 내용을 보고 받는 시간이 자정이었고, 그것을 훌쩍 넘기고도 나타나지 않는 감시꾼에, 겔우드가 침음을 흘린다.

       

       “흐음…….”

       

       이제껏 단 한번도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값어치를 충분히 해내고 있는 자였다.

       마지막 보고를 받고 임무 종료를 고지하려 했건만.

       어째서 무소식일까.

       왜 하필이면 이제 와 무소식인 걸까.

       그것이 뜻하는 게 무얼까.

       

       “…설마.”

       

       그렇게 그는, 들려오지 않는 소식에 밤새 고뇌에 찬 침음만 흘리며 집무실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

       

       

       

       “드디어 대면식의 아침이 밝았네요. 아가씨.”

       

       혼약대전의 꽃이라 불리우는 대면식이 거행될 아침이 밝았다.

       화창하면서도 포근한 햇살, 구름 한점 없이 푸르른 하늘, 경쾌한 새들의 지저귐, 온화한 기온, 드레스와 세팅을 망가뜨릴 바람도 일절 불지 않는, 완벽한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치장을 위해 화장대 앞에 다소곳이 앉은 르미앙.

       거울에 비친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마리엔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어제 하루는 휴식과 안정을 취하며 끼니도 제대로 챙겼던 터라, 한껏 수척해졌던 아가씨의 얼굴이 윤기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게. 정말 대면식이 시작되긴 하는구나.”

       

       물론 낯빛이 밝고 화사했던 예전과 같다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대면식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비추게 될 용모로써 합격이었다.

       워낙 본판이 훌륭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제껏 제 3대공녀의 모든 치장과 드레스 세팅은 마리엔이 도맡아 했었다.

       그 솜씨를 최고로 발휘해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여신으로 빚어내리라.

       그리 의지를 다진 마리엔이 능숙한 손길로 르미앙의 치장을 시작했다.

       

       고르게 달궈진 청동봉을 이용해 머리를 말고, 홍화를 다진 진물로 입술을 칠한다.

       

       “역시, 아가씨의 미모는 실패가 없다니까요?”

       

       장인의 손길로 한땀 한땀 여신을 빚어낸 마리엔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흐트러진 제 마음을 복돋아 주려는 것을 알기에, 르미앙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큼은 복수와 원한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했다.

       이미 그것에 휘말려 2차 평가전에서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고, 그제 밤에는 겔우드 경 앞에서 흉물스런 추태까지 보이고 말았다.

       같은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세상을 향해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딛는 것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긴장되지 않으세요?”

       

       예쁘게 말아낸 순백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던 마리엔이 물었다.

       

       “긴장 돼. 너무.”

       “히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다들 아가씨를 알현한 순간 환호를 내지를 테니까요.”

       “…….”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고 얄팍한 법이다.

       오늘만큼은 원한에서 벗어나겠다, 방금도 그리 다짐했건만, 마리엔이 얘기한 ‘다들’이란 지칭에 반사적으로 엘든이 떠오른 것은 참으로 우스운 마음이었다.

       어떤 얼굴을 할까.

       자신의 정체를 알고서 도망치는 것이란 가설이 그의 무표정으로써 신빙성을 더하게 될까.

       아니면 경악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

       

       궁금했다.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그리고.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란 걱정도 들었다.

       왜인지 허무할 것 같았다.

       1차, 2차 평가전을 통해 암시를 주었지만,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피해를 입은 이의 기억보다 피해를 가한 이의 기억이 흐릿한 건 당연할 노릇.

       게다가 그땐 붉은색 머리였으나 지금은 백색이다.

       마음 같아선 붉은색으로 염색하고 싶었으나, 이번 대면식이 백성들의 앞에서 치뤄지는 만큼,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부디.

       

       자신을 기억하고, 알아채길 바랄 뿐.

       

       그럼으로써 1차, 2차 평가전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게임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짠~!”

       

       마리엔이 뿌듯한 얼굴로 치장이 완료됐음을 알렸고, 거울에 떠오른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는 르미앙.

       이제 자신의 상징과 같았던 백색 여우 가면을 쓰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차례다.

       오늘만큼은 미소와 함께 그들을 맞이하리라.

       그리 재차 다짐한 르미앙이 가면을 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약대전의 꽃.

       

       이제 당당히 그것을 피우러 출발할 차례였다.

       만백성들의 앞에서 르미앙 윈터펠이란 존재를 알릴 차례였다.

       

       하지만….

       

       “네? 감시자가 갑자기 잠적했다고요?”

       

       불현듯 들려온 감시자의 잠적 소식은, 그 당찬 출발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내딛기도 전에 삐걱거리는 걸음.

       왜인지 불안한 출발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

       

       

       

       ‘와, 이게 대체 몇 명이냐.’

       

       대공성의 중앙 광장.

       드넓은 광장에 세워진 드높은 단상의 주변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족히 1,000명에 이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있었고, 난 그들과 단상의 사이에 서있었다.

       후회캐 3인방과 함께 말이다.

       한껏 꾸미고 온 그들을 보아하니 아직 우승의 희망을 놓지는 않은 모양들이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1열에 서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북부령 대축제의 흥에 맞춰주기 위함일 뿐.

       

       르미앙의 복수극과 일절 관계 없는, 지금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을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너그럽고 관대한 기권자의 마음이 나를 이곳에 서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더군다나.

       

       ‘처음 뵙는군.’

       

       제 막내딸이 세상에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될 뭉클한 순간을 위해 로건 윈터펠 대공이 단상의 좌측에 앉아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참을 논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좋은 패를 쥐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재적소에 쓰지 못 하면 똥패나 다름 없는 법.

       그렇기에, 후회캐 3인방과 함께 광장에 서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애착하는 소설 속 주인공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롤빵머리 영애님과 함께 말이다.

       시선을 돌리자 인파 속에서 기대에 가득찬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아리엘이 보인다.

       

       애석하게도.

       

       ‘…넌 며칠 전만 해도 만났었단다. 아리엘.’

       

       백발이 된 에린시아를 못 알아볼 뻔했다며, 백발이 백배는 더 어울린다며 유난을 떨었던 아리엘이었다.

       너도 기회가 되면 꼭 만나보라며 등까지 떠밀던 아리엘이었다.

       

       이제 그 바람을 이루겠구나?

       

       히죽.

       

       그저 해맑은 미소를 띄고 있는 아리엘을 따라 웃은 후, 단상으로 시선을 올렸다.

       

       잠시 후.

       

       

       “위대한 윈터펠 대공가의 제 3 대공녀, 르미앙 윈터펠이십니다-!”

       

       

       혼약대전의 꽃이라는 대면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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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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