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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아카데미 최고 지성의 편지 쓰기!”

         

       파스텔은 편지지를 붙잡고 깃펜을 휘갈겼다.

         

       슥슥슥슥.

         

       “흐아압!”

         

       「절친한 멜리사 캐머롯에게.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된 지 긴 시일이 흘렀네요. 제 부재로 외로웠을 당신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방학 내에 우리의 우정을 더욱 깊게 하고자 캐머롯 영지와 저택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일지 벌써부터 설렙니다. 당신도 그렇겠죠.

       물론 바쁜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싶습니다. 편한 시일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추어 방문할게요.

       당신과 그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곧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진실된 친구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가.」

         

       깃펜이 놓였다.

         

       파스텔은 가는 눈을 하고 냉정한 정신으로 편지 내용을 검토했다. 그리고 혼자 감탄했다.

         

       “완벽!”

         

       귀족 아가씨 그 자체.

         

       사실 난 천성적 노블레스가 아닐까?

         

       “완벽! 완벽!”

         

       파스텔은 편지지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백만 점짜리 편지.

         

       “이 편지를 읽은 멜리사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아무 설명 없이도 사과 농장을 개방해 줄 거예요!”

         

       그 뒤 몰래 비자금을 도굴해서 상단 자금으로 쓰면 퍼펙트.

         

       『줘봐라.』

         

       악마가 손을 내밀었다.

         

       “후후후!”

         

       파스텔은 의기양양해졌다.

         

       “악마님의 칙칙한 마인드로 제 결과물을 평가하신다 한들 진실은 변하지 않아요!”

         

       편지지를 번쩍 들었다.

         

       “백만 점짜리 편지~!”

         

       오예.

         

       『그래.』

         

       악마가 들어 올린 편지지를 뺏어갔다.

         

       “아앗!”

         

       내 백만 점짜리 편지이.

         

       『흠. 첫 문장부터 잘못됐군. 얘와 네가 언제부터 절친했지?』

       “처음 만날 때부터요! 처음 만난 순간 제가 딱 이렇게 했거든요!”

         

       파스텔은 눈에 힘을 줬다.

         

       “친구 빔~!”

         

       레벨999 친구 광선!

         

       “이러니까이러니까!”

         

       파스텔은 반대편으로 후다닥 움직였다. 그리고 친구 광선을 맞는 시늉을 했다.

         

       “멜리사가, 으아아! 파스텔의 친구 광선 너무 대단해!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이건 당장 친구가 돼야지!”

       『어째 내 기억과 다르군. 대련으로 시작해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도망만 치던 사이 아닌가.』

       “네에? 그럴 리가 없는데요. 항상 같이 다니는 저와 악마님의 기억에 오차가 생기다니! 이건 악마님 기억이 잘못된 거 아닐까요?”

         

       파스텔은 말하다 순간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동그랗게 됐다.

         

       “설마 치, 치매…….”

         

       허억.

         

       으아으아.

         

       너무 현실적인 단어.

         

       배덕감조차 들지 않는 하극상.

         

       파스텔은 죄책감에 벌벌 떨었다.

         

       벌벌벌벌.

         

       “괘, 괜찮아요! 고령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전 그래도 악마님이 좋아요!”

         

       돌돌 말린 편지지가 소녀의 머리를 톡 쳤다.

         

       으악.

         

       『멋대로 망상하지 마라.』

         

       으잉.

         

       악마가 새 편지지를 꺼냈다.

         

       『첨삭해 줄 테니 전부 고쳐 써.』

       “그럴 수가! 백만 점짜리 편지인데! 절친이라는 언급은 현실과 쪼끔! 다를지 모르지만 나머지는 제대로 썼었어요!”

         

       진짜 쪼끔 다를 뿐!

         

       『그렇군. 그냥 내가 쓰겠다.』

         

       으엥.

         

       사회의 관습과 문화가 슈퍼 울트라 초특급 파스텔을 받아들이지 못 하나 봐.

         

       악마가 편지를 새로 썼다.

         

       편지가 항공편으로 슝 배송됐다.

         

       파스텔은 캐머롯 영지행 비공정을 탔다.

         

       “편지보다 빨리 도착해 보죠!”

       『당연한 얘기지만 편지보다 일찍 도착하면 안 된다.』

       “허억, 놀라운 사실!”

       『도대체 뭐가 놀라운 거냐.』

         

       하늘섬에서 캐머롯 영지로 가는 직행 비공정은 없었다.

         

       인간계행 비공정을 타고 중간 경유지행 비공정으로 갈아탄 다음 다시 캐머롯행 비공정을 탔다.

         

       비행기 3번 갈아타기?

         

       으아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정.

         

       하지만 내가 겪는 일정.

         

       도중에 응답 편지까지 회신받으며 비공정을 3번 갈아탔다.

         

       파스텔은 격한 항행 일정에 녹초가 됐다. 비공정 난간에 힘없이 늘어졌다. 분홍 머릿결이 난간에 걸린 빨랫감마냥 나풀거렸다.

         

       으아.

         

       체력이 방전된 파스텔…….

         

       방전방전 파스텔…….

         

       악마가 한숨을 쉬며 등을 두들겨 줬다.

         

       『그러게 적당히 먹었어야지. 통돼지구이를 어떻게 혼자서 다 먹나.』

       “으으, 다 먹을 수 있었는데……. 제 위장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배탈이 나는 게 아니라 전부 소화시켰어요.”

         

       아니 이럴 수가?

         

       파스텔은 항행 일정 때문이 아니라 과식으로 지친 거였다!

         

       방전방전 파스텔이 아니라 방정맞은 파스텔이었던 거임!

         

       허억, 놀라운 사실!

         

       파스텔은 난간에 늘어진 채 혼자 놀랐다.

         

       분홍 눈동자가 반짝반짝.

         

       그리고 다시 축 늘어졌다.

         

       너무 먹었어…….

         

       헤헤.

         

       악마가 등을 토닥여 줬다.

         

       『생각을 돌리면 그나마 괜찮아질 거다. 저길 봐라. 대수림이 보이는군.』

         

       손가락이 저 너머를 가리켰다.

         

       지상으로 긴 성벽이 이어졌다. 성벽 밖으로 끝없이 넓은 숲이 드러났다.

         

       숲은 거대하고 울창했다. 성벽 높이를 가뿐히 넘는 나무가 평범하다는 듯이 생태계를 채웠다.

         

       『개척불능지역, 대수림이다. 모든 국가를 정복한 제국에게 남은 최전선 중 하나지.』

       “우와아!”

         

       파스텔은 눈을 빛냈다.

         

       “망원경 주세요! 망원경! 망원경!”

         

       악마를 거칠게 흔들자 망원경이 손에 들어왔다. 대수림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봤다.

         

       “우와아! 완전 빽빽한 숲이에요! 나무도 튼튼해 보이고 수풀도 울창해요! 저러면 개척은 불가능하죠!”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듯.

         

       『그것도 있지만 다른 요인이 더 커. 흠, 저길 봐라.』

         

       손가락을 따라 망원경을 돌렸다.

         

       숲에서 웬 붉은 멧돼지가 튀어나왔다.

         

       꿀꿀.

         

       『불멧돼지다.』

       “우와, 이름 귀여워.”

         

       통바비큐랑 친구 할 거 같아.

         

       『적멧돼지라 불러도 된다.』

         

       급격히 안 귀여운.

         

       “불멧돼지라 부를래요.”

         

       파스텔은 꿀꿀이 친구를 살펴봤다.

         

       불멧돼지는 숲을 나와 기웃거리더니 성벽을 향해 달려왔다.

         

       성벽의 병사들이 분주해졌다. 대포가 겨눠지고 불을 뿜었다. 포탄이 날아가 멧돼지를 맞췄다. 마법진이 발동하자 폭발이 일었다.

         

       “꿀꿀이 친구우!”

         

       통바비큐가 돼버렸어어!

         

       파스텔 뱃속의 통돼지구이랑 친구 사이야아!

         

       으아아.

         

       불길이 가셨다. 머리에 피를 흘릴 뿐 나름 괜찮은 멧돼지가 드러났다. 멧돼지가 괴성을 지르더니 그대로 성벽으로 달려왔다.

         

       엣.

         

       집채만 한 멧돼지가 성벽에 부딪혔다. 굉음이 울렸다. 소음이 하늘의 비공정까지 언뜻 닿았다.

         

       으아아?

         

       혹시 너 하수도에 살던 백사와 친구니……?

         

       대포가 연달아 불을 뿜었다. 폭발이 멧돼지를 감싸며 대기를 흔들었다.

         

       비공정이 계속 항행한 덕에 그 이후 장면은 볼 수 없었다.

         

       『캐머롯은 대대로 남부 변경을 지켜온 가문이다. 상당한 병력을 상시 운용하고 군사 경험도 탁월하지. 변경 특성상 중앙정계엔 크게 관심이 없지만 황권 다툼이 있을 때마다 예의주시 되는 곳이다.』

         

       그런 곳의 농장을 빼앗고 사과 냠냠을 선언한 우리 가문은 뭐 하는 악당?

         

       파스텔은 손을 떨었다.

         

       “저, 저 남부 사령관의 사과 농장을 도굴하러 가는 건가요?!”

         

       그것도 대대로 내려온 사과 농장을 냠냠 했다가 이제야 돌려준 원한을 산 채로?

         

       『맞다.』

         

       전혀 부정하지 않는!

         

       으아아.

         

       비공정이 정박장에 당도했다. 정박장은 병사들이 통제하는 상태였다. 귀한 손님이라도 온다는 분위기다.

         

       파스텔은 비틀비틀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의전을 수행했다.

         

       마법사 로브를 걸친 귀족 여성이 다가왔다. 뒤로는 가신들이 뒤따랐다.

         

       캐머롯 백작이 미소 지었다.

         

       “오는 길은 편안하셨소, 후작?”

         

       완전 여유로운 목소리.

         

       파스텔은 늑대 앞의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펴, 편안했어요오.”

         

       도굴꾼 지망생은 정처 없이 시선을 피했다.

         

       백작의 등 뒤에 반쯤 숨듯이 서 있는 멜리사가 보였다. 멜리사는 경계하던 평소와 다르게 우물쭈물해하는 기색이었다.

         

       멜리사 구해줘어.

         

       우리 사이좋았잖아.

         

       그동안의 추억을 봐서 너희 어머니께 좋은 말 해줘어.

         

         

         

       #

         

         

         

       사과 농장은 무질서했다. 수확량도 상품성도 신경 쓰지 않고 이리저리 자라난 사과나무들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질서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곳은 사과나무로 뒤덮인 숲속 같았다. 대수림에 맞서는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혹은 어울리는 자연의 향취였다.

         

       자연 속엔 덩그러니 나무 테이블이 존재했다. 손님을 맞이한 테이블엔 각종 사과 요리가 펼쳐졌다.

         

       파스텔은 볼이 발그레해졌다. 사과파이를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한 파이가 씹혔다. 고소한 버터향이 터졌다. 달콤하고 상큼한 사과가 느끼함을 감싸듯 다가왔다.

         

       허억.

         

       파스텔은 경악했다.

         

       농장 소유주를 바꾸고 싶은 맛……!

         

       사악한 크래프트의 행태가 언뜻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겨우 농장 하나에 아직도 원한을 가질 리 있겠소.”

         

       백작이 온화하게 웃었다.

         

       “당시 이 농장의 소유권이 넘어간 건 우리가 황권 다툼에 끼어드는 걸 두고 보지 못한 황제 폐하께서 크래프트를 움직여 경고한 것인데.”

       “그랬군요!”

         

       파스텔은 사과잼을 볼에 묻힌 채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쩐지 처음 본 순간 백작께서 신수가 훤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마음이 넓으신 분인 줄 바로 알았습니다!”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예오예.

         

       백작이 더 온화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과 와인을 들이켰다. 다 마신 유리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파스텔은 순간 움찔했다.

         

       잉.

         

       뭔가 어른의 미소 같은? 아직 애니까 지금은 봐준다는 생각이 느껴지는 듯한.

         

       헤헤, 착각이겠지~.

         

       이런 착한 분을 의심하면 못 써~.

         

       백작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멜리사를 바라봤다. 멜리사는 아까부터 계속 우물쭈물거렸다.

         

       백작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파스텔을 돌아봤다.

         

       “제 딸아이와 친분을 쌓고자 오셨다 하셨지요?”

       “그럼요! 제가 일방적으로 매달리긴 하지만 우리 절친이에요!”

         

       부모 앞에서 친구 선언.

         

       부모가 인정한 친구.

         

       오예.

         

       “방학에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건 당연한 일정이니까요!”

         

       도굴꾼 지망생은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사과 농장을 수상쩍게 훑어보다가 흠칫했다.

         

       허억.

         

       순간 본능이 나온……!

         

       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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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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