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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

     

    “후방에서 적 기동대가 기습한다! 진형을 유지하라!”

     

    월광궁 단장의 지휘 아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황제의 조카인 친왕군의 기사단을 돌파한 후 다음 고지대 점령을 노린다.

     

    경기장 전역을 정찰할 수 있기에 좋은 포인트다.

     

    “저 북부의 기사, 아주 터프하군.”

    “아까부터 단신으로 부대의 진격로를 선행해 내고 있구먼. 확실히 개인전에서 우승할 실력이야.”

    “고트베르크 후작가 출신이라더군. 치유사만 육성하는 줄 알았더니 인재가 많은 곳이었어.”

     

    황제가 타냐를 지켜보며 형제인 친왕들과 감상을 나누었다.

     

    “후작가에 충성심이 높은 듯한데, 저런 기사를 품을 정도면 고트베르크의 영식도 상당한 청년이군.”

    “3황녀의 주치의라 하였던가?”

    “기사단 전원에게 축복을 걸어줄 정도면 실력은 확실하겠어.”

     

    흙먼지가 이는 후끈한 전투가 이어진다.

     

    “내 기사단이!!”

     

    토진궁 기사단은 진작 라우가의 부대와 공멸했다.

     

    게오르크는 별 활약도 못하고 탈락한 모의전 결과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기세 좋게 진격하던 월광궁 기사단이었지만 전투 후반부에 들어서자 한계가 찾아왔다.

     

    마지막 삼파전에서 적 두 부대가 먼저 싸움 붙도록 유도한 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최후의 기사단이 기세가 상당했다.

     

    ‘1황녀, 헤이케의 기사단이야.’

     

    헤이케는 관람석에는 없었는데, 그녀가 경기장에서 말을 타고 직접 부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게오르크만큼이나 차기 황제직 승계에 진심인, 야욕 많은 여걸이었다.

     

    “승리가 코앞이다! 진격하라!”

     

    아셀라를 닮았으면서도 튼실하고 건장한 몸으로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전장을 누비는 모습은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우리 측의 1중대는 황실 기사단이긴 해도 일반병이다. 헤이케의 정예 기사를 막아내기엔 실력이 부족했다.

     

    월광궁 기사들은 크게 밀릴 정도까진 아니지만 숫자가 부족했다.

     

    마침내 타냐를 포함한 스무 명의 월광궁 기사들은 헤이케의 정예 기사들에게 포위당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북부의 신임 기사여.”

     

    헤이케가 검 끝을 타냐를 향하며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확성 마법이 중계하니 경기장의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었다.

     

    “전황을 보면 그대도 알겠지. 승부는 났다.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가겠는가?”

     

    항복 종용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아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적 파벌의 최고 기사에게 충의를 저버리라 권하다니, 헤이케 누님도 잔인해.”

     

    게오르크가 아셀라를 조롱할 심산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뜻이야 나도 정확히 이해했다.

     

    아무리 축제의 모의전이고, 주군의 형제라지만 사실상 황실 내에서는 적대 파벌이다.

     

    먼저 항복을 권유함으로써, 물러선다는 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마치 배신자의 비겁한 행동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헤이케, 승계를 노리는 여자답게 정치적인 술수가 능했다.

     

    이제 월광궁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싸우는 선택지밖에 안 남았지만, 그랬다간 확실히 꼴사납게 얻어터진다.

     

    아셀라는 그만큼 황제의 신임을 놓친다.

     

    헤이케는 말 한 마디로 효율 좋은 덫을 깔았다.

     

    “…쯧.”

     

    아셀라가 혀를 찼다.

     

    나는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녀님, 조금 기다려 보시죠.”

     

    “왜.”

     

    “과도한 스트레스는 소화 기능을 억제하고 수면장애를 유발합니다.”

     

    “…후우, 한 방 먹었어. 헤이케의 기사단이 강하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명분을 세우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에게 이럴 때의 대처법도 전달해 놓았습니다.”

     

    아셀라가 다시 경기장을 바라본다.

     

    타냐는 검을 내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헤이케와 눈을 마주쳤다.

     

    “항복을 선택했는가.”

     

    “우리 월광궁 기사단이 이 자리에서 승부를 그만두는 이유는.”

     

    타냐가 팔의 장갑을 벗어 관중을 둘러본다.

     

    전투를 거치며 새겨진 크고 작은 잔상처가 눈에 띈다.

     

    “이 이상 충성하는 주군께 불경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오.”

     

    타냐가 품에서 빨간 약을 꺼내 상처에 바른다.

     

    은은한 빛과 함께 치료 효과가 발생했다.

     

    “흐음, 저것은?”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가 흥미를 보이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타냐가 말을 계속했다.

     

    “이것은 연금술로 제작된, 상처를 낫게 하는 약재요. 나의 주군인 라스 고트베르크 선생님께서 제작해 주셨소.”

     

    그녀의 선언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연금술이라니?”

    “아티팩트가 아니란 말인가?”

    “치유술이 아닌 방법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고트베르크 주치의 말인가!”

     

    빨간 약을 소중히 품에 넣은 후, 타냐는 깨끗해진 팔을 관객에게 들어 보였다.

     

    “선생님은 황녀님 뿐만 아니라 월광궁 기사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늘 사력을 다해주시고 계시오. 이 이상 전투를 이어간다면.”

     

    타냐가 헤이케를 노려본다.

     

    “황녀님, 저의 주군인 고트베르크 선생님의 손과 시간을 뺏는 일이 됩니다. 이는 아셀라 황녀님의 건강 역시 해치는 일로 직결되므로 불경입니다.”

     

    음, 말 잘 하네.

    나름 우리 후작가에서 짬이 많이 찼다.

     

    “그런 경위로, 아셀라 황녀님께 충의를 지키기 위해, 저희 기사단은 이 자리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모의전을 종료하겠습니다.”

     

    타냐가 말을 마치자 박수가 쏟아진다.

    아름다운 패배자에게 관중이 보내는 격려의 갈채였다.

     

    “단체 모의전의 우승자가 정해졌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콜로세움을 메우고, 기사들이 유유히 경기장에서 퇴장한다.

     

    헤이케는 매서운 눈으로 타냐의 뒤통수를 노려보더니 우리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셀라와 섞인 피는 반뿐이지만, 역시 황가의 미소는 어딘가 섬뜩하다.

     

    “공자, 네가 타냐에게 시켰어?”

     

    콜로세움이 시끄러워진 와중에 아셀라가 내게 질문했다.

     

    “예. 헤이케 황녀님이 직접 출전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일도 있을까 싶어 빨간 약을 준비해줬습니다.”

     

    “흐응.”

     

    “마음에 안 드셨는지요. 좀 더 철저히 준비시킬 걸 그랬을까요?”

     

    “…아냐. 나중에 얘기해.”

     

    아셀라는 내게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휙 돌렸다.

     

     

     

    ***

     

     

     

    쉬는 시간 후에는 마법 경연이 이어진다.

     

    1일 차에 빽빽하게도 비무대회의 진미를 모두 모아놨다.

     

    황제의 건강을 고려해 편성한 스케줄이라고 한다. 2일 차에는 황궁 악단과 주방이 장기를 펼치는 그야말로 놀자판이다.

     

    그리고 3일째 오전에 귀환하는 스케줄로, 내내 아셀라를 체크해야 하니 내 집중력이 버틸지 모르겠다.

     

    “밖에서 2황자 파벌의 마법사가 경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반응이 좋네요.”

     

    내가 대기실 창문 커튼 사이를 내다보며 경기장의 모습을 중계했다.

     

    “원래는 소속된 궁중 마법사도 없었으면서, 기어이 어마마마가 제자들을 제공해줬나 보네.”

     

    아셀라가 퉁명스럽게 일갈했다.

    시녀들이 갈아입은 그녀의 옷차림을 정리해주며 화장을 고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경연 출전을 위해 마법사 복장으로 환복하던 중이었다.

     

    손에 가볍게 든 마법사 스태프는 머리의 장식이 화려해서, 그녀의 몸에 비하면 조금 무거워 보였다.

     

    그녀가 높게 틀어올려 묶은 머리를 살랑대며 물었다.

     

    “어울리니?”

     

    “어느 위대한 대마법사보다도 기품이 넘치고 계십니다.”

     

    “능글거리는 혓바닥은 타고났구나.”

     

    아셀라는 독설을 내뱉었지만 내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 듯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아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내 차례였다.

     

    펌프에 공기를 넣어 아셀라의 혈압을 측정한다.

    …최고 105, 최저 50. 평소처럼 약간 저혈압이지만 문제없다.

     

    제작한 체온계로 체크, 35.8도.

     

    수첩에 숫자를 적어나간다.

     

    “뭘 그렇게 많이 적어?”

     

    “다 황녀님을 위해 필요한 숫자입니다.”

     

    “공자는 항상 그 수첩을 가지고 다니지.”

     

    “예. 어이쿠, 황녀님의 정보를 포함한 일급 기밀이 적혀 있습니다. 노출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아셀라가 내 수첩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약제의 재료와 제조법은 모두 이 수첩에 적어서 다니고 있다.

    나중에 책을 만들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잘 보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심박을 재겠습니다.”

     

    아셀라의 손목을 잡으려 하니 그녀가 슬쩍 팔을 뺐다.

     

    “그거, 항상 해야 해?”

     

    “네. 마력계 검사 과정이에요.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황녀님의 마력회로가 정상인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전에 직접 확인했어. 내 마나는 네카어 강물처럼 순환하는 상태야.”

     

    “지금은 열 시간 정도 지났고요.”

     

    “…정말이지.”

     

    아셀라가 못마땅해하며 내게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목은 가늘어서 내 엄지와 중지로 감싸고도 손가락 한 마디가 남는다.

     

    혈압과 심박수는 기본적으로 상관이 없기에 따로 체크해야 한다. 평균치에서 벗어나면 이상이 있다는 증거다.

     

    물론 청진기를 만들어 쓰면 더 편하겠지만 심장에서 영혼이 빨려 나가게 생겼다느니 난리를 칠 것 같아 이렇게 하고 있다.

     

    ―두근, 두근.

     

    동맥을 통해 심박을 수작업으로 체크한다.

     

    “평소와 같군요. 검사할 때마다 나오는데 황녀님은 혈압이 낮은데 비해 심장이 빠르게 뛰시는 편입니다. 체질일 수도 있지만 조금 걱정은 되는군요.”

     

    “시끄러워.”

     

    “주치의의 의학적 조언은 지나치지 말아주세요. 담당 환자가 자각하고 있어야 저도 치료를… 아야.”

     

    아셀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는 내 팔등을 찰싹 때렸다.

     

    분명 얜 어릴 때부터 병원 가기 싫다고 떼쓸 타입이었을 거다.

     

    똑똑하고 영악하니 돈가스 사준다고 거짓말해도 안 속았겠지.

     

    역으로 나를 기름통에 빠트려 돈가스로 만들어 버렸을 거다.

     

    “분당 호흡수도 체크하면 좋겠는데요.”

     

    “호흡이라니?”

     

    “이렇게.”

     

    나는 검지와 중지를 가로로 해 아셀라의 코 근처로 가져갔다.

     

    아셀라는 상체는 그대로 둔 채 얼굴만 뒤로 빼다가 등껍질 속에 숨는 자라처럼 턱을 딱 붙여버렸다.

     

    “평소처럼 숨 쉬세요. 호흡수도 건강의 중요한 척도니까… 황녀님, 숨을 참으시면 검사가 안 됩니다.”

     

    “너!”

     

    아셀라가 내 손등을 짝 때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팡이를 들고 황금빛 동공을 분노로 물들인다.

     

    음, 어느 때보다도 강해 보인다.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2황자파의 마법 경연이 끝난 모양이다.

     

    다음이 아셀라의 차례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나에 대한 적개심을 내리고 지팡이를 정돈했다.

     

    “다녀오세요.”

     

    아셀라는 내 배웅에 대답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대기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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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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