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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1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루시가 친구들을 데리고 훈련을 하기 시작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베네딕은 그를 슬픔을 떨치기 위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너무도 힘들어서 무슨 생각을 하기만 해도 슬픔이 그를 잠식할 때에는 아예 머리에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 게 최선이니까.

   

   과거 비슷한 일을 해 본 적 있던 베네딕은 루시의 심정을 이해했고 그녀가 슬픔을 달랠 수 있을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자신이 얼굴을 들이 밀어봐야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냥 아가씨를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대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 답답한 모습을 하루 종일 지켜보던 집사장은 결국 베네딕에게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루시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낸 후로 조금씩 나아지던 인간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 너무도 한심했던 것이다.

   

   “…집사장. 명백한 진실로 때리면 마음이 아프다네.”

   “그럼 간언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시면 될 일 아닙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는가.”

   

   베네딕도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다. 다만 루시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묘실 안에서 홀로 오열하다 쓰러진 루시의 모습이 떠올라서 발이 움직이지 않을 뿐.

   

   “그 광경을 떠올리면 우리 착한 딸아이가 못난 아비를 걱정하여 억지로 용서를 해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거든.”

   

   또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는 베네딕의 모습에 집사장의 시선이 짜게 식었다.

   

   한 때 대륙 전체에 두려움을 선사했던 남자가 자기 손보다 작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광경은 너무도 한심했으니까.

   

   “가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지금의 아가씨는 거짓으로 타인을 위로하는 사람입니까?”

   “그건.”

   “이 이야길 아가씨께서 들으면 참으로 좋아하시겠군요.”

   

   이제는 아예 빈정거림까지 묻어나는 어투였지만 베네딕은 집사장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추했기에. 못난 아비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딸아이보다 못한 자신이 역겨웠기에.

   

   그는 눈물이 묻어난 손수건을 꾸욱 거머쥐었다.

   

   “어찌하면 좋겠나.”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

   “저는 가주님께서 이 이상 책상 머리위로 도주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제 믿음에 보답해 주십시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말과 함께 집사장이 떠나간 후 베네딕은 멍하니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얼 어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딸아이를 대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안단 말이다. 허나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똑똑. 베네딕이 한숨을 내쉬던 그 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네딕은 그것만으로 문 바깥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여기까지 올 때 들렸던 자그마한 발소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새나오는 콧노래가.

   

   조막만한 손이 문을 두드릴 때 나는 통통하는 소리가.

   

   이 너머에 누가 있는지를 알려주었으니까.

   

   “들어오렴. 루시.”

   “…어떻게 안 건가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우리 딸이 오는 걸 모를 리 있나.”

   “우아. 변태 같아서 좀 많이 징그럽네요. 역겨워서 도망치고 싶어졌어요.”

   “…어. 어어어.”

   

   루시의 혐오 어린 시선을 받은 베네딕은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였다. 딸의 말을 듣고 보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베네딕의 침묵이 길어짐에 따라 루시가 시선을 험악하게 물들이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루시!”

   

   그를 본 베네딕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루시를 말렸다.

   

   “뭐가 아닌데요?”

   “그게! 아무튼 내게 나쁜 의도는 없다! 진심이다!”

   “변태 파파의 징그러운 눈을 봤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내 눈이 그렇게나 징그러웠나?! 충격을 받은 베네딕이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은 순간 그의 거구를 견디지 못한 의자가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나버렸다.

   

   베네딕은 그 와중에도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중심을 바로 잡았지만 그 아래에 존재하는 의자의 잔해를 어찌할 순 없었다.

   

   “푸흫. 푸흐흐흫. 푸하하하핳!”

   

   멍하니 부서진 의자를 바라보던 그는 루시의 웃음소리를 듣고 고갤 돌렸다.

   

   그 곳에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붙잡은 채 폭소를 터트리는 루시가 있었다.

   

   아내가 떠나가기 전에도 쉬이 볼 수 없었던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그는 한참이 지나 진정한 루시가 고갤 드는 걸 보고 다급히 표정을 다잡았다.

   

   “하아. 정말. 파파는 너무 허접허접이라 놀리기도 힘드네요. 언제쯤이면 덜 한심해지실 건가요?”

   “화…난 게 아니었느냐?”

   “제가 그렇게 성격 나쁜 사람처럼 보여요? 바보 파파에게 전 그런 사람이었던 건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푸흐흫. 농담에 너무 과민반응 하시네요. 바~보. 바보바보.”

   

   그제서야 루시에게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은 베네딕이 어깨에 힘을 뺀 체 축 늘어졌다.

   

   “ 루시. 그래서 왜 이 바보 파파를 찾아온 거니?”

   “항상 하던 대련을 해야죠.”

   “대련…말이냐?”

   “네. 왜요? 설마 이제 슬슬 발릴 것 같아서 무서우신 건가요? 쫄아버리신 건가요?”

   

   빈정거리는 루시의 어투에 실없는 웃음을 지은 베네딕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대충 한 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루시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뭘 하시는 건가요? 쓸데 없이 자상한 손길이 기분 나빠서 토할 것 같은데요.”

   “대견해서 말이다.”

   “무슨.”

   “이 아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인 우리 딸이 너무도 대견해서 절로 손이 움직여버렸어.”

   

   베네딕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그리 말을 하고는 루시의 몸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정말 자신 있느냐? 이 파파는 상대가 누구라도 결코 봐주지 않아.”

   “그런 말해도 괜찮은 건가요. 파파? 그래버리면 나중에 할 핑계가 사라질 텐데요?”

   “하하.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 파파가 허접이라는 걸 인정해야겠지. 허나 괜찮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

   

   새해가 시작되고서 며칠이 지났을 무렵 교황의 호의에 따라 휴가를 얻게 된 페이비는 요한과 함께 알른 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바란다면 교회의 순간이동진이나 공간계열 마법사를 통해 바로 영지에 도착할 수 있을 페이비이지만 그녀는 굳이 마차 여행을 택했다.

   

   굳이 고생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교회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단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마차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 곳에서 곤란해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대륙에 실력 있는 의사나 성직자의 수는 많지 않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칠 지어니 페이비는 돌아가는 와중에 이들을 돕기 위해 마차행을 택한 것이다.

   

   어제 들렸던 마을의 아이가 건네준 꽃반지를 살피던 그녀는 ‘예쁜 언니! 고마워요!’라며 밝게 웃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영애를 빨리 만나고 싶단 마음을 참고 평소처럼 움직인 게 정답이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의 웃음은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알른 영지에 도착을 하겠군요.”

   

   페이비는 요한의 말을 듣고서 마차 창 바깥을 살폈다. 저 멀리에 말끔하게 지어진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알른 변경백령. 왕국 변경의 수호자이자 수많은 나라들이 감히 왕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력이 되는 곳.

   

   그리고 지금 페이비에게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자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인 루시 알른이 머무르는 땅.

   

   “오랜만에 친우분들을 만나는 게 기대되십니까?”

   “물론이에요. 요한주교님. 친구들과 만나서 함께할 생각만 하더라도 너무 행복한 걸요.”

   

   그 곳에 있는 사람은 루시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인 조이 파트란.

   

   똑똑하고 예의바른 듯 하지만 은근 자주 놀림당하는 아서 솔라딘.

   

   제멋대로이지만 그만큼 솔직한 프레이 켄트.

   

   항시 긴장한 채 시간을 보내야했던 성지에서 벗어나 편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셈인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아. 요한 주교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시죠.”

   “주교님께서는 알른 영지에 오래 머무르셨잖아요? 그럼 알른 기사단의 훈련을 본 적도 있으신가요?”

   “예. 있습니다. 깐깐하단 이야기를 듣는 저조차도 감히 교회의 성기사들에게 강요하지 못할 고행을 거듭하는 이들의 모습이라면 지겹도록 보았죠.”

   

   요한은 처음 알른 영지에 부임했던 해를 떠올렸다.

   

   그 때 알른 기사단의 훈련을 보았던 나는 처음 부임한 나를 압박하기 위해 기사들에게 고행을 강요한다고 생각했었다.

   

   헌데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훈련은 알른의 기사들에게 있어 일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 때의 경악을 떠올린 요한은 피식 웃으며 페이비에게 되물음을 건넸다.

   

   “헌데 그것은 왜 갑자기 물으십니까?”

   “친구들이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거든요.”

   “…예?”

   “저도 알른 가문에 도착하면 함께 하게 되지 않을까요?”

   

   요한은 순간 페이비를 말려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는 이 분이 성녀라는 직함에 충분히 어울리는 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다.

   

   성녀님께서는 훗날의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야.

   

   헌데 그런 분께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을 가만 바라볼 순 없잖은가.

   

   요한의 당혹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던 것일까. 페이비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걱정마세요. 요한 주교. 영애님께서 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허나.”

   “그리고 말이죠. 그 정도 고난은 가뿐히 넘겨야 성녀라 불릴 수 있지 않겠어요?”

   

   페이비의 의지를 이해한 요한은 그 이상 만류하는 대신 여느 때처럼 신성마법에 대한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또 다시 하루가 지나 알른 영지에 도착한 페이비는 교회에 인사를 한 후 요한과 함께 알른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요한 주교께서 이리 걱정하시는 걸 보면 알른 기사단의 훈련은 무척이나 힘들테죠.

   

   그렇지만 걱정은 되지 않아요. 그 힘듬이 저의 성장으로 이어질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는 빨리 영애님을 만나고 싶네요. 표정이 풍부해진 영애님이라니. 너무도 고귀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요한 주교님. 그리고. 성녀님…이십니까?”

   “네. 경비병님. 주신 교회의 성녀 페이비라고 합니다. 알른 영애님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습니다.”

   

   저택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페이비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그들의 당황은 길지 않았다.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그들은 요한과 페이비를 기사단의 훈련장 쪽으로 안내했다.

   

   “하하하! 다들 훨씬 더 좋아지셨군요!”

   

   그 곳에서 페이비가 보게 된 것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페이비의 친구들과 그 가운데에서 상처 하나 없이 웃고 있는 베네딕의 모습이었다.

   

   어라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이. 이것도 훈련의 일종인 건가요? 그렇다기엔 다들 상태가 너무 심각해 보이는데?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눈을 끔뻑이던 페이비는 자신의 손목을 잡는 보드랍고 따스한 손의 감촉에 놀라 고갤 돌렸다.

   

   “너무 느려 터졌잖아. 게으름뱅이 허접 성녀.”

   “여. 영애님.”

   “이리로 와. 쓸데없이 지방만 많은 허접한 둔탱이 성녀라도 신성은 봐줄만 하니까. 도움정도는 되겠지.”

   “…네? 네?! 잠. 영애님. 사정 설명 정도는. 영애님?! 제 말 안 들리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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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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