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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2

       “내 부인합시다, 누이.”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나 힘없는 목소리로 내뱉은 담백한 고백.

         

       그 속에 짙게 배어 있는 단 하나의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그것은 갈 곳 없는 여인을 향한 동정심이나, 지금까지 제 곁을 지켜준 이에 대한 동경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망측하구나.’

         

       입에 담기에, 아니, 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망측한 감정.

         

       애정(愛情).

         

       세상만사 수많은 감정 중 이것만은 절대로 인연이 닿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 뒤늦게 찾아와 그녀를 번뇌의 늪에 빠트렸다.

         

       ‘알 수 없는 녀석.’

         

       눈앞의 사내는 참으로 기묘한 사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속내가 불분명한 이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행동에 담긴 저의나, 속에 담고 있는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어떤 사람이다, 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없으니까.

         

       ‘이를 어찌한다….’

         

       그의 고백에 어찌 대답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심정이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기에 자조했다.

         

       ‘원래 같았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하거늘.’

         

       어째서인지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제게 꾸준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내심 기쁘기까지 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기꺼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선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으니.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알고 저러는지.’

         

       이백 년 가까이 잠든 시간은 제외하고서도 그녀의 나이는 적지 않다.

         

       물론 현경의 경지에 올라 젊어진 것은 물론이고, 노화까지 느려져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를 차치하고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 곤란한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제 과거.

         

       “본녀의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느냐.”

         

       백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녀석.”

         

       고리타분한 옛이야기 좀 하겠다는데, 왜 저리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지.

         

       그의 기꺼운 반응에 마음의 부담을 덜어낸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본녀는 무림세가의 장녀로 태어났느니라.”

         

       권세 있는 무림세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어머니, 아버지, 둘째, 셋째, 막내로 이루어진 제 가족은 물론이요, 가문의 식솔들과 친하게 지내는 인근 주민들까지.

         

       더없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오며, 그녀는 결심했다.

         

       “본녀의 가문이 지금까지 그러했듯, 모든 것들을 지키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었지.”

         

       그러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육신을 단련하고, 오전에는 동생들과 글을 익혔다.

         

       그리고 또 밤에는 홀로 무공 초식을 수련하며 보내는 충실한 나날.

         

       그러던 도중 일이 벌어졌다.

         

       혈교가 준동하여 중원을 노리고 들어온 것.

         

       그때를 떠올리는 그녀의 평가는 짤막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느니라.”

         

       피를 탐하는 악귀 같은 것들과 맞서는 나날들.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연합을 좀먹는 이들이 판치고, 변절자와 첩자라는 죄명으로 참수되는 이들이 매일 같이 수십, 수백 명은 되었던 그때.

         

       “…본녀의 가문도 그때 멸문했지.”

         

       그녀의 가문에 혈교도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실로 악귀와도 같았다.

         

       애나, 어른이나 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가리지 않고 갈가리 찢어발기고 들어와 가문의 식솔들은 물론이요,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섰던 부모님과 동생들도 모두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본녀도 그때 죽고자 했다.”

         

       무위가 뛰어나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게 죄였던가.

         

       일찍이 죽지 못한 죄로 그녀는 가족과 가족처럼 친했던 이들의 죽음을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다.

         

       제 전부나 다름없는 이들을 잃어버린 상황.

         

       그녀 또한 죽기 위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상대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를 새겼으나.

         

       “한데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더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죽음에 거의 다다랐으나, 죽지는 못했다.

         

       가문에 은혜를 입은 채 살아가던 이들이 목숨을 내던졌다.

         

       그렇게 쌓인 시체 더미에 그녀는 숨겨졌다.

         

       단칼에 심장을 꿰뚫린 그들이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며 말하길.

         

       “살아남으라 하였다. 그리고…, 혈채를 받아내라는 말도 하였지.”

         

       당시에는 죽어가면서도 염원하는 복수의 의지를 제게 맡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바란 것은 복수 따위가 아닌 듯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살아갈 목적을 안겨주고 싶었던 거네요.”

       “그렇지.”

         

       그들이 바란 것은 복수 따위가 아닌, 그녀가 사는 것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이가 섣불리 따라오지 못하게끔 복수라는, 그럴싸한 삶의 목표까지 쥐여가며 바란 것은 생(生) 자체였으나.

         

       “당시의 본녀는 그리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복수라는 단어에 인생 전부를 바치고, 불태운 그녀는 제 가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속에 숨어 눈을 뜬 순간부터 기절할 때까지 무공 수련에 몰두했다.

         

       그렇게 복수귀가 된 여인은 혼란스러운 중원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닥치는 대로 혈교도 놈들을 죽여 없앴다. 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수법을 동원하여 놈들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찢어발겼다.”

         

       혈교도들의 저승사자.

         

       그리 불리기까지 하게 된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제 가문을 멸문시킨 이들을 찾아 그들의 목을 베어 가족들의 묘지에 바치는 것.

         

       그들을 찾기 위한 일념으로 중원 전역을 유람하던 어느 날.

         

       그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본녀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은 혈교주가 그러더구나.”

       “…뭐라고요?”

       “본녀의 가문을 습격한 것은 혈교가 아니라고 말이다.”

       “…….”

         

       점점 휘둥그레지는 백우진의 두 눈.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설마…?”

       “…그래. 본녀의 원수는 혈교가 아니라, 정사 연합이었다.”

         

       그녀의 가문을 습격하여 멸문시킨 것은 혈교도들이 아니라, 혈교도를 가장한 정사 연합의 일원들이었다.

         

       “정확히는 본녀의 가문을 시샘한 인근 정파와 사파 무리의 작당 모의였던 게야.”

         

       말했듯, 당시는 혼돈의 시대였다.

         

       정파 무림에서 명망 높은 이조차 하루아침 사이에 변절자 또는 첩자로 내몰려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던 그런 때.

         

       “그리하여 본녀는 칼날을 돌렸느니라.”

         

       모든 사실을 깨달았을 땐 혈교와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제 가문을 멸문시킨 원흉들과 그들의 뒤를 봐준 이들은 하나 같이 정사 연합의 영웅으로 취급받으며 한껏 명성을 드높인 상태.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죽였다.

         

       가차 없이, 아주 잔인하게.

         

       그것이 혈수마녀라는 악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 이야기의 끝이었다.

         

       이후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

         

       천라지망에 갇혀 다친 몸으로 간신히 빠져나왔고, 길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으로 평가받는 백유성의 손에 이끌려 이백 년의 기나긴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

         

       “어떠냐.”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을 마친 그녀가 백우진을 향해 물었다.

         

       “이래도 본녀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든 잊고 싶은 기나긴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밝힌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제 입이 어떻게 고장이 나버렸는진 몰라도, 거절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백우진 본인이 직접 단념하기를 바라며.

         

       복수라는 이유가 있든, 없든.

         

       그녀가 많은 이들의 피를 몸에 끼얹은 살인마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그런 꺼림칙한 여인을 어떤 사내인들 곁에 두고 싶겠냐마는.

         

       “…그게 제가 누이를 싫어할 이유가 되나요?”

         

       백우진이라는 인간이 평범한 사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 순수한 되물음에 말문이 막혀버린 혈수마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음에 물음을 더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본녀는 지금까지 수백 명이 넘는 이들을 죽였단 말이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니! 본녀가 꺼림칙하지도 않단 말이냐, 네놈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백우진.

         

       “저는 누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

         

       백우진은 그녀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인간과 비슷하여 아인종이라 불리는 이들까지 더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터.

         

       그들의 죽음이 백우진에게 어떤 의미를 갖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왜냐?

         

       백우진은 결단코 의미 없는 살생은 한 적이 없기에.

         

       그는 답답하다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죽여야 할 놈을 마땅히 죽인 일이 뭐가 그렇게 꺼림칙한데요, 대체.”

         

       오히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 아니냐며 조금의 망설임 없는 답에 혈수마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 깊이를 실감했다.

         

       “너….”

         

       저 사내는 어느 한 군데가, 아니, 어쩌면 멀쩡한 데가 하나 없을 만큼.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게냐…?”

         

       고장 나버린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별다른 말없이 하루 더 휴재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주말에 큰이모님 환갑 잔치 때문에 동해에 다녀왔는데, 일요일 낮에 오자마자 글 좀 쓰려고 밍기적대다가 그대로 뻗어버렸습니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기침도 달고 살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탓인지 정말 죽은 듯이 자버렸네요…

    부족한 부분은 조만간 벌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매번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셔요. (_ _)

    P.s 후원 감사의 말씀

    쿨라다이아몬드 님!

    후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다음화 보기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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