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기사와 암살자 ( 3 )
행동 방침이 정해졌으니 이후 이스칼의 움직임은 빨랐다.
우선 오랜만에 만신전으로 향했다.
만신전에 들어서니 마주치는 이마다 이스칼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며 으레 건네는 공통적인 말이 있었으니.
“어우. 이스칼 사도님. 인상이 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허허허. 이스칼 사도님. 그간 풍채가 아주 좋아지셨군요?”
살이 좀 쪘다ㅡ 라는 내용을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한 것이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이스칼이 아니었다.
사도 이스칼이 누구인가.
연애 눈치는 젬병이고 변방의 귀족 서자 출신이었지만 나름대로 눈치 하나는 있는 편이라 자부했다.
“음! 내가 그사이에 덩치가 좀 커지기는 했지. 후후. 이게 전부 사내의 웅장한 기상 아니겠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스칼의 눈치는 여전히 파멸적이었다.
하여 이스칼의 걸음은 거침없이 나아가 암살단의 정보를 취급하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어… 그러니까 암살단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을 골라달라고요?”
“그렇지. 이왕이면 확률이 높은데 가까운 곳부터 좀 추려 줬으면 좋겠네.”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지요?”
“내가 개인적으로 암살단이라는 이들에게 흥미가 생겨서 말이지. 개인적으로 좀 조사를 해보려고 하는 중이네. 겸사겸사 내가 좀 오래 쉬기도 했으니, 이걸로 슬슬 복귀도 준비하고.”
“아 그렇군요.”
만신전의 정보 담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칼이 두 아내의 육아를 돕기 위해 오래도록 휴식기를 가진 것은 제법 유명했다.
아내를 끔찍이도 아끼는 모습은 실로 모범적이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었으니, 만신전에서는 이스칼을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남편의 재목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은 프리가의 도끼와 셀리나의 세치 혓바닥이 무서워 집에 묶여 있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두어 번 몰래 탈출하였다가 잡혀 들어왔으니. 만신전에서 알았다면 통탄을 금치 못 할 일이었다.
“오 아주 고맙네.”
“뭘요. 별것 아닙니다. 하나 된 분의 은총이 있기를.”
얼마 걸리지 않아 몇 개의 지명이 적힌 양피지를 받아든 이스칼이 경쾌하게 만신전을 나섰다.
집으로 향하며 대충 훑어보니 가까우면서도 암살단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아주 적당한 곳이 하나 있었다.
“호오. 하늘이 날 돕는구나.”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차를 타고 간다면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
작은 계곡을 끼고 있는 토헤이르라는 영지였는데, 찾아보니 겨울에만 피어나는 꽃밭이 그리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이스칼은 고민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마차를 이틀이나 타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은데.’
겨울 초입의 찬바람은 젖먹이 아이들에게 매우 해로웠다.
거기에 마차를 타고 이틀이나 걸리는 여정은 아이들에게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이 될 터.
철이 없기는 했지만 이스칼 또한 세 아이의 아버지였기에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했다.
우선 아내들을 잘 구슬려서 아이들을 하녀나 만신전에 맡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은데…
거리를 걸어가며 고민하던 이스칼은 번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저 구름 위에서, 하늘 너머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스칼은 몇 번이고 느껴봤던 시선인 만큼 냉큼 무릎을 꿇었다. 익숙해질 정도로 신을 만나본 숙련된 사도의 모범적인 대처였다.
《나의 방패여. 토헤이르로 향하여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으니 너는 나아가라.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두려움 그 자체이다.》
“…!”
귓가에 울리는 우렛소리 같은 목소리에 이스칼의 등골이 섬짓하게 울렸다.
짧은 말을 끝으로 신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시선도 거두어진 것을 확인한 이스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
어안이 벙벙했다. 토헤이르로 향하라니.
별빛으로 삼라만상 모든 것을 보는 분께서 어찌 이토록 기가 막힌 때에 이런 말씀을…
“아니지. 우연이 아니다. 필히 보고 계셨을 터이니…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구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째서…?
암살단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가려는 때에, 신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다니?
“…일단 가야겠구나.”
이스칼은 자신이 염려하고 있던 것… 그러니까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신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분의 방패는 마땅히 두려움을 모를 것이다.
“뭐? 토헤이르? 이 겨울에 애들까지 데리고 가자고? 거기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아?”
“…자기. 혹시 오늘 밖에서 술 마시고 왔어? 킁킁… 술 냄새는 안 나는데?”
“그럼 이 새끼가 지금 맨정신으로 애들을 데리고 토헤이르까지 가자고 하는 거야? 이 추운 날씨에? 이틀이나 마차를 타고? 너 진짜 돌았어?”
“그, 그것이 아니고…”
두려움을 모르는 방패는 두 아내의 날카로운 눈빛에 부서졌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이스칼은 한참이나 애를 쓰며 그간 있던 일을 설명했다.
“하. 또 신이야…? 너한테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했다고? 갑자기? ………수상한데. 뭔가 구린 냄새가 나.”
“아니. 도대체 왜? 혹시 자기는 무슨 이유인지 짐작 가는 건 있어?”
“나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찾아보니 암살단이라는 이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정보가…”
암살단이라는 말에 프리가의 눈이 단숨에 뾰족해졌다.
“뭐? 암살단이라면 귀족 모가지 따고 다니는 미친놈들이잖아! 그런 새끼들 나온다는 곳에 우리 애들을 데리고 간다고?! 너 진짜 뒤졌어 일로 와.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야아아아!!”
“으아아아아! 프, 프리가! 잠깐만!! 잠깐만!!”
잔뜩 성이 난 프리가가 성난 호랑이처럼 이스칼을 덮쳤다.
쫘악!
이스칼의 등에 붉은 단풍이 잔뜩 만개했다.
뭐.
그 이후로 이스칼은 두 아내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어떻게든 두 아내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에 성공하기는 했다.
“너 진짜… 우리 애들한테 무슨 문제 생기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겠어?!”
“우리 자기가 마부에 밥도 만들고, 오가는 길에 시중도 들어주고, 애들도 돌봐준다고 했으니까ㅡ 나는 편하게 자기만 믿고 있을게?”
“하하… 하… 그럼, 나만 믿으라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스칼은 세 명의 아이와 두 아내가 탄 마차를 몰고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응애애애애!! 으아아아앙!!
“이스칼! 데릴 운다! 똥 쌌는데? 얼른 기저귀 좀 갈아줘.”
“어, 잠시만. 내가 여기 어디에 기저귀를…”
“자기 나 목이 좀 말라. 혹시 물이나 음료는 없어?”
“무, 물? 잠깐만. 일단 기저귀부터…”
으아아아아앙! 후에에에엥!
“어, 어어! 네 아들 똥 위에 똥 싼다! 흘러! 흐른다고! 빨리 기저귀!”
“거의 다 찾았어 잠깐만!”
히히힝ㅡ
“워, 워어! 이놈의 말은 또 왜 말썽이야!”
똥 기저귀를 갈고, 데릴의 엉덩이를 닦고, 셀리나에게 물을 전달하고, 갑자기 날뛰는 말을 진정시킨 이스칼의 정신은 너덜너덜했다.
뭔가… 자신이 기대하던 여정이 아닌 것 같은…
시작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의 가호 덕분인지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에게 별다른 일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흐음.”
그리고… 마차를 멈추고 모두가 잠든 밤.
이스칼은 품에서 비밀스럽게 봉인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편지의 겉에는 만신전의 표식이 선명했다.
‘검은색 표식…’
표식은 기밀 사항을 의미하는 검은색이었다.
모닥불에 의지해 편지를 읽은 이스칼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후우.”
춤추는 모닥불이 이스칼의 얼굴에 그림자를 흩뿌렸다. 덕분에 이스칼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음에도 작게 꿈틀거리며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
휙.
꼼꼼하게 편지의 내용을 모두 외운 이스칼은 편지를 모닥불에 던졌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게걸스럽게 편지를 집어삼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스칼은 원형 방패를 조심스럽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그의 방패가 원 없이 날뛸 때가 올 것이었으니까.
* * * * *
스슥.
하얀 달빛이 내려앉는 깊은 밤이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로 몇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일어났다.
“……”
에샤와 암살단이었다.
‘와. 여기가 토헤이르구나. 이곳에 겨울에만 피는 꽃이 있다고 하던데.’
에샤는 저 멀리 보이는 낮은 성을 보며 참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점점 행동반경을 넓히며 천칭이 기울어지는 귀족을 처벌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1호가 감회에 젖은 에샤를 방해했다.
“수장님.”
“………”
에샤는 티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간 열심히 돌아다니며 1호부터 8호까지의 복수를 모두 마쳤다. 에샤가 알게 된 것이라면 여덟 명 모두 참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
‘왜 그렇게 귀족을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아.’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유부녀라는 이유로 여인의 남편을 교수형 시키는 영주라니.
에샤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질 나쁜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더라.
“……토헤이르의 영주에게 의심되는 건 뭐였지.”
이미 사전에 들었던 내용이지만 에샤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한밤중에 몇 번 수상한 마차가 오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동시에 출처가 불분명한 거금이 들어왔다는 것을 미리 잠입한 6호가 확인했습니다. 정황상 불법적인 거래를 통해 재산을 불리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불법적인 거래라.
그냥 딱 불법적인 수준이었으면 암살단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법적인 거래라면?”
“아마도 토헤이르에서 자라는 자생물을 이용한 마약이나 미약… 혹은 그에 준하는 약물로 예상하는 중입니다.”
“추정되는 피해자는?”
“토헤이르 인근 영지에서 약쟁이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3호의 보고입니다. 극심한 중독과 환각, 폭력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중독성이 있는 약인가.”
“꼴에 영주라고 자기 영지민들한테는 철저하게 단속하더군요. 외부를 상대로만 장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보라.
만신전이 있는 성도에서 마차 타고 이틀이면 도착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토헤이르마저 버젓이 마약을 거래하고 있는 꼴이다.
‘정정당당한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어.’
영악하고 악한 것들은 쥐새끼와도 같아서 천적이 나타나면 금세 꼬리를 말고 온갖 아양을 떤다. 착한 척, 순수한 척하며 자기 무고를 호소한다.
이런 녀석들은 정석적으로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빠져나갈 구멍을 수도 없이 파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처럼 음지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필요했다.
“……안타깝군.”
에샤는 조금 착잡한 심정을 애써 추슬렀다.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의 떫은 성장통이었다.
조금 굳은 에샤의 표정을 본 1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
“……가자.”
에샤를 비롯한 그림자들이 낮게 달리며 토헤이르의 성벽을 손쉽게 타올랐다.
“음? 거기 누구 있ㅡ”
성벽을 돌아다니는 병사들은 최대한 피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기절시켰다.
불필요한 살생을 지양하는 암살단의 행동 방침 때문이었다.
어둠을 틈탄 하얀 망토들은 쉽게 보일 것 같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허깨비와도 비슷했다.
“……”
탓.
짧은 도약음과 함께 토헤이르 성의 벽을 오르기 시작한 에샤. 암살단이 그 뒤를 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벽을 오른 이들은 사전에 파악한 성의 구조도를 따라 움직였다.
얇은 창 너머로 밝은 빛과 쾌활한 웃음이 들려왔다.
에샤의 수신호에 모두 숨을 죽였다.
“ㅡ…하하하. 평소 경에 대한 무용은 자자하도록 들었습니다.”
“ㅡㅡ…부끄럽군요. 별것 아닌 과장된 것들 뿐입니다. 하하.”
영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긴장감을 끌어올린 에샤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엿봤다.
‘자리가 안 좋아. 잘 안 보이네.’
영주와 어떤 남자가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에샤가 천천히 자리를 움직였다.
‘……대화가 끊겼다?’
갑작스레 뚝 멈춰버린 대화.
에샤는 생각할 틈도 없이 곧장 몸을 아래로 던졌다.
“웬 놈이냐!”
챙그랑ㅡ!
작은 단검이 날아와 에샤가 엿보던 창문을 꿰뚫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머리를 뚫렸을 것이다.
에샤는 추락하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내가 보는 걸 알아차렸다고…? 도대체 어떻게!’
낙법으로 부드럽게 착지한 에샤가 암살단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발각. 후퇴. 흩어짐. 추후 연락.’
수신호를 받은 암살단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각자 알아서 잘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한바탕 소란이 일자 성 안의 병사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며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에샤는 얼굴을 가리며 창문을 올려봤다. 그곳에는 단검을 던진 사내가 몸을 내밀고 있었다.
“네 이놈! 네가 바로 암살단이구나! 더럽고 추잡하게 숨어들어와서 암살이나 하는 녀석들!”
“……”
고래고래 외치는 사내는 날렵했던 움직임과 달리 조금 살이 붙어있었다.
“나, 수호자 이스칼을 기억해라! 내가 네놈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날 기억해라 이 더러운 무뢰배야! 명예도, 긍지도 모르는 녀석들!! 시궁창의 쥐새끼 같은 놈들아!”
“……”
에샤는 이스칼의 폭언을 들으며 발끈했지만,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벌써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수호자 이스칼…’
들은 적 있다.
수호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며 거대한 방패를 다루는 신의 사도.
이스칼이 던진 폭언을 에샤는 가만히 곱씹었다.
명예와 긍지도 모르는 무뢰배, 시궁창의 쥐새끼…
빠르게 병사들을 따돌리며 성벽을 뛰어넘던 에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까짓거 쥐새끼 좀 되면 어떤가?
그럼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진다면.
달밤 아래 원 없이 달리는 에샤는 무척이나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만약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 정말 환장할 정도의 그림이겠네요ㅋㅋㅋㅋㅋ 호기롭기 일갈했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ㅋㅋㅋㅋ
이스칼이 한스의 혼란을 틈타 너무 쉽게 결혼한 느낌이 있기는 하죠! 원없이 쉬었을테니 이제 쭉쭉 굴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