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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2

        

       청의 눈매가 일자로 가늘어진다.

         

       멀쩡히 잘 먹고 잘 마시다가 잘 자야지 하는 사람을 불러다가는 기껏 하는 소리가 혈교에 투신하겠다니?

         

       뭐지? 자기 과시? 아니면 노망이 났나?

       그도 아니면 그만 살고 싶다는 뜻?

         

       “혈교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나는 뱀독으로는 천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독제사고, 특출나다고 할 의술까지는 아니다마는, 그래도 무공 아는 의원이 얼마나 귀해.”

         

       “갈수록 가관이네. 그런데요?”

         

       “음. 그래. 뭐 혈교에 투신하려면 내가 달리 증명해야 할 일이라도 있느냐? 이제부터 혈교도 하겠다고 한들 덜컥 믿어주겠냔 말야.”

         

       “음. 그야 그렇겠죠?”

         

       듣고 보니 궁금하기는 하다.

       혈교도 혈교 나름대로 뭔가 검증할 수단이 있지 않을까?

       정파도 사파도 심지어 마교도들도 질색을 하는 놈들이 혈교다.

       진즉 간자가 들어가 행적이 나와 온 무림의 합동 공격을 받았어야 하지 않는가.

         

       “흠흠, 그러서 말인데, 내가 요가의 대를 끊어놓고 나왔다. 겸사겸사 장부 역시 죄 태워버리고 나왔으니, 요가염방은 이제 망했어. 아주 쫄딱 망했지.”

         

       어쩐지 악업이 많이 줄었더라니.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녀석이-

         

       “엥. 쟤는요?”

         

       청이 한구석 불안하게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요민을 가리켰다.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 저를 향하자 요민이 눈에 띄게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다.

         

       “쟤가 셋째인가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계림검파에서 난동을 부리는 걸 봤는데? 대를 끊었다면서요?”

         

       “내 제자 삼기로 했다. 지 애비애미에게 외면받고 형제들에게 치인 불쌍한 놈이야. 그만큼 속에 화가 가득 들어찼지. 제 형제들에게 극독을 먹일 정도로 독심이 있는 놈이기도 하고.”

         

       “스승님? 제자는-”

         

       “어허. 어때? 딱 혈교스럽지 않느냐? 딱 혈교에 알맞는 인재, 아주 혈교하려고 태어난 놈이 아니냐.”

         

       청의 면사가 돌아가자, 요민이 움찔했다.

       청과 시비가 붙어서 살아남았다는 말은, 악업이 세자리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땅을 핥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게 독한 놈 같지는 않았는데?

       혈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또 뭐고.

         

       “그래서, 어떠냐?”

         

       “아니, 왜 혈교를 하려고 해요? 멀쩡하게 의술 가지신 분이.”

         

       “사파 놈들이 날 먼저 버렸다. 그전부터 은근 깔보는 눈치기도 했어. 그래, 존중을 해주기엔 어중간한 놈이다 이거지.”

         

       이제는 막 나가겠다고 사도련 버리고 사파 놈들이라 부르는 사사의였다.

         

       “깔봐요? 어르신을요?”

         

       “어유, 말도 마라.”

         

       사사의는 스스로 소개하기로도 뱀독으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보통 스스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는 말은 조금 구차하다고 하겠다.

       대충 육 위 칠 위에 있는 놈들은 제 위의 인원들 제끼고 자신을 다섯 번째에 올린다.

       그러니 대충 팔 위부터 십삽위 쯤, 대략 그 정도 애매한 위치에 선 달인들이 열 손가락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독으로 열 손가락이 아니라 뱀독에 한정해 열 손가락이라고 하지 않았나.

         

       보열도 자신이 애매하다는 사실을 안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현경은 보이지도 않아 애초부터 포기해버린 참이고.

       모든 독을 이해하기에는 아둔함을 알기에 뱀독 하나에 집중하였으나, 그나마도 신의나 만독자, 살중빈의관 등등 이름난 의원 혹은 독공의 고수들이 훨씬 잘 안다.

       의술의 성취야 늙은 의원 수준이지 딱히 뛰어나 이름 붙여 의서를 쓰지도 못하고.

         

       “에이, 왜 그리 생각하세요? 그리고 이름 높은 마두시면서 산수를 넘으셨으면 그만으로도 대단하시지.”

         

       “말이라도 고맙구나. 그만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거지. 당장 네가 아니었으면 남녕에 와서 용궁루 꼭대기 한 번을 못 와볼 판이었으니 오죽할까.”

         

       “그래서 혈교에 가서 복수하시려고요?”

         

       “그보다는 산 사람은 살아야, 아니, 아니지. 그래 복수다. 아주 세상을 피에 잠기게 하고 말 것이다. 혈교는 뭐라고 만세를 부르나? 혈세? 혈천당립?”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그냥 혈교 말고 정파에 투신해도 되잖아요.”

         

       “정파 놈들이 개인적인 원한까지 막지는 않을 터인데, 사파의 고수들이 명분 세워서 한 명씩 줄지어 달려오면 어쩌겠느냐.”

         

       “음. 뭐.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왜 불렀어요?”

         

       “그러니 네 도움이 절실한 판이다. 혈교에 소개 좀 해 다오. 응?”

         

       “엥. 제가요?”

         

       청이 눈을 끔벅거렸다.

         

       “네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내 그래도 화경이나 되는 고수인데.”

         

       “아니 자꾸 남의 입장을 들먹이세요?”

         

       생각해보니 이 어르신의 말버릇인 듯, 꼭 만날 때마다 네게도 어쩌니 네 입장에서도 어쩌느니.

         

       “왜.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한 꼴이 아니냐? 어차피 혈교도 파벌 갈라서 줄 들고 힘겨루기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도 확실히 아군을 만들어 두면 좋지. 그래. 파벌 싸움에 극독만큼 요긴한 것이 어디 있어.”

         

       “아니, 큰일 날 할아버지네. 무슨 파벌 싸움에 독살까지 쓰려고. 그리고 그보다 왜 자꾸 혈교 일을 나한테 물어보는데요?”

         

       “그럼, 혈교 일을 혈교인에게 물어보지 누구에게 물어봐?”

         

       “엥.”

         

       청이 순간 벙쪘다가, 날씬한 손가락을 들어 제 목울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혈교?”

         

       “그럼?”

         

       “저 혈교 아닌데요?”

         

       “무슨 소리냐? 소수마녀가 아니냐?”

         

       “에이, 저 소수마녀 아니에요. 소수마공 익혔다고 전부 소수마녀게요?”

         

       “의술을 익히면 의원이고 검술을 익히면 검사인데 소수마공을 익혀놓고는 소수마녀가 아니라니?”

         

       “소수마공이 아니라 신녀신수거든요?”

         

       이번엔 보열이 벙쩠다.

         

       “신녀신수?”

         

       “신녀신수.”

         

       “소수마공이 아니라?”

         

       “쪼금 비슷할 수도 있으니까? 헷갈리실 수도 있겠죠?”

         

       보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말이 되냐!”

         

       “안 될 건 뭔데요?”

         

       청은 당당했다.

       보열은 기가 막혔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에이, 믿음이 중요한 거죠.”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아니, 잠깐.”

         

       보열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 앞에서는 소수마녀 행세를 하고 독을 받아가지 않았더냐?”

         

       “앗.”

         

       청의 가슴속에서 양심의 삼각형이 빙빙 돌았다.

       물론, 강호에서 닳고 닳느라 거의 원형에 가까운 동글동글한 삼각형이나 딱히 양심에 생채기를 내지는 않았지만.

         

       “헤헤. 죄송.”

         

       “뭣!?”

         

       “천하십대극독이 너무 탐나는 걸 어떡해요. 한 병에 대마두 하나씩 잡을 수 있을 텐데. 대마두 셋이 사라지면 세상이 또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어르신도 좋은 일 하게 되는 셈이지, 안 그래요? 나중에 이게 다 공덕이 되는 거니까, 음, 어르신 말씀대로면 어르신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잖아요?”

         

       “아니, 뭐, 뭐 이런.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단 말이냐?”

         

       “죄송해요.”

         

       “내가 네 정체를 까발리면 어쩌려고?”

         

       “천화검이 실은 소수마녀다? 세상에 누가 그걸 믿어요? 그것도 사파의 마두가 하는 소리를? 어르신 같으면 솔직히 믿으세요?”

         

       “그래도 사사의의 이름이 그리 가볍지는 않다. 내가 내 눈으로 똑바로 보았다고 하면-”

         

       보열의 말이 뚝 끊겼다.

       청이 손끝으로부터 검정이 번져 순식간에 소매를 넘어 들어가버렸기에.

       그리고는 새까만 손 위에 보라색 마기가 파지지직.

         

       “자. 이제 눈으로 보셨으니 가서 흑살마장이랑 자전마공도 익혔다고 하실래요?”

         

       “어, 음?”

         

       그러다 보열이 문득 생각이 나는 말이.

         

       ‘왜 아예 흑살마장에, 자전마공에, 눈동자에는 전륜이 돈다 하시지요’

         

       “혹시 전륜마겁은 안 익혔, 아. 그래. 익혔구나. 그놈 거참 용하기도 하지……”

         

       “자. 이제 말하면 사람들이 믿겠어요?”

         

       “흥. 못 믿을 것은 또 뭐야?”

         

       “에이. 만약 제가 문정역이 사실 태극검 익힌 정파의 간자였다고 하면-”

         

       “뭐야! 문정역 그놈이!? 어쩐지, 어떻게 그렇게 다 맞추나 했다! 그래, 그렇게 날 제거하려고 아주 독심을 품었더니만! 역시 정파의 간자 새끼였구나!”

         

       무슨 마두가 이리도 순진해 빠져가지곤.

       하긴. 그러니까 세 번이나 속았겠지…….

         

       청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어휴.

       그런데, 입은 하나인데 한숨이 두 개다.

       청이 고개를 돌리니, 숨을 크게 뱉어낸 요민이 화들짝 놀라더니 스승 뒤에 숨는다.

         

       “저, 스승님. 문 대협, 아니 문정역이 정파의 간자라는 게 아니라, 그러면 믿으시겠냐고 여쭈는 것 같은데……”

         

       “뭣이? 아, 그래. 난 또 뭐라고. 어쩐지. 믿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놀라지 않았나?

       하지만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속여서 독을 뜯어냈으니, 청이 일단은 입을 꾹 다물고 살살 눈치를 보았다.

         

       “내 널 믿었건만. 어찌.”

         

       “정파와 사파 사이였잖아요. 그리고 사실 협박하는 사람하고 협박받는 사람이, 엥. 그러네. 정체 밝히겠다고 협박까지 하셔놓고는 뭐가 어째요?”

         

       “이 고얀 것을 보았나!”

         

       보열이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내민다.

       길게 늘어진 소맷자락 아래에서 하얀 뱀 대가리가 쉬이익 바람 뿜는 소리로 앙증맞은 위협을 가한다.

         

       청도 지지 않고 의자를 쓰러뜨리며 파류검 손잡이에 손을 척 얹어놓는다.

         

       “헹. 그래요, 오늘 아주 사생결단을 내요! 나름 정이 들어서 봐주려고 했는데, 혈교가 뭐가 어째? 아주 천하의 대마두 나시겠네.”

         

       그렇게 둘이 대치하며 노려보기를 한참.

       쉬이익 쉬이익 제 주인 건드리지 말라고 연신 위협을 하는 하얀 뱀, 그리고 스승의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자리잡는 요민까지.

       발검하면서 휘두르면 궤적이 먼저 닿는 자리이니, 칼을 맞아도 먼저 맞겠다는 뜻이 된다.

         

       그에 청이 한숨을 포옥.

         

       “어쨌거나, 갈 데가 없으시다는 거 아니에요? 정파는 못 가겠고.”

         

       “크흠. 뭐. 그렇지.”

         

       “아는 상회라도 좀 소개해 드려요? 작은, 아니 이제 작지는 않은 것 같고. 제법 큰 상회인데, 조용히 진맥이나 보시며 살기엔 나쁘지 않으실 거예요.”

         

       청이 설가놈과 최리옹을 떠올렸다.

       볼 때마다 악업이 줄어드는 것이 돈 벌어다가 좋은 일에 계속 쓰는 모양인데. 거기 의원 하나 끼면 더 좋지 않겠나 하고.

         

       “크흠. 하지만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내게 딸린 원한이 있다고. 사파 놈들이 분명 해를 끼치려 들 텐데.”

         

       “거기 고수 많아요. 진짜 많아.”

         

       최리옹 뿐만 아니라 무슨 일꾼도 짐꾼도 심지어 주방에서 잡일하는 아주머니도 고수더라.

       아마도 마교의 도망자들, 탈마자? 탈마를 붙이기엔 좀 거창한가? 탈교자? 어쨌든.

         

       물론, 그 사람들 모두 탈마교를 해 본 적이 없는 아주아주 신실한 교인들이다.

       다만, 청이 탈주했다고 하면 그 시간부터 탈주자가 되는 광신도들이기도 하고.

         

       그리고 설가상회에 있으면 가끔 찾아가 독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독 좋아. 너무 좋아. 아주 최고야.

       내가 먹어도 좋고 남이 먹어도 좋고. 아주 만능이네.

         

       “크흠. 그래도 괜찮겠느냐?”

         

       “어르신만 괜찮으시면 그리하세요. 거기 분들도 다 사연이 있으시니까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럼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좀 지마.”

         

       별로 극적이지는 않지만 협상 타결이다.

         

       청이 주섬주섬 의자를 일으키고, 보열은 요민이 세워준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인다.

         

       “호북성 서쪽의 자귀현에 가셔서 설가상회를 찾으세요. 제가 보내드렸다고 하시면 돼요.”

         

       “말로만 되겠나? 뭐 징표 같은 거라도.”

         

       그에 청이 철비녀 하나를 빼 내민다.

       어차피 나중에 설가상회에 가서 되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나선, 청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그런데 아까 뱀이요, 혹시 물어요? 만져봐도 돼요? 아니 물어도 상관없으니까 만져봐도 돼요? 예쁘게 생겼던데.”

         

       “오. 그럼, 뱀이 얼마나 온순한 짐승인데. 모르는 놈들이나 사나운 줄 알지, 사나운 게 아니라 그냥 예민해서 그런 게야. 사실은 영리해도 이만한 짐승이 없는데……”

         

       그에 보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본래 좋아하는 것을 설명하는 이의 얼굴은 활짝 피어오르는 법이니까.

       이것이 보열이 뱀독을 판 이유다.

         

       사실, 청의 소개를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바로 이러했다.

       마교 중에서도 진성 마교도들 소굴에다가 처박아놓고는 귀한 독만 쪽 빨아먹으려고.

         

       그런 줄도 모르고, 보열이 뱀 자랑에만 열을 올렸다.

       원래 순진한 사람은 한도 없이 끝도 없이 계속 속는 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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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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