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기사와 암살자 ( 4 )
에샤와 암살단이 병사들을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토헤이르의 영주 오르헨은 깨진 유리창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암살단의 마수가 지척까지 뻗어왔음에도 이스칼을 제외한 누구도 암살단을 눈치채지 못했다.
운 좋게 이스칼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후, 허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스칼 경…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꼼짝없이 죽고 말았겠군요.”
“하하. 별것 아닙니다.”
이스칼은 창 너머로 몸을 밀어 넣은 채 대답했다.
고개를 쭉 내밀고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엇차. 영주님. 대화는 즐거웠지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이런 뒤숭숭한 때 객이 있으면 실례일 테고, 영주님도 놀란 마음도 달래셔야 할 테니.”
“아, 알겠습니다. 머무시는 곳까지 마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뇨아뇨. 달이 참 아름다우니 걸어가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토헤이르 주변에서만 피어난다는 겨울살이의 군락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겨울… 살이요? 그것은 어찌…”
오르헨의 눈동자가 뒤구르르 굴러갔다.
이스칼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토헤이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겨울에만 피어난다는 겨울살이 군락지 아닙니까.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저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한 번 다녀오려는데, 미리 길이라도 좀 외워둘까 싶어서.”
“아. 그렇군요.”
다시 오르헨 영주의 눈이 데구르르 좌우로 작게 굴러간다.
“그렇다면 제가 시종 하나를 붙여서 안내하지요. 주변 지리에 아주 빠삭한 녀석이니 밤길도 문제없을 겁니다.”
“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저의 노파심입니다만, 겨울살이 군락지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군락지에 깊이 들어가지 말라니…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스칼의 질문에 오르헨이 기다렸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요즘 웬 불한당 녀석들이 겨울살이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면서 훔쳐 가고 있지 뭡니까! 뿌리까지 파서 훔쳐 가는데, 그 숫자가 벌써 수백에 다다를 지경입니다! 그러니 토헤이르의 자랑인 군락지도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구덩이에 사람이 빠져서 다치는 지경까지… 후우.”
“저런. 그럼 병사라도 세워두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물론 가는 길목과 군락지에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이후 저택을 나온 이스칼은 오르헨이 불러준 시종을 따라 겨울살이 군락지로 향했다.
과연. 오르헨의 말대로 군락지에 가는 길목과 군락지의 테두리를 따라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스칼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신음을 삼켰다.
‘오르헨… 말마따나 꼬리 숨기는 것은 정말 타고났군.’
토헤이르에 오기 직전, 이스칼은 만신전으로부터 은밀하게 편지 한 장을 전해 받았다.
‘오르헨 영주가 겨울살이의 뿌리를 마약으로 가공하여 유통했다는 심증에 대한 내용이었지.’
문제는 딱 심증만 있다는 것이다.
토헤이르 주변 영지에서는 나날이 약쟁이의 수가 늘어가는데, 귀신같이 토헤이르에서는 약쟁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에 대해 왜 너희 영지에서는 약쟁이가 늘지 않냐고 추궁하면, 오르헨은 그저 엄격히 제 할 일을 했을 뿐이라 말할 것이니.
거기에 겨울살이의 뿌리를 가공하면 강한 중독성을 띠는 것 또한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
이 때문에 겨울살이의 채집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데, 불한당이 겨울살이를 훔쳐 갔다고?
세 살 동자도 믿지 못할 거짓말이다.
모든 심증은 토헤이르를 가리키는데, 정작 작정하고 토헤이르를 뒤지면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결국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 반, 되면 좋도 안 되면 말고라는 심정 반으로 이스칼에게 은밀히 임무를 전달한 것이다.
이스칼은 겨울살이 군락지를 살펴본 뒤, 오르헨이 붙여준 시종을 돌려보냈다. 오르헨의 귀를 구태여 가까이 둘 필요가 없었다.
툭툭.
그러고는 귓가에 착용한 작은 귀걸이를 몇 번 두드렸다. 신성력에 반응한 귀걸이가 작게 반짝이더니 이내 목소리를 뱉어냈다.
– “아, 음. 아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잘 들려 셀리나.”
만신전에서 편지와 함께 챙겨준 성법구의 일종이었다. 약간의 신성력으로 가까운 거리의 상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셀리나. 오르헨과의 대화는 전부 듣고 있었지?”
– “하암. 듣고는 있었지. 별로 재미는 없더라.”
귀걸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셀리나의 목소리가 나른하다.
늦은 밤의 수마가 셀리나의 목소리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뭐 이상한 건 있었어?”
놀랍게도 이스칼은 본인이 눈치가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다만 본인이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노력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에서 오르헨이 귀족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어법과 회화를 구사하며 이스칼을 구워삶은 것이 뻔했는데, 그리하면 되는 일도 고꾸라지는 것이 인지상정.
하여 이스칼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밑바닥 골목 출신이자 타고난 눈치꾼에 꾀주머니 셀리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셀리나는 이스칼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척 대답을 내놓았다.
– “하아아암. 만신전이 왜 계속 이번 일에 죽을 쒔는지 대충 알겠네.”
“오?”
– “딱 봐도 견적이 나오잖아. 오르헨은 그냥 물주인 거야. 대충 눈 감아준 다음에 뒷돈 받아먹고, 실질적인 범죄는 다른 녀석들이 한 거겠지.”
“다른 녀석들? 범죄 조직? 범죄자와 영주가 손을 잡았다고?”
영지를 다스려야 할 영주가 범죄 조직과 결탁이라니?
– “어쩌면 범죄 조직일지도 모르지? 혹시 그쪽 저택에서 막 달달한 향기가 나지는 않았지?”
“달콤한 향기? 그런 건 없었는데.”
– “그래? 그러면 저택은 아니고… 아. 그런 쪽에 숨겨둔 건가? 골목 쪽에 꽃집 같은 게 있나 좀 확인해봐. 겨울살이 뿌리는 가공할 때 엄청 달콤한 향기를 내거든. 그걸 감추려면 꽃집이 젤 쉬울 거야.”
셀리나는 척척 대답을 내놓았다.
“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영주가 범죄 조직과 손을 잡는 거지?”
– “글쎄… 뭐, 돈이 탐났을 수도 있고. 일이 잘못 돌아간다 싶으면 뒤탈 없이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깟 돈이 무어라고.
이스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인도 귀족이기는 했지만, 도무지 귀족이라는 작자들의 머릿속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 아무래도 여기인 것 같은데? 달달한 향기가 지독할 정도군.”
밤이 으슥하도록 뒷골목을 뒤지고 다닌 이스칼은 마침내 작은 꽃집을 찾아냈다.
꼬불꼬불 미로 같은 골목의 깊은 곳에 위치하여 오가는 이도 없었고, 겨울이라 내놓은 꽃도 없는데 달콤한 향이 지독하게 퍼져갔다.
– “…”
“셀리나? 꽃집 찾았다니까?”
– “…씁. 아움, 으으으음. 뭐? 어, 아. 찾았다고?”
깜빡 졸아버린 셀리나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 “그, 뭐냐… 그러면 이제 바닥에 굴러.”
“…?”
– “아. 옷은 최대한 낡아 보여야 하니까 얇게 입은 다음에 구르는 거 잊지 말고.”
너무나 느닷없는 지시에 이스칼의 두뇌가 멈췄다.
“내가… 바닥을 구르라고?”
– “하아아암. 말했잖아. 왜 만신전에서 녀석들 꼬리를 못 잡았겠어. 윗대가리는 전부 허수아비야. 눈속임이라고. 실질적인 범죄는 전부 밑에서 하고 있어.”
잠에 취한 셀리나가 느긋하게 하품했다.
– “…그리고 걸리면 당장 교수형에 처할 마약을 제조하려는 녀석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목숨 말고는 가진 것 없는 막장 인생, 부랑자에 거지, 수배자들이겠지.”
듣고 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하지만 그것이 바닥을 굴러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 “잠입해야지 잠입을. 증거가 필요하다며? 그러려면 일단 거지처럼 꾸미고 숨어들어야지.”
“아.”
이스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은 차디찬 겨울의 초입. 이런 계절에 거지꼴을 하라고?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 “만신전에서 왜 계속 못 찾았는지도 알겠네. 악마 쪽으로는 기가 막히게 잡으면서 이런 쪽으로는 영 잼병이란 말이지.”
“뭐어… 이번에 새로 임명된 6계명 때문에 만신전의 방침이 조금 달라졌다고 하니까. 아직 적응 기간이겠지.”
잡담은 여기까지.
셀리나는 이후로 거지처럼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알려주고는 마저 잠에 빠졌다.
휘이이이잉ㅡ
칼바람이 불어와 피부를 할퀸다.
이스칼은 위아래로 얇은 옷만 입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바닥을 미친 사람처럼 구르기 시작했다.
“흐으으으으!”
춥다.
추우니까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꼬질꼬질한 거지의 몰골이 된 이스칼은 골목길이 쭈그려 앉았다.
행여나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얼굴에 진흙도 잔뜩 발랐다. 완벽한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흑…”
그렇게 아침이 됐다.
골목길 구석에 콩 벌레처럼 쭈그리고 자던 이스칼은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
꼬르르륵.
주린 배가 비명을 질렀다.
이스칼은 무언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맛난 냄새가 가득했지만, 무엇하나 이스칼에게 허락된 것은 없었다.
“훠이! 아침부터 재수없게 저리 안 꺼져?”
“아이씨 진짜. 구걸을 할 거면 좀 씻고 하는 성의라도 보여야지.”
“…거지 맞아? 뭔 살이, 아니. 덩치가 이리 좋아?”
어느 마음씨 좋은 아이가 던져준 귀리빵 조각이 이스칼의 아침이었다.
이스칼은 허겁지겁 빵을 먹어 치웠다.
대충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탐색, 그래. 탐색해야지.”
걸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한 이스칼은 슬쩍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단숨에 의심의 눈초리가 쏘아졌다.
걸인의 세계는 좁고도 편협한 것이다.
두 다리만 건너면 형님 아우 할 수 있었고, 구걸은 일종의 생존 경쟁이었기에 낯선 경쟁자의 출현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이에 이스칼은 셀리나가 알려준 비장의 대사를 꺼냈다.
“칵 퉷. 느이들 혹시 한스 행님 아나!”
“하, 한스 형님…?”
걸인들이 단숨에 눈을 깔았다. 한스는 이 구역을 지배하는 공포의 걸인 대장이었다.
주춤주춤, 거지 중 덩치 큰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하, 한스 형님하고는 어떤 사이십니까?”
“느 쉐끼들! 내가 한스 행님하고 아우 형님 하는 사이다! 칼잡이 칼이라고 못 들어봤나!”
칼 없는 칼잡이 걸인, 칼의 탄생이었다.
당연하지만 이스칼은 이 구역의 대장 한스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와. 이게 되네?’
셀리나가 말하기를.
– “일단 거지가 많은 곳에 가서 한스라는 형님 모르냐고 막 소리를 질러. 그러다 보면 어디 하나쯤은 반응이 올 거야.”
처음에는 그게 되나 싶었다.
– “자기. 내가 뒷골목 생활하면서 만난 한스를 숫자로 세면 두 자리가 넘어. 이건 무조건 통해.”
이스칼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은근한 의심의 눈초리를 느꼈다.
셀리나의 두 번째 조언이 이르기를.
– “한스가 통했어도 한번에는 안 믿을 거야. 거기서 이렇게 말해.”
“느이 쉐끼들! 한스 행님 모르냐고! 으이? 커다랗게 칼 맞은 흉터도 있고! 이빨도 막 빠져서 인상 더럽게 웃는 행님!”
“아아.”
거지들이 일제히 탄성을 토했다.
이스칼이 설명한 외형은 구역의 대장 한스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 “거지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놈이 뒷골목 다니면서 어디 칼 맞을 일이 한두 번일까? 거기에 관리를 안 하니까 이빨도 없는 놈들이 대부분이야.”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보는 셀리나의 조언!
거지들은 완벽하게 경계를 풀었다.
‘와. 이게 진짜 된다고?’
이스칼은 속으로 감탄하며, 거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 * * *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암살단 소속, 이름은 버려서 없다.
다만 3호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수개월 전 미리 토헤이르로 파견되어 긴 시간 끝에 걸인들 사이에 완벽하게 녹아든 3호는 떨리는 눈으로 이스칼을 바라봤다.
머리는 기름졌고, 얼굴에 덕지덕지 진흙을 발랐지만 3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스칼과 에샤의 마찰이 있었음을 전해 들었기에 정보를 미리 외웠기 때문이다.
3호는 가만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사도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거지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려야 한다.
꿈틀꿈틀,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3호가 조용히 구석으로 사라졌다.
“…흠.”
이스칼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3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까부터 힐끔힐끔 보던 눈빛을 자신이 모를 것이라 생각한 걸까?
그리고 작게 말했다.
“찾았다.”
더러운 마약 제조범 녀석.
Ilham Senjaya님, 정말 반갑습니다! 어제 휴재 공지를 올렸지만… 그냥 하루 푹 쉬니까 괜찮아져서 글을 썻읍니다ㅎㅎ
남은 벌충은 주말에 올라가거나, 월요일에 연참으로 해결하겟습니다.
휴재를 선언한 작가가 연재한다…
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굴욕이잖아?
– “신선우”님,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깨셧군요! 축하드립니다 귀인이시여! 이제 스꼴라에 이어서 3로 이어지는 여정이 남았군요!
바닥을 기어버린 이스칼의 평판… 결국 정말 바닥을 구르고 마는데… 과연 이스칼은 어떻게 될 것 인지…!! 도키도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