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기사와 암살자 ( 5 )
– 타다다다닥.
기계적으로 키보드들 두들기며 생각했다.
요즘 내가 보기에 이스칼의 태도는 심히 불량했다.
결혼한 부부는 축복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행복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탱커라는 녀석이 그렇게 살이 찌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렇기에 이스칼은 조금 굴러야 한다.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아주 잠깐 화장실을 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스칼이 구르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게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로, 바닥을 구르라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
변기에 앉아 화면을 본 채로 입이 떡 벌어졌다.
마당을 구른 흙투성이 빨랫감도 지금의 이스칼보다는 깔끔할 것이다.
그 정도로 화면에 보이는 이스칼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보자마자 바닥을 굴렀다고 확신이 들 정도.
‘아니. 애가 무슨 거지꼴이 됐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멀쩡한 옷이랑 방패는 도대체 어디에 버리고 이런 꼴을…
앞뒤 상황의 전개가 도무지 예측도 되지 않는 상황.
지구로 떨어지는 메테오를 갑작스레 난입한 메카 티라노사우루스 닌자가 썰어버린 기분이었다.
‘오우씨. 메카 티라노사우루스 닌자는 좀 개쩔긴 하네.’
아무튼.
완벽하게 거지가 된 이스칼은 기척을 죽이며 누군가의 뒤를 밟고 있는 와중이었다.
‘저건, 3호…?’
3호. 암살단의 소속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스칼이 암살단의 뒤를 밟고 있다고…?
‘이스탈한테 토헤이르로 가라고 시켰으니 조만간 만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이스칼과 암살단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자세한 전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케넬름과 리아에게 물어보려 할 때.
– 부우우웅!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가 왔다.
싸이코 팀장의 전화였다. 이 미친놈은 사람이 똥을 싸고 있는 와중에도 전화를 걸어 사람을 재촉했다.
“아, 예. 네? 아, 아뇨. 별로 안 급합니다. 예. 바로 가겠습, 아 예. 넵.”
소리 죽여 욕을 하며 서둘러 화장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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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칼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3호를 미행했다.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3호는 으슥한 그늘의 커다란 석판을 번쩍 들더니 구멍 안으로 쏙 사라졌다.
“허.”
감쪽같이 숨겨둔 비밀 문이었다.
이스칼이 작게 감탄했다. 마약이나 제조하는 녀석들이 제법 꽁꽁 숨어있었다.
이러니 꼬리를 못 잡지.
허벅지 안에 숨겨둔 작은 버클러를 손목에 단단히 착용한 이스칼이 석판을 들어 올렸다.
– 끄그그그극.
석판은 소름 끼치지는 소음을 지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석판을 치운 자리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이스칼은 망설임 없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스칼의 몸이 짧게 허공을 낙하하다가 이내 바닥에 닿았다.
– 탁.
발이 바닥에 닿자 곧장 느껴지는 것은 싸늘한 살기.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이스칼이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캉! 어둠 속에서 불통이 튀어 오르며 이스칼이 있던 자리를 찔렀다.
반사적으로 버클러를 휘두른 이스칼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스칼의 눈은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고, 어둠 속의 상대는 어둠에 익숙했다.
‘젠장.’
이스칼은 타인의 시선을 느끼는 특유의 감각과 흐릿하게 보이는 윤곽을 따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카앙! 다시 한번 버클러에서 불똥이 튀어 오르며 짧게 어둠을 비췄다.
그 찰나에 이스칼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방의 구조, 상대방과의 거리, 무기, 성별, 팔 길이.
모든 것이 이스칼의 뇌리에 새겨졌다.
‘여긴 터널이었군. 무기는 개조한 레이피어? 단검? 거리는 2미터 남짓.’
그리고 또다시 허공에서 날아오는 검격을 피하기 위해 이스칼이 바닥을 굴렀다.
‘끄응! 운동 좀 꼬박꼬박 할 걸 그랬어!’
예전이었다면 바닥을 구를 필요도 없이 버클러 하나로 거뜬했을 것인데!
나태해진 몸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이스칼은 둔해진 몸을 채찍질했다.
어둠 속 상대는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이스칼의 숨통을 노렸다.
어둠을 틈타 휘둘러지는 공격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팔과 다리는 일절 노리지 않으면서 심장과 목, 가슴과 같은 치명적인 부위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흉심이 가득한 살검이다.
‘이미 다 봤다고.’
이스칼은 찰나의 불똥에서 상대의 무기와 길이를 확인했다.
저 무기는 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차라리 개조한 단검이나 레이피어의 날을 자른 것에 가까울 정도.
속으로 타이밍을 헤아리던 이스칼이 망설임 없이 몸을 앞으로 확 쏟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이스칼이 검을 향해 달려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이스칼은 과감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심장을 향해 다가오는 공격은 뱀처럼 빠르고 지독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어디를 노릴지 너무 알기 쉬웠다.
카카가가각!
이스칼의 버클러가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갔다. 혹사당한 버클러는 최후의 순간,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했다.
목을 노리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어둠 속에 있는 상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틈을 노린 이스칼이 곧바로 상대에게 몸을 던져 팔과 다리의 관절을 꺾었다.
“………!!”
상대방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검술도 훌륭했고, 정신력도 독한 녀석이었다. 그 실력으로 한다는 것이 고작 마약 제조라는 것이 아쉬울 뿐.
“순순히 포기해라. 다 알고 왔으니.”
“………!”
저항이 심해질수록 이스칼은 더욱더 강하게 팔다리를 꺾었다.
허나 상대방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상대방의 팔은 완전히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만.”
저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스칼의 몸에 있는 솜털이 쭈뼛 솟아올랐다.
곧장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다.
오르헨 영주를 암살하려 했던 그 녀석!
암살단이다!
튕겨 나오듯 자리에서 일어난 이스칼이 사방을 경계했다.
스르륵, 그림자에서 스며 나오는 것처럼 에샤가 나타났다.
“끅, 으윽…”
“…다친 곳은 없나.”
“……면목 없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가서 쉬어라.”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3호가 에샤의 뒤로 사라졌다. 이스칼은 그 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너, 이 더러운 시궁창의 쥐새끼 녀석! 암살로도 모자라서 마약까지 손을 뻗은 것이냐!”
“…마약?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에샤가 고개를 저었다.
이스칼이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약에 관해서 암살단은 무고했다.
“……헛짚었군. 우리는 마약과 무관하다…”
“너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조사하면 전부 나올 것이다.”
“아니. 맹세코 우리는 마약에 손을 댄 적이 없다.”
에샤는 단호하게 말하며 이스칼을 노려봤다.
자신들을 시궁쥐라고 부른 것은 참을 만했지만, 마약쟁이라 부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어둠 속 스산하게 빛나는 에샤의 눈을 마주한 이스칼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 눈은 진짜였다.
눈앞의 사내는 진실로 마약에 대해 혐오하며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흠.”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이스칼은 마약에 대해 추적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암살단을 만날지 몰랐던 까닭이었고.
에샤는 신의 사도 이스칼에 대해 어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너, 암살자여. 어째서 오르헨 영주의 목숨을 노리는 거지? 그쪽도 마약 때문이냐?”
“……마약? 우린 그런 것은 모른다. 다만 ‘천칭’이 오르헨 영주의 악업을 고했기에, 우리는 그대로 도축할 뿐이다.”
“천칭? 도축이라고?”
에샤는 품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진 천칭을 보였다.
천칭을 알아본 이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나름대로 신성력에 대해 익숙해진 이스칼이었기에 천칭에 깃든 무지막지한 신성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신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었다.
“그것은… 그 신물을 어찌, 네가 들고 있는 것이냐!”
“……”
에샤는 신께서 주셨다고 말해도 될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하늘께서 나에게 주셨다. 악인을 판별하고, 도축하기 위해.”
“허튼소리!!”
곧바로 이스칼이 일갈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권리? 그것은 재앙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신께서 너에게 그런 권리를 주셨단 말이냐! 너의 무엇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믿지 않는 것은… 너의 자유다.”
머리 위로 발자국 여럿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음을 깨달은 에샤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천칭’은 절대적이다. 천징은 오르헨 영주를 악인이라 선언했다.”
몇 번이고 천칭의 절대성을 확인한 에샤는 단언했다.
‘천칭’은 대상의 죄와 악업을 헤아린다.
“……”
이스칼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에샤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혼란스러웠다.
신께서 저런 암살자들에게 심판의 권리를 주셨다고?
도대체 어째서?
“여기 사도님이 계신다!”
머리 위의 석판이 움직이더니 횃불과 함께 병사들이 나타났다.
요란하게 퍼지는 날붙이 소리를 듣고 누군가 병사를 불러온 것이다.
“……후우.”
이스칼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다스리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래. 신의 의도를 어찌 인간이 헤아리겠는가.
하늘이란 맑다가도 흐린 것이며, 돌연 폭우가 몰아치는 것이니.
인간이 하늘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의 극치이리라.
그리 마음먹었더니 이스칼의 머릿속은 조금이나마 평온해졌다.
‘그래. 일단 암살단에 관해서는 그만 생각하고, 집에서 좀 쉬자… 조금만 쉬다가 다시 오르헨 영주와 마약에 대해 찾아보자.’
짧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잔잔해진 이스칼의 평온함에 커다란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쿵쿵쿵.
“이스칼 사도님. 주무십니까? 저 오르헨입니다.”
“오르헨 영주님? 이 늦은 시간에는 도대체 무슨 일로?”
밤늦게 은밀히 이스칼을 찾아온 오르헨 영주였다.
뒤따르는 시종도 달랑 한 명이 전부. 오르헨의 표정은 절박했다.
“이스칼 사도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 외치면서 다짜고짜 이스칼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이스칼이 오르헨을 일으키려 했지만, 늙은 몸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요지부동이었다.
“아, 아니. 오르헨 영주님? 그게 도대체 무슨. 일단 좀 일어나서 이야기를!”
“이스칼 사도님! 마약에 대한 것은 전부 제가 시켰습니다! 부디 저 하나의 목으로 만족하시어 다른 이들의 죄를 논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
설마 오르헨의 입에서 마약에 대해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이스칼이 황당해했다.
허나 이런 이야기를 길거리에서 할 주제는 아닌지라, 일단 이스칼은 오르헨을 집 앞으로 들였다.
“일단 좀 안으로!”
이스칼의 평화는 풍랑을 만난 종이배처럼 침몰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오늘은 약속한대로 연참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