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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6

       어째 기껏 넓은 곳으로 이사 와서도— 아니, 오히려 넓은 곳으로 이사 왔기 때문일까?

        

       우리가 생활하는 곳은 거의 거실이었다. 낮에 집에 있을 때는 거의 언제나 거실에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다 같이 TV를 보거나 수다를 떨거나 했다. 하긴, 아직은 물건 대부분이 방보다는 거실 주변에 있긴 했다.

        

       잔뜩 사다 놓은 간식거리는 부엌에 있었고, 이사 오기 전 원룸에서 쓰던 물건들도 거의 다 거실에 가져다 두었다. 내가 쓰려고 사다 놓은 것 중에는 결국 이 네 사람도 함께 쓰게 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헤어드라이어 같은 것을 거실에 두고 공유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다만, 일단은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아마 다른 누가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은 그렇게 계속 쓸 것 같았다.

        

       이 집안에서 내성적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미아와 나뿐이었다.

        

       “언니, 이건 어때?”

        

       클레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외향적인 성격이다.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한테 말 걸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타인을 대할 때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는다는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아제르나에서나 지구에서나 클레어는 활기찬 강아지가 떠오르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클레어가 방향제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조언했다.

        

       “방향제라면 조금 더 값이 나가는 것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싼 걸 사면 향이 호불호가 갈리거나, 너무 강해서 오래 쓰기 어렵거나 하니까요. 그런 것은 보통 여러 개를 많이 사두고 쓰는 곳에서 적합합니다.”

        

       “그런가?”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물건을 다시 내려놓았다.

        

       “컵이나 접시는? 다섯 명이나 같이 사니까 일단 많이 사두면 좋지 않을까?”

        

       “확실히 그건 그렇겠군요. 저희가 가진 돈을 생각했을 때 조금 더 비싼 걸 사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이런 것은 비싸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비싸지기도 하니까요.”

        

       앨리스의 아이디어에 샤를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와 샤를로트는 클레어와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외향적인 성격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샤를로트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사교회에 나가며 사교성을 길렀다. 앨리스는 원작에서는 다소 비타협적이고 고집불통이었지만,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 성격이 매우 부드러워져서 이제는 ‘사교적’이라고 할만한 성격이었다.

        

       “지금까지는 즉석식품이라는 것이나 배달요리를 자주 먹었습니다만, 슬슬 직접 요리를 해볼 때도 되었지요. 부엌이 넓어져서 여러 사람이 들어가도 북적거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샤를로트가 내 쪽을 보며 웃었다.

        

       지구에 살던 시절의 나였다면 그 미소가 심히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자가, 그것도 예쁜 여자가 나한테 웃어줄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나도 그런 ‘예쁜 여자’ 중 하나였지.

        

       그렇다고 마주 웃어주는 건 조금 쑥스러웠지만.

        

       “이, 이건 어떨까요? 방 안이 너무 삭막한 것도 조금…….”

        

       “장식이라면 사고 싶은 만큼 사도 좋습니다. 가끔 그런 작은 도자기를 잔뜩 사서 장식해두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저도 따로 뭐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디서인지 작은 토끼 모양의 도자기 인형을 가지고 와 내민 미아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나 미아는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이면서도 외로움을 꽤 많이 탄다는 것이었다.

        

       나도 지구에서 혼자 살 때는 먹고살기 바빠 그런 것을 잘 느끼지는 않았지만, 아제르나로 가 친구들을 사귀고 자매들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혼자 있는 것이…… 조금 그랬다.

        

       클레어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앨리스는 내가 혼자 있으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기에, 여러모로 내가 혼자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

        

       미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매우 내성적이고, 그래서 밖에 끌고 나가는 것이 어려운 성격이었지만 아이들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애들 옆에 따라붙는 성격이 되었다.

        

       방 안에 혼자 있는 것은, 아마 싫었을 거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방을 두고도 거의 거실에 나와 있었다.

        

       딱히 아까운 것은 아니다. 거실도 다섯 사람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넓었으니까.

        

       부모 세대가 없긴 했지만, 이렇게 다섯 명이 있는 것으로 조금 가족 느낌 나기도 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집에 방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아무것도 꾸며두지 않은 채 가만히 두는 것은 역시 조금 그렇긴 했다.

        

       그래서 클레어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다○소였다.

        

       전국 어디든 다있소, 라서 그런 이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일본의 다른 회사에서 이름을 따온, 가보면 웬만한 생필품은 다 있는 그 유명한 생활용품 판매점.

        

       서울 각지에 다 있었고, 우리 동네에도 하나가 있었는데도 굳이 명동까지 온 그 의도가 훤히 보이긴 했지만, 우리 중 아무도 굳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뭐, 재미있으니까.

        

       “이런 곳에 올 때마다 대량생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돼요.”

        

       샤를로트는 접시 몇 개가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21세기는 다품종소량생산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확실히 물건의 가짓수가 늘긴 했다지만 솔직히 이게 ‘소량 생산’의 범주가 맞나 싶다. 아무리 산업혁명 때 대량생산을 했었다지만 현대만큼 많이 찍어냈을까 싶어.

        

       “규모의 경제라는 게 대단하긴 하죠.”

        

       내가 말하자, 샤를로트는 정말 부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놀러 나와서까지 저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정말 천상 공주님이라니까.

        

       물론 동화적 의미의 공주 말고. 정치인이라는 의미의 공주.

        

       산업혁명기 왕국의 공주와 동화 속 공주가 대화하다 보면 아마 동화 속 나라가 식민지가 되어버릴걸.

        

       *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공주라고 자칭해도 좋을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고, 그중 한 명은 그 공주 포지션의 사람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나는 황녀니까.

        

       하지만 우리가 꾸며둔 방은 그런 ‘공주’들이 꾸민 방 같은 분위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칙칙해.”

        

       “앨리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저기 있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대체 어떤 책입니까?”

        

       책등에 낫과 망치가 당당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불온하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다른 책은 고사하고 저건 대체?

        

       “아, 이거?”

        

       앨리스가 책상 옆 책장에서 꺼내든 그 책의 표지에는 더욱 불온하게도 위풍당당한 자태의 레닌이 그려져 있었다.

        

       어째 특정 정부 기관이 엄청나게 좋아할 것 같은 책이다.

        

       출판사는 내가 종종 들어본 출판사라서 뭐 불법까지는 아니겠다만.

        

       “아제르나에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나는 이 사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생각을 알아두면 나중에 비슷한 사건이 터졌을 때 대처하기도 쉽겠지. 그리고 말해두는데, 표지랑은 다르게 마냥 그쪽을 찬양하는 소설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혹시라도 돌아갔을 때 앨리스가 공산혁명이라도 일으킬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바로 그 옆에는 자본주의 쪽의 책도 많이 있었고, 아무튼 여러모로 사회 전반의 지식을 쌓기 위한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웩.”

        

       클레어는 기겁했지만.

        

       “너도 성적은 좋았잖아? 왜 그렇게 반응하는데?”

        

       “성적이 좋았다고 공부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앨리스의 질문에 클레어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런 클레어의 책상은 단출했다. 앨리스-클레어-나의 순서로 책상이 배치되어서 양옆에 벽이 없는 클레어의 책상에는 책장을 이어두기 조금 애매했기 때문이다. 물론 클레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책상 위에 있는 한 칸짜리 책장에는 소설책이 몇 권 꽂혀있었다. 표지는 대부분 파스텔 색조였다.

        

       “나중에 인형이나 하나 놓으려고.”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인형 말씀이십니까?”

        

       “응. 언니가 사주는 거로.”

        

       아주 당당하게 그렇게 선언했다.

        

       그런데 별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인형 살 돈이야 있으니까.

        

       복권 최고.

        

       “그럼 조만간 하나 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그건 언니가 아무거나 골라서 줘. 그게 묘미잖아?”

        

       그런가?

        

       내 선물을 받아본 여성은 어머니뿐인데. 그리고 어머니는 돈으로 주시는 걸 가장 좋아하셨다.

        

       “언니 자리는…… 어, 아무것도 없네.”

        

       “굳이 채워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여기서 공부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다. 그냥 편하게 푹 쉰다는 마음으로 지내다 갈 생각이었다.

        

       책이야 읽을지 모르고, 원하는 것이 생긴다면 공부 정도는 조금 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생각이 없다.

        

       “내가 채워줄까?”

        

       클레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인형 사주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인형 사다 줄게!”

        

       “그거 좋은 생각이네.”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던 앨리스가 말했다.

        

       “평소에 꾸미고 사는 애가 아니니, 우리가 꾸며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니, 애초에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들은 집 꾸미기 잘 안 할 텐데.

        

       방 안의 물건들이라면 그냥 기능적으로만 멀쩡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미아랑 샤를로트한테도 말하고 올게!”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클레어는 이미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런 클레어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음, 뭐.

        

       선물 받는 게 싫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클레어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니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여자한테 선물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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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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