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평범 호소인
두 사람의 전투는 밤이 지나고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치열한 전투였다.
어둠을 가르는 암살검이 목과 심장을 향해 쇄도하고.
원형 방패는 눈부시게 빛나며 철벽처럼 굳건하여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에샤의 몸에서 굵은 피와 땀이 섞여 흘렀으며, 이스칼은 가쁘게 내쉬는 숨으로 시야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한계의 한계에 달하는 싸움.
길고 긴, 서로의 자존심과 그 이상의 무언가를 건 남자의 싸움은 동이 떠오름과 동시에 끝을 맞이했다.
털썩!
“헉, 후윽, 하흑, 허윽… 제, 엔… 장…”
꾸준한 운동 부족으로 체력의 한계를 맞이한 이스칼이 먼저 쓰러졌다.
쓰러진 이스칼의 입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왔다.
“하, 하하…… 시, 시궁쥐…가… 이겼, 군…”
에샤는 속으로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겼……다!! 이겼어…! 내가, 내가 이겼어!!’
대지에 우뚝 선 에샤가 승리의 달콤함을 만끽했다. 한 손을 번쩍 올려 하늘을 때렸다. 태양마저 찬란하게 빛나며 에샤의 승리를 축복하는 듯했다.
허나.
피잉ㅡ
“어윽…”
에샤 또한 몸이 성치 않았다.
이스칼의 패링으로 꾸준하게 피해가 누적된 몸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팔이며 다리, 몸통, 근육과 관절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라는 건가. 분하군.”
에샤는 쓰러진 이스칼을 째려봤다.
체력의 한계로 쓰러졌을 뿐, 만약 이스칼이 조금이라도 운동을 했다면 지금 누워있는 것은 에샤가 됐을 것이다.
자기 관리의 중요함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수장님!”
“정말로, 정말로 대단한 전투였습니다!”
“…그 유명한 수호자를 상대로 승리하시다니.”
어둠 속에서 암살단이 튀어나왔다. 이스칼과의 전투를 숨죽이고 바라보던 암살단의 눈에는 선망과 경애의 빛이 뚜렷했다.
자신들의 수장이 무려 사도 중 수호자라 불리는 이스칼을 이긴 것이다!
그것도 암살자가 방패 기사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워서!
실로 놀라운 전적이었다.
하지만 에샤는 고개를 저었다.
“……승패는 무의미했다. 녹이 슨 방패와 싸워 이긴 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거기에 패링으로 누적된 피해는 계속해서 에샤의 몸을 갉아 먹었으니. 구태여 승패를 따지자면 찝찝한 판정승이었다.
“……이만 가자.”
잠깐 고민하던 에샤는 이스칼 얼굴에 자기 피로 작은 문양을 그렸다. 산양의 뿔 두 개가 교차한 모양, 암살단의 상징이었다.
17살 소년이 자신의 승리를 기념한 앙증맞은 장난이었다.
홀로 남아 게거품을 물고 있는 이스칼을 발견한 것은, 이스칼의 부재를 깨닫고 사방을 뒤지던 프리가와 셀레나였다.
“어, 어! 저기! 저기 있다! 야! 이스칼! 여기서 뭐 하는… 어?”
“주, 죽은 거 아니에요? 꺄아아악! 자기! 자기 일어나봐! 자기!”
“아이씨 죽긴 뭘 죽어. 울지마! 잠깐 기절한 거야… 근데 얼굴에 이 낙서는 또 뭐야?”
기절한 이스칼은 모양 빠지게 프리가의 등에 업혀서 운반되었다.
* * * * *
이틀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스칼의 입을 통해 ‘천칭’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또 괴악한 종류의 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상을 불문하고 선업과 악업의 무게를 달아 측정할 수 있는 물건이라니.
“그런 것이… 세상에 그런 것이 어찌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그 물건을 가진 것이 암살단의 수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결코 이 일을 좌시할 수 없어요!”
“어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처형합니까? 이건 만신전의 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 아닙니까!”
온갖 항의를 담은 편지가 성도로 쏟아졌다.
‘천칭’이라는 것의 존재에 심히 당황한 만신전이었지만, 이내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신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허허허. 모든 것이 그렇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신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순리를 향해 흐를 것입니다.”
“암요 암요. 저는 오히려 지금 항의하는 이들의 의도가 심히 불순하다고 여겨지는군요.”
그들은 신의 기적을 마주하는 데 있어 프로였다.
신의 기적이라는 것이 대체로 이해 불가한 영역에 있다 보니, 그들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였고,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천칭’의 등장을 경계하는 것이리라.
만신전은 항의하는 이들의 명단을 조용히 작성했다.
그러면서 화난 이들을 능숙하게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하하. 그런 불경하고 무도한 자들이 ‘천칭’을 어찌 제대로 사용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심려치 마시지요. 곧 좋은 소식이 찾아갈 겁니다.”
“저희 만신전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 매우 심각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가용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해서 총동원하여ㅡ”
두루뭉술, 어영부영, 얼렁뚱땅 듣기 좋은 말로 달랬더니 성났던 이들이 활짝 웃으며 돌아가더라.
물론 만신전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암살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제재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저희가 미쳤습니까? 허허허. 암살단의 행보가… 끄응. 굉장히 과격하고 과감하고, 무도하고,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맞지만… 일단 그들도 하나 된 분의 선택을 받은 사도입니다.”
“거기에 암살단의 수장은 신께서 직접 ‘천칭’을 줬다고 하셨죠. ‘천칭’의 권능은 악과 선의 심판. 그렇다면 사실상 지상의 대리 심판자로 임명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암살단에 대해서는 만신전 내부의 여론도 반반으로 갈렸다.
주로 젊은 층에서는 암살단의 과감한 행보를 지지했고, 나이가 많은 이들은 우려와 염려를 표했다.
각자 생각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암살단의 수장이 신에게서 임명받은 지상의 대리 심판자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는 것.
만신전은 외부에서 지상의 대리 심판자가 나온 것에 대해 애써 아닌 척했지만 안타까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안면이라도 트고 지내던 신성 로마니안 제국이었으면 모를까.
일면식도 없는 어디 산골짜기에 살던 범부가 그리된 것이니, 만신전은 뭐라도 하나 숟가락 올릴 건더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암살단의 수장이라는… 에샤라는 자에 대해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만신전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에서, 그것도 암살자가 지상의 대리 심판자로 임명받으니 이게 참…”
만신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동안 신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을 그대로 적는 것에 대해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제국의 하늘이 열리고 빛의 기둥이 떨어지더니, 신성한 나무가 자라나며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 살아났더라.
하늘이 찢어지고 그 틈으로 별의 강이 강림하여 용사님을 축복하더라.
빛과 함께 떨어진 문을 열고 푸른색의 용이 나타나 신의 분노를 노래하더라…
그 누가 이것을 역사의 정사라고 믿겠는가?
서기관들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이 사기(史記)를 봤을 때 정사라고 믿을 자신이.
아무튼.
서기관들의 선택은 결국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적는 것이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그냥 사실대로 쓰자고. 어디 산 구석에 살던 촌부가 신의 선택을 받아 지상의 대리 심판자가 됐다고 써!”
“…그걸 후대가 믿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기록한 것들은 그대로 믿는다면 이 정도는 당연하지.”
서기관은 선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타당한 논리였다.
다만 대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중은 자극적이고 화려하고, 극적인 것에 끌리는 성질이 있기에.
신출귀몰하며, 천하장사라는 암살단의 수장이 그냥 그런 필부 출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거 들었어? 내가 건너 집 사는 아들의 마누라의 사돈의 내연녀한테 들은 건데…”
온갖 입과 귀를 건너 시작되는 음해와 소문의 흐름!
그 흐름 속에서 에샤의 신분은 그야말로 극적인 세탁이 이루어졌다.
“……뭐?”
결국 소문을 전해 들은 에샤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에 5호가 몸을 움찔거리며 천천히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으, 그러니까… 지금 저잣거리에는 수장님이 만신전의 이단 심문관 수장 출신이라는 소문이 가득해요….”
“……”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
지금 에샤가 딱 그랬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내, 내, 내가 이단 심문관 수장 출신이라고?’
고작 17살 소년이 어떻게 이단 심문관 수장을 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거기에… 수장님과 만신전이 서로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크게 달라서 심하게 다툰 뒤에 파문되었고… 그 끝에 암살단을 창립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맞아 맞아. 내가 들은 내용에서 수장님은 죄인의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대.”
“어 너도? 나는 수장님이 파문당했을 때 “누가 나에게 정의를 논하는가! 내가 바로 정의다!” 라고 말한 뒤에 만신전을 등졌다고 했는데.”
암살단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전부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역시. 나는 진작부터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어.”
“수장님 정도 되는 강자라면 전직 이단 심문관 수장이었어도 이상하지 않지.”
“크으. 내가 바로 정의다! 너무 멋있습니다 수장님!”
암살단원들의 초롱초롱 빛나는 경애의 눈빛에 에샤의 몸이 굳었다.
‘뭐, 뭐? 만신전에서 파문이라고? 내,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17살 소년에 불과했다.
남들보다 산을 조금 잘 타고, 동물을 조금 잘 잡는 그런 소년.
거기에 ‘천칭’이라는 조금 특이한 물건도 있고, 암살검이라는 신기한 검도 있지만…
‘……어?’
거기서 에샤는 문득 깨달았다.
‘나… 더 이상 평범하지 않나?’
에샤가 평범한 소년으로 불리는 날이 있다면 아마 그날은 대륙이 멸망한 날일 것이다.
모든 17살 소년이 죽고 에샤 혼자 남은 것이 분명할 테니까.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추억의 메이플이라거 하지만,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베일을 걷어내면 그 안에는 미친듯이 매콤한 사냥 노가다가 가득하답니다…! 추억은 추억으로 둘때 가장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네요…!!
하나하나 개꿀잼 에피소드가 늘어가는 만신전의 역사책… 후대들은 이걸 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요…!!
??? : 이게 정사라고?? 아무리 봐도 야사인데?? 어? 교차검증을 해도 똑같다고?? ….뭐지, 진짜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