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평범 호소인 ( 3 )
“……핫…”
지상에서 5호라고 불리던 소녀는 번쩍 눈을 떴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사방을 둘러보니 삭막한 흙 내음과 이름 모를 나무, 퀴퀴한 날짐승의 악취와 뜨거운 돌이 가득했다.
“……지상……?”
5호는 이곳이 지상이라는 것을 빠르게 인지했다.
차원 이동의 여파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다가 가까스로 마지막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으, 으음… 그러니까.”
신께서 아르시기를.
<두려워 말라. 너희를 내치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었으니 너희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아이야테르 산에 얽힌 10년 전의 비사를 헤아려라.>
아이야테르 산, 10년 전, 비사를 헤아려라.
몇 번이고 달싹이며 산의 이름을 기억한 5호는 벌떡 일어나 주변의 동족들을 살폈다.
“………으에에, 엑… 막내야아아아……”
“키하아아악… 비, 빛이…… 성스러운 태양이……내, 누운…!”
꼴사납게 주변을 나뒹굴고 있는 동족들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더라. 심지어 로드라는 작자마저도 햇빛을 피하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5호는 동족들의 뒷덜미를 질질 잡아끌어 가까운 그늘에 던졌다. 갑작스레 햇빛을 받아 심신 미약 상태에 빠졌던 동족들이 천천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5호는 가볍게 한 바퀴 돌며 주변을 정찰했다.
‘여기는 도대체…’
돌, 바위, 바위, 그리고 가끔 이끼와 나무.
터무니없이 황량한 돌산이라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뭐 하는 산인지 알 수 없었다.
5호의 기억에 없는 걸로 봐서는 일단 성도 주변에 있는 산은 아니었다.
“……으, 아응…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막, 내야…? 이게 도, 도대체 무슨… 일이니?”
5호가 다시 돌아올 때쯤에야 정신을 차린 동족들이 5호에게 상황을 물었다.
성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니, 동족들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아아아아…… 흐, 흐윽…”
“우으으으… 너, 너무 놀았나 봐…”
“우, 우, 우리 쫓겨난 거야……?”
그간 성지에서 별다른 위협과 의무 없이 탱자탱자 노는 생활을 만끽하다가 갑자기 지상으로 떨어졌으니 그 박탈감이 어마어마했다.
로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그렇게 된 것이군……”
다만 로드라는 자리를 허투루 해 온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지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에서 헤어 나온 로드가 일족을 추슬렀다.
“모두 들어라. 하나 된 분께서 우리를 내치신 것이 아니라 하셨으니… 그분께서 말씀하신 아이야테르 산이라는 곳에 얽힌 10년 전의 비사를 조사하면 우리는 다시 성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한 일족의 수장다운 냉철한 판단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정작 신께서는 그들을 다시 불러올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야테르 산이라는 곳을 찾아야 한다…”
실로 타당한 지적이었다.
로드와 눈이 마주친 동족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천생 은둔형 외톨이, 아이야테르 산이라는 지명도 오늘 처음 들었다.
“저도 잘……”
믿고 있던 유일한 희망 5호마저 고개를 저었다.
로드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결국 발품을 팔아 정보를 구해야 한다는 소리였고, 이는 밤의 일족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런가. 우선… 정보를 수집해야겠구나.”
밤의 일족은 그대로 주저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딱히 태양 아래를 돌아다녀도 예전처럼 타들어 죽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들은 그냥 밝은 것이 싫었다.
그렇게 태양이 저물고 어둑한 밤이 되었을 때야 밤의 일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아. 가라. 아이야테르 산을 찾아라!”
로드의 손짓에 밤의 일족 수십이 붉은 안광을 빛내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둠을 틈탄 수십의 밤의 일족이 빠른 속도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야테르 산……!”
“10년 전의 비사를 조사…!”
그 모습을 보며 5호는 감격에 빠졌다.
‘이, 일족이……! 우리 일족이 이렇게나 의욕 있게 움직일 수 있다니!’
맹세할 수 있다.
지금 밤의 일족은 5호가 태어난 이래 가장 열정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원동력이 다시 성지로 돌아가 뒹굴뒹굴 꿀을 빨겠다는 다소 그릇된 망념이었지만.
어쨌든 밤의 일족이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세상을 울릴 거인의 발걸음이었다.
치타가 달리기 시작했다.
지상에 있는 인간과 오크, 엘프와 인어, 수인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무리 달려봐야 밤의 일족 앞에서는 결국 한낱 범부에 불과했다.
“……! 마, 마, 마을! 마을이 이, 있어요……!”
“으히이이익! 사, 사, 사사사사람이! 사람이 있어어어……!!”
“누, 누가 가서 아, 아, 아이야테르 산이 어디있냐고 좀 무, 물어봐…!”
“…낯선 사람에게 마, 말을 걸으라고…? ………쉽지 않음.”
치타가 주저앉았다.
마을에 도착한 밤의 일족은 사람의 기척에 덜덜 떠는 달팽이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지에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만끽하다 보니 대인 기피증이 더욱 심해졌다.
5호가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5호가 늠름하게 앞장섰다.
무턱대고 아이야테르 산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는 그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5호에게는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우선 만신전으로 가죠.”
그녀의 오랜 일터이자 두 번째 고향, 만신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 *
만신전은 하루하루가 바쁨의 연속이었다.
가장 최근에 터진 ‘천칭’과 암살단의 에샤를 제외하고도, 만신전이 손봐야 하는 일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우선 성도에 자리 잡은 수인과 오크, 인간의 생활 민원을 조율해야 했다.
“수인들이 또 털갈이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런 하나 된 분 맙소사! 그들은 일 년 내내 털갈이하는 건가?”
“오크들이 콧구멍에 자꾸 털이 들어간다고 난리입니다! 조금 더 있으면 단체로 폭동이 일어날 거예요!”
“마스크라도 보급해! 당장! 털갈이하는 수인들한테는 전용 빗 나눠주고!”
담당자가 부랴부랴 마스크를 들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거리에는 다른 오크보다 머리가 두 개는 큰 오크가 잔뜩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털, 털, 털!! 이 망할 털복숭이드으으으을!!!”
쿵쿵, 커다란 몸짓으로 땅을 구르는 오크는 한스를 따라온 전(前) 오크 족장이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뛰어난 농부였지만.
“자, 자아. 우선 진정하시고… 예? 여기 마스크를 드릴 테니까 급한 대로 이거라도 좀 쓰고 다니세요.”
담당자가 진땀을 흘리며 말렸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는 전 족장 오크. 결국 한스가 달려와 오크를 말려야 했다
“너 내가 또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둔다고 했을 텐데!”
한스의 으름장이 터지자 고래고래 난동을 부리던 오크가 꼬리를 말았다.
“크우어어어어… 냬가 한스 때장을 봐서 이번은 챰지만!! 또 내 눈앞에서 털을 냘리면! 네 가죽으로 모피 외투를 만들꼣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오크의 옛날 말투까지 튀어나왔다.
마스크를 착용한 오크가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구경꾼들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닌지 태연했다.
담당자가 한스에게 꾸벅꾸벅 허리를 접으며 감사를 표했다.
“한스 사도님,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아, 아뇨. 오히려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제가 더…”
한스가 아니었다면 저 오크를 달래는 것에 반나절은 더 걸렸으리라.
성난 오크 달래기는 만신전의 일과에 지나지 않았다.
만신전은 주기적으로 프리우스 후작의 수인 애호 동호회를 반려해야 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째서 동호회 신청서가 또 반려된 겁니까?”
“…그으. 후작님. 실례지만 이 동호회의 구성분들은 전부, 그…”
“저희는 순수하게 수인들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털의 아름다움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담당 공무원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프리우스 후작이 들고 있는 검은 지팡이는 신께서 주신 것이라 하더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은 품격이 가득하다. 몰론 후작 본인도 절제와 품격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늑대 귀 머리띠를 쓰고, 늑대 꼬리 모형을 허리에 착용하지만 않았다면.
담당 공무원은 애써 고개를 돌려 프리우스 후작을 못 본 척했다.
어떻게 된 사람이 처음에는 취향을 숨기려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날이 갈수록 뻔뻔해진다.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참 화려하군.’
제국의 명망 높은 법조인과 거대한 상단의 주인, 유망한 기사단장과 거대한 용병대의 단장 등등… 구성원만 보며 어딘가의 로열 클랜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상부에서 절대로 허가해주지 말라고 했지.’
프리우스 후작은 폭탄이다.
수인과 관련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그런 사람을 비슷한 취향의 거물들과 모이게 두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쿵, 공무원은 동호회 신청서에 큼지막하게 반려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프리우스 후작의 14번째 동호회 신청이 무산됐다.
이와 더불어 만신전은 저 멀리 남쪽 끝의 땅에서 시작한 어인족의 결혼 사업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아. 이번에 어인족 맞선에 신청하신 분이군요. 혼례식을 올리러 오셨나요?”
“네!”
“키히야아악!”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어인과 인간의 맞선 전용 텐트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제법 높은 확률로 연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어인의 저주가 풀린 인어라면 모를까, 어인의 외모는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하루에 적어도 열다섯 쌍의 연인이 만들어졌으니.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성이 두렵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래도 극한에 다다른 인간의 가능성 덕분에 어인족의 해주 작업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에 어인족의 해주가 끝날 예정이었다.
설명한 것을 제외하고도 만신전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다.
사소하게는 오크가 부순 도로의 정비부터 시작해서, 큼직하게는 제국과 주변 왕국에 있는 수인과 오크의 인권 보장까지.
“크, 큰일입니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온 수습 사제의 얼굴이 창백했다. 커다란 방 안에는 50명에 달하는 선임 사제들이 시체처럼 일하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서류를 작성하던 선임 사제 한 명이 다 죽어가는 말투로 대꾸했다.
“…뭐야. 뭔데… 또 무슨 일이야. 이번엔 오크야? 수인? 아니면 어인?”
수습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선임 사제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건가?
허나 수습 사제의 표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 무섭고, 두려운… 자신들의 끔찍한 미래를 엿본 예언자의 그것이었다.
“에, 엘프… 엘프 대장로가 만신전에 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우당탕, 벌떡 일어난 선임 사제의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무도 의자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수습 사제에게 향했으니까.
“너, 너 임마! 장난 치지 마…! 진짜 재미없어. 진짜 재미없다고…!”
“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엘프 대장로? 엘프? 엘프라고? 에스텔 씨랑 종족이 같은 그 엘프? 대장로가 만신전에 왔다고? 어? 어어? 왜, 왜? 도대체 왜?”
엘프들이 성지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발리안과 셰이드의 탐험대를 통해서 인지는 하고 있었다.
대사제를 비롯한 상부에서는 성지에 대한 증언을 받을 생각에 군침을 흘렸는데, 애석하게도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반대를 펼쳤다.
지금도 업무에 깔려서 기절하다 깨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하는데, 여기서 엘프까지 조사하라고?
차라리 나를 죽여라!
결국 상부에서 뜻을 꺾었다.
그들이 봐도 참으로 비인간적인 업무의 연속이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만신전의 행정이 정상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엘프의 대장로가 직접 찾아왔다?
직접? 제 발로 와버렸네?
산더미 같은 서류가 데굴데굴 굴러서 쿵, 하고 책상에 올라온 격이다.
“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 어서 거짓말이라고 해! 응…? 제발, 제발… 지금이라도 거짓말이라고 해줘…”
“흐하! 흐하하하하핳! 엘프가! 그것도 대장로가 직접 왔네! 나중에 조사하자고 했던 엘프가! 그것도 직접!! 흐어어엉… 우린 망했어…! 망했다고!!”
선임 사제들의 오갈 곳 없는 광기를 마주한 수습 사제가 덜덜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또 너무나 비극적이게도 수습 사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 정말입니다… 지, 지금 엘프의 대장로 알랜시아라는 분께서 대, 대사제님들과 이야기 중이라고 합니다. 소식을 들은 에스텔 씨도 급하게 성도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어억.”
쿵,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선임 사제가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 사제들은 쓰러진 이에게 기계적으로 신성력을 퍼부으며 치료했다. 서류 작업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는 곧 있으면 깨어나 다시 차가운 현실을 마주할 것이다.
쓰러진 사제의 책상에는 가득 쌓인 서류와 양피지, 차마 잉크가 마르지 않은 종이가 가득했다. 그 높이는 얼추 확인해도 성인 남성의 어깨쯤.
‘날 죽여라…!’
도대체 얼마나 업무가 생길 것이며, 얼마나 애매하고 난해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인가.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단체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놀라운 현상을 공유했다.
벌어진 일과 벌여놓은 일은 수두룩하게 많은데 온 사방에서 일이 쏟아진다.
업무가 업무를 낳고, 찾지도 않은 일이 알아서 굴러오는 참으로 일복 터지는 상황!
참으로 불행하게도 이들의 고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쾅!
또 다른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방 안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불과 조금 전에 있었던 기시감이 그들의 등골을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어젖힌 것은 붉은 곱슬머리를 아름답게 나부끼는, 꿀 색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케니스가ㅡ
“바, 밤의 일족이 돌아왔어요 여러분!”
어째서 그 소식을 무려 용사님이 전하는 것인지, 왜 하필이면 지금 밤의 일족이 돌아온 것인지.
업무에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단 하나.
‘아.’
신께서 그들에게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내렸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아앗…!! 왕왕 후원…!! 감사합니다…!! 노벨피아에서 후원 메시지를 삭제했더군요…!! 하나의 소통 창구가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을 감출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정말 아쉽네요…!! 재밌게 봐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