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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8

       영원할 것 같던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하나의 겨울이 가고, 새로운 겨울이 왔다. 지난번 겨울에 비하면 아늑하고 포근하며 따스한 날씨였다.

       

       비단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리라.

       

       “18번에 4번, 19번에 1번, 20번에 3번…….”

       

       성현의 시험지에 함박눈이 내렸다. 마찬가지로 그의 입에는 열띤 웃음이 꽃피었다.

       

       “36번에 2번, 37번에 2번, 38번에 2번, 39번에 2번, 40번에 2번, 41번에 2번.”

       “아니, 잠깐. 진짜로?”

       “진짜로.”

       “하….”

       “왜, 틀렸어?”

       “…….”

       

       성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냐. 다른 것도 채점해 봐야지. 그나저나 이 새끼들 정답 배치를 뭔 이따구로….”

       “다 맞았어.”

       “어?”

       “다 맞았다고.”

       “아, 이 새끼가.”

       

       에테르는 성현의 어깨를 잡고 꾹꾹 눌러댔다. 헤드락도 걸었다. 성현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기만자 새끼. 사람 간담 서늘하게 하고 있어.”

       

       지난 1년간 사제 관계로 시작한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 툭툭 때리고 맞을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사실 1년이면 원래의 버멜과 에테르의 관계로 돌아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에테르가 기억을 잃었더라도 그녀는 다시 성현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하마터면 1년 더 할 뻔했네.”

       “단언컨대 그럴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나. 이렇게나 좋은 선생님을 뒀는데.”

       

       동시에 그녀는 성현의 둘도 없는 멘토였다.

       

       아렌스 대륙에 처음 떨어져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태연은 에테르로서 아렌스 대륙에 적응했다.

       

       에테르가 지닌 삶의 방식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신체가 달라져도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유지하느냐. 비슷하지만 다른 자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여인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정하지 않았다. 믿는 것을 보는 게 아닌, 보는 것을 믿었다.

       

       과학자의 태도였다.

       

       성현은 그런 태도를 지닌 에테르를 버멜로서 쫓아갔다.

       

       “입학하면 랩실 컨택부터 해야겠군.”

       “1학년부터 컨택을 하겠다고?”

       

       에테르가 킥킥 웃었다.

       

       하지만 성현은 진심이었다.

       

       눈앞의 여인에게 배우면서 어느덧 자신도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치기 어린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학에 가서도 똑같은 멘토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야, 아무튼 탐구까지 제대로 다 맞춘 거지?”

       “누가 들으면 수능 만점인 줄 알겠어.”

       

       에테르와 성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만점까진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높은 점수임은 확실하다.

       

       장담컨대 서울대 정문 폭파는 물론이요, 중위권 의예과도 쓸 수 있을 성적일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슬슬 돌아가야겠군.”

       

       언제까지고 지구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테르는 정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세상을 꾸준히 주시하며 관리해야 한다. 전쟁이 터지지는 않는지, 마왕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

       

       집정관 업무를 맡은 로즈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저 왔어요.”

       

       때마침 술파티를 벌이고 온 로즈마리가 돌아왔다. 비척거리며 구두를 벗는 모습이 확실히 취했구나 싶었다.

       

       그 곁에서 똘망똘망한 인상의 여인이 로즈마리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말간하늘’이라는 닉네임으로 방송하는 대기업 스트리머, 유하늘이었다.

       

       버멜에게 에테르라는 인생 멘토가 있듯이, 유하늘에게는 로즈마리라는 방송 멘토가 생겼다.

       

       어느덧 유하늘이 로즈마리와 합방한 지도 스무 번이 넘어간다.

       

       예술에 대한 로즈마리의 재능은 비단 클래식한 예술뿐만 아니라 모던 엔터테이먼트에서도 꽃을 피웠다.

       

       이른바 방송 천재.

       

       빵빵 터지는 로즈마리의 컨셉 플레이와 닼아의 지속적인 업데이트 덕에 하늘은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오늘 합방도 즐거웠어요. 그… 보호자 분 계신가요?”

       

       유하늘의 부름에 에테르가 재빨리 움직였다. 술에 취한 허접베리를 인수인계 받은 에테르는 유하늘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렌즈는 아직도 끼고 계신 건가요?”

       “말간하늘 님이 오실 걸 알고 미리 끼우고 있었죠.”

       “아하….”

       

       에테르의 외모는 지구 기준으로 이상한 편이 아니다. 눈만 노란색일 뿐이지.

       

       예전에 하늘이 왜 렌즈를 끼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에테르는 ‘동생이 코스프레를 하는데 산 렌즈가 멋져서 어느 순간부터 쓰게 됐다’라고만 답했다.

       

       그 때문에 의심의 싹이 있었지만, 하늘은 그것을 나무로까지 쑥쑥 키워내진 못했다. 덕분에 정체를 들키는 일은 없었다.

       

       “예전부터 봐 왔지만 정말 아름다우세요. 코스프레가 취미이신 건가요?”

       “렌즈만 끼면 되는데요 뭘. 단순히 패션으로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 수험생 과외는 잘 끝내셨고요?”

       “네. 수능도 끝났으니 이제는 자유인 몸이네요.”

       “앗, 그러면…!”

       

       하늘의 안색이 화사한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해진다.

       

       이전에 에테르를 다시 만났을 때 합방을 제의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에테르는 김성현을 핑계로 거절했다.

       

       수험생 과외를 해 준다고 하길래 하늘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런 명분마저도 사라졌다.

       

       “저희 셋이서 합방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하늘이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실망스러운 대답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남들 앞에 얼굴 비추는 걸 싫어해서요. 양해해 주시길 바랄게요.”

       

       에테르가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즈마리를 통해 방송의 심연을 엿보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곧 휴가 기간이 끝나가기 때문이다.

       

       김성현 한 명으로도 벅찬데, 괜히 인간관계를 넓혀서 좋을 것 없었다.

       

       아쉽지만 방송 제의는 거절이다.

       

       “이 아이와는 달리 말주변도 좋지 않아요. 얼굴 비추는 것 외에는 그다지 화제성도 없을 겁니다.”

       “그런가요…. 아쉬워요.”

       

       하늘이 두 손을 꼭 모으며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생각이 바뀌시면 블루베리 편으로 말씀 드려주세요. 제가 꼭 모셔올 테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에테르와 로즈마리는 하늘을 1층까지 배웅했다. 하늘이 로즈마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로즈마리도 피식 웃으며 따라 흔들어 주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늘의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로즈마리가 짐짓 입술을 달싹이며 한숨을 쉬었다.

       

       “저 인간에게 좋을대로 이용만 당했네요.”

       “그래서 싫어?”

       “놀아준 거죠.”

       

       합방할 때마다 천만원 단위로 돈이 꽃히던 로즈마리였다. 하늘이 딱 로즈마리의 지분만큼 공제해서 수익을 나눠 준 것이다.

       

       덕분에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었고 여름에는 진짜 바캉스도 갔다.

       

       이 지구에서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못 쓰고 남은 돈이 수억이지만 전부 성현에게 기부하기로 했다.

       

       로즈마리가 쌉싸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쯤 돌아갈 건가요?”

       “저 녀석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까진 보고 가야지.”

       “언니는 참, 쓸데없는 곳에서 성실하시군요. 저런 인간 한 명 보살펴 주는게 뭐라고…….”

       “쟤가 없었다면 코인이고 방송이고 우리는 쭉 불법체류자 신세였을 텐데?”

       

       그리 말하니 로즈마리도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까맣게 있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들어가요. 파티 준비나 하자고요.”

       “……그러자.”

       

       

       **

       

       

       결과적으로 성현은 수능에서 올 1등급을 받았다. 물리2에서 마지막 문제를 찍어 맞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운도 실력이 있어야 받쳐준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무튼 이 다음의 이야기야 뻔했다.

       

       [서울대학교 / 정시모집 최종합격자 발표]

       

       [성명 : 김성현]

       

       [합불사항 : 합격]

       

       “부, 붙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되니까 실감이 안 났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던가.

       

       게임 랭킹 1등이라는 이유로 잡혀 가서, 마왕을 잡고, 다시 돌아와서, 이런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보답받은 것이다.

       

       성현의 뺨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 씨, 사내 새끼가 우는 거 보니까 밥맛 떨어지네.”

       

       배달앱을 켠 채 시간만 죽이던 에테르가 핀잔을 주었다. 곁에 있던 로즈마리도 박수를 쳐대며 깐족거렸다.

       

       합격한 것 때문에 기뻐서 나오는 눈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달리 있지 않은가?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치킨 시키고. 회 시키고. 피자? 치킨이 있는데 굳이 피자를 먹어야 할까?”

       “피자랑 치킨 같이하는 집 있잖아요. 거기서 시키면 되죠. 아, 서비스로 나오는 스파게티는 로제로.”

       “술은 막걸리 하나에, 브랜디 두 병, 맥주는 적당히 여섯 잔 정도…….”

       “마지막이잖아요. 깨작깨작 주문하지 말고 통 크게 쏘자고요.”

       

       금안족 자매의 도움으로 성현은 억대 부자가 되어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7억짜리 집 하나를 보유. 여기에 자가용은 유명 회사에서 만든 7천만원짜리 세단이다.

       

       제산세 자동차세 폭탄이 예상되겠지만 그 분량의 자금도 로즈마리가 미리 벌어다 놓았다.

       

       여기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학벌까지 손에 넣었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버멜은 이 모든 것을 크나큰 보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띵동!

       

       “야, 배달 왔다. 빨리 가서 가져와.”

       “네넹.”

       

       로즈마리가 현관까지 슬라이딩하는 동안, 에테르는 직접 술상을 마련했다.

       

       집의 크기와는 달리 협소한 탁자였다. 그 위로 온갖 종류의 술과 음식이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졌다.

       

       자그마치 20첩 반상. 풀세트를 마주한 성현의 눈이 뒤집어졌다.

       

       “뷔페도 아니고….”

       

       이걸 하루 안에 다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뒀다가 나중에 먹으면 탈 나는 음식도 더러 있었다.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 듯 금안족 자매는 맥주 캔을 땄다.

       

       이번에는 단순히 캔맥주도 아니다.

       

       고급 주점에서 직접 칠링한 유리잔이다. 여기에 아이스큐브까지 넣어 시원 쌉싸름한 맛을 극한까지 살렸다.

       

       꼴꼴꼴. 잔을 따르는 부위마다 성에가 생겼다.

       

       “건배.”

       “건배!”

       

       에테르와 로즈마리는 빈속에 술을 들이켰다. 술에 약했던 금안족 자매는 한 잔만에 눈이 풀렸다.

       

       성현도 한 잔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얼음과 사이다를 꺼냈다.

       

       이번에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이볼. 증류주에 탄산수를 섞어 만든 술이다.

       

       탄산수 대신 사이다를 넣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형성되어 술에 약한 사람이라도 가볍게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떤 위스키를 고를까 고민하던 버멜은 맥주 캔을 하나 더 땄다.

       

       다른 게 아니라 산 것 중에서 도수가 가장 낮은 게 맥주였다.

       

       “오… 김성현 씨. 헨리의 법칙 시연하시나요?”

       

       에테르가 헤실거리며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이 와중에도 과학 얘기라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푸핫!”

       

       로즈마리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볼 마는데 위스키를 따야지. 누가 맥주를 사이다에 말아? 이거 완전히 웃기는 놈이네요. 그렇죠, 언니?”

       “글쎄에다아.”

       

       에테르는 술에 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평소에는 입에도 안 대고, 주면 주는 대로 마시는 스타일이다.

       

       “한 번 먹어보고 얘기해.”

       

       성현은 라이트 하이볼을 말아 에테르에게 건넸다.

       

       맥주와 사이다가 만나 톡 쏘는 기포와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여기에 레몬을 하나 꽃아 술잔을 장식한다.

       

       알코올에 약한 에테르를 위한 슈퍼 술찔이 술이었다.

       

       “캬아… 이거 좋네. 색깔도 예쁘고.”

       

       에테르의 극찬에 로즈마리도 한 모금 마셔보고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노란 빛에 톡 쏘는 맛이 꼭 우리 금안족을 위한 것 같지 않나요?”

       “흐흐…….”

       “큰일이다. 언니가 취했어.”

       

       로즈마리가 몸을 못 가누는 에테르를 부축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죠. 하이고, 언니. 완전히 맛이 가버리셨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하늘을 통해 어느 정도 단련된 로즈마리와는 달리, 에테르는 거의 3년만에 술잔을 기울이는 꼴이다.

       

       술을 마시면 늘지만, 반대로 안 마시면 약해진다.

       

       에테르는 해롱거리기 바빴다.

       

       그런 그녀도 두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먹고 마신 탓에 몽롱했다.

       

       어쨌거나 회포를 더 풀 것도 없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로군.”

       

       성현의 몸이 바짝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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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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