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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99

       “성현, 아니. 버멜.”

       

       취기에 젖어 탁하게 풀려 있었던 에테르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마치 이전까지 취했던 건 연기였다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반쯤은 연기이긴 했다. 혹여 상대방이 눈물을 보이더라도 모르는 척 넘어가게 해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젠 정말로 시간이 다 되었다.

       

       “기억은 안 나는데 너와 친했다는 건 알겠더라. 그동안 네가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가 그 증거였어.”

       “…….”

       “어찌 됐건 원점으로 돌아왔네. 이번만큼은 나도 너를 다시 기억하고, 너는 나를 두 배로 기억하겠지.”

       

       그동안 쑥쓰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내 늘어놓는다. 이 또한 취기로 인한 변덕으로 기억되리라.

       

       전부 가슴에 묻고 가야 할 추억이다.

       

       “이제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너도 알잖아? 나와 로즈마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어, 언니? 그 말을 하면…!”

       “하지만 너도 한때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그러니까 말해줘도 돼. 떠벌릴 생각은 결코 없을 테니까.”

       

       맥주를 너무 마신 탓일까? 속이 답답하다.

       

       성현은 이를 사리물었다.

       

       “1년 동안 우리 신분을 보장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좋은 휴가가 되었네.”

       

       그래, 어쩌면 이것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또 다른 극을 지닌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지구인은 지구인과 인간관계를 맺고, 아렌스 대륙인은 대륙인끼리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에테르는 성현과 영원히 함께할 수가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도 열심히 살 길 찾아봐. 이 다음부턴 무얼 하든 네 마음대로니까.”

       

       어느덧 에테르의 눈동자에는 이지가 가득 차올랐다. 무덤덤한 표정. 그러나 짐짓 아쉬운 얼굴이다.

       

       두 금안족은 서로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성현의 고개가 살짝 위를 향했다.

       

       곧 성현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입을 비죽이며 오연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로즈마리와 에테르의 눈매가 같이 가늘어졌다.

       

       “기억이 안 난다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느니…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네. 큭, 둘 다 취할 대로 취했구만.”

       “…….”

       “이상한 소리 말고 취했으면 얼른 들어가서 자. 여긴 내가 청소하고 있을 테니까.”

       

       오히려 그 말을 듣자 에테르의 얼굴이 쓰게 변한다. 그녀는 장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쐈으니까 뒷정리는 네가 하는 거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

       

       에테르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성현은 하이볼 몇 잔을 더 말아 들이켰다. 그마저도 부족해서 위스키와 브랜디를 까고 번갈아 마셔댔다.

       

       취기가 끝까지 올라 하늘이 싯누렇게 보일 지경이 되었다. 달뜬 한숨을 쉬자 알코올 향이 섞여 나왔다.

       

       빚더미에 나앉은 가장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술상을 정리하고 설거짓거리를 싱크대에 투척했다.

       

       짤그락.

       

       “…3점 슛.”

       

       들썽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품에서 담뱃갑은 만져지지 않는다. 에테르를 만난 이후로 아예 끊어버렸다.

       

       성현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방으로 향했다. 에테르와 로즈마리가 침실로 쓰는 그 안방이었다.

       

       “잘 자고 있는지 모르겠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다섯 평짜리 고즈넉한 안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자고들 있네.”

       

       방 한쪽에는 컴퓨터, 그와 맞은편에는 큰 사이즈의 침대가 하나.

       

       그리고 그 둘 사이로는 1m가 넘는 책의 탑이.

       

       “…….”

       

       쌓인 책은 하나같이 전공서적이었다.

       

       우선 맨 위에 놓인 일반물리학과 일반화학, 미분적분학 서적이다. 그 밑으로 갈수록 책의 난이도가 높아졌다.

       

       각각의 책마다 노란 포스트잇이 하나씩 붙여져 있었다.

       

       성현은 가장 위에 놓인 일반물리 책 두 종을 집어들었다.

       

       [일반물리는 물리1 물리2 제대로 했으면 쉽게 공부할 수 있어. 물론 전자기학은 조금 어렵긴 하겠지만….]

       

       [보통 이렇게 두 종류가 있거든? 한쪽은 양이 많은데 설명이 간결하고, 다른 한쪽은 초심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쓰여 있어. 두 권을 번갈아 보면서 공부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성현은 책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일반역학 책 두 권. 전자기학 책 세 권. 양자역학 책 다섯 권….

       

       [이거 진짜 최고임. 인터넷에 무료로 된 원서도 있으니까 영어로 공부하고 싶으면 찾아봐.]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가 쓴 빨간 책까지.

       

       여기에 맨 마지막에는 기타 조언도 알려주고 있었다.

       

       [공부하다가 모르겠으면 인터넷 찾아봐. 오픈코스라고 해서, 대학에는 무료 공개강의도 많거든.]

       

       포스트잇을 하나씩 읽어나가던 성현의 눈이 가늘게 떨려왔다.

       

       어느덧 마지막 포스트잇이었다.

       

       [교정에서 봅시다. – 이태연 배상]

       

       이날 성현이 살던 아파트에는 층간소음 신고가 여덟 건이나 접수됐다.

       

       

       **

       

       

       – 너희 그거 들었어? 우리 과 과탑 말이야. 사실 게이라는 소문이 있대.

       – 정말로?

       – 그렇다니까? 1학년 오티 때부터 이 교수님한테 엄청 달라붙었잖아. 내가 볼 땐 말이지…….

       

       쾅!

       

       “아니, 우리 과 애들이 맨날 나보고 뒤에서 게이게이 거린다니까?”

       “게이.”

       “야 이 개새끼야.”

       “슈퍼 게이.”

       “흐지믈르그…….”

       “에놀라 게이.”

       “씹!”

       

       성현의 지랄 발작을 보며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존나 웃겨서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교수님, 알잖아요. 나 여자 좋아하는 거.”

       “뭐야. 그거 위장연애 아니었어?”

       “하아.”

       

       계속 몰아붙이자 눈이 휑뎅그렁해진 성현. 학부생인데도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대학원생 감이긴 하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 청년의 풀네임은 김성현.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물리학전공 3학년.

       

       전공과목마다 올 A+을 받는 과탑이자, 연구실 시다바리도 아랑곳하지 않는 천하의 노예… 가 아니라 기재다.

       

       이 이상 놀려 먹으면 분위기가 싸해질 것을 알았기에 나는 적당한 선에서 제자를 위로해줬다.

       

       “알지. 걔들도 그냥 장난으로 하는 거라니까? 뭘 그리 화를 내고 앉아있어.”

       “옛날에도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래.”

       

       성현과 나는 나이 차이가 거의 안 났다. 내가 일찍 교수에 임용된 것도 있었지만, 성현이 대학에 뒤늦게 입학한 탓도 있었다. 그 때문에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다.

       

       아니, 사실 형님 아우도 아니고 그냥 말 놓는 수준이지. 친구나 다름없다.

       

       “진짜 한번만 더 놀리면 다른 랩실로 들어간다.”

       

       그런 성현의 말에 나는 석고처럼 몸을 굳혔다.

       

       아직 조교수 따리라서 주 90시간 근무가 강제되는 나였다. 심지어 아직 임용된 지 3년밖에 안 되어 실적도 적었다.

       

       대학원생 수급이 절실한 상황. 그런 마당에 3년째 과탑을 하고 있는 김성현은 최고의 인재였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깝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우리 학교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 아니던가. 과탑인데 영어 되고 스펙 좀 쌓으면 아이비리그도 노려볼 만하다.

       

       나는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국비 유학은 생각 없어?”

       “생각 없네요.”

       “다른 덴 생각 없고, 내 연구실에만 들어오겠다?”

       “저번에도 똑같은 말 했잖아. 그런다니까.”

       

       아니 썅. 이러니까 여학생들한테 게이라는 소리를 듣지. 무슨 대학원생이 랩실을 하나만 고려하냐고.

       

       다른 게 아니라 이유가 있었다.

       

       “일단 제가 하고 싶은 주제를 교수님께서 하시잖아요? 초고출력 레이저를 활용한 즉석 핵융합.”

       “흐음.”

       

       사실 이건 맞는 말이다. 현재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진짜 없단 말이지.

       

       이 말은 곧 나라에서 예산을 타먹는 것도 힘들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제가 볼 땐 이거 성공하면 무조건 노벨상 감이거든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쉽겠냐?”

       

       나도 연구에 성공한다는 장담은 못 한다. 어쩌면 평생 겉도는 연구만 하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런데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부인지 위로인지는 몰라도, 성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태연 교수님이라면 무조건 성공시킵니다. 이 기술 개발해서, 에너지 문제 다 해결하고 노벨상 받자고요.”

       “거 참 자신만만하네.”

       

       대체 얘가 무슨 자신감으로 성공을 예측하는 건지 모르겠다.

       

       “핵융합 발전은 거대과학이야. 2차대전 때 연합국이 원자폭탄 만들던 거랑 비슷한 얘기라고. 나 혼자 대단한 발견을 한다고 바로 상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알겠어?”

       “아니, 아니지. 제 말은, 우리 교수님이 장차 그 거대과학의 중추가 될 거라는 말이었죠. 입자가속기 다루는 사람 중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는 꾸준히 나오잖아요?”

       

       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차피 노벨상 같은 건 안 받아도 돼.”

       “아니, 왜?”

       “그런 거 노리고 물리학과 교수된 거 아니니까.”

       

       명예도 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겐 최우선 가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알맹이 있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잘 들어. 돈을 원하면 창업을 하고, 명예를 원하면 정치를 해. 그쪽으로 빠지는 게 효율이 더 잘 나오니까.”

       

       그리 말하며 캔맥주 한 잔을 더 땄다.

       

       이걸로 세 잔째. 슬슬 한계다. 보리로 빚은 술 주제에 존나 강력하구만.

       

       “그므는, 과학을 하면 뭐가 남는데?”

       “너도 알잖아 이것아.”

       

       나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지식.”

       

       다른 게 아니다.

       

       “지식을 원하는 사람이 과학을 한다. 돈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알았다는 게 중요하지.”

       “하, 이 사람 또 취했네.”

       “크으, 씨벌…. 이게 낭만이지. 양자역학 하나 딱 만들고, 반도체 기업들한테 가치 창출은 너희가 해라. 우리는 다음의 앎을 찾으러 떠날 것이니…….”

       “어떻게 술자리를 3년이나 가졌는데 이 사람은 술이 안 늘어? 아, 씨…. 주모! 여기 비닐 봉지 하나만 줘요.”

       

       이 이후로는 필름이 끊겼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다만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숙취가 너무 심해서 죽을 맛이었다. 결국 나는 이날 휴강을 때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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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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