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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사실 졸업식이라는 것은 종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감동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어차피 졸업해봐야 여전히 학생이라면 더.

       그래도 일반적인 졸업식에서는 앞으로 가게 되는 학교가 갈리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갈라지는 아이들은 그것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는 일도 종종 있기는 했지만— 학교법인 화영학원의 학생들에게 그럴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 학교에 다니는 처지에서 다른 학교의 시설이 탐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시설뿐만이 아니다. 면학 분위기부터 학교 주위의 환경, 그리고 교사진까지 아주 화려하게 포진한 이 학교를 굳이 벗어나서 다른 학교로 간다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이 학교에 낼 돈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아니, 그 학생의 부모들의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학교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졸업식에 나와서 앉아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크게 설렘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학교는 학교고 거기 다니는 학생들도, 부모들도 사람이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을 느낄 일은 거의 없더라도, 나름대로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거나, 앞으로 있을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장소는 거의 같은 곳이나 다름없지만, 아무튼 신분도 바뀌고 교복도 바뀌니까.

       

       중학교 교복을 입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 이렇게 생각하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은 이상한 것도 없었다.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었지만.

       

       다행히도 졸업식 전에 받은 안내문에 예사라가 다니던 반이 쓰여있었고, 나는 졸업식 후에 그녀가 다니던 반에 갈 수 있었다.

       

       담임의 별거 없는 일장 연설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모여 각자 친구들과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데, 정작 내 곁으로 온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흠.

       

       보통 악역 영애라면 그래도 양쪽에 끼고 다니는 떨거지 두 명 정도는 있는 법 아니었던가?

       

       중학생 때부터 셋이 함께 다니면서 패악질을 부리고 다닌다거나…… 하는 것이 클리셰였던 것 같은데.

       

       “…….”

       

       하지만, 내 주변에서, 담임 선생 주변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학생 중에,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

       

       설마 재계 서열 1위 그룹의 유일한 딸내미가 반에서 왕따라도 당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뭐, 나로서는 나쁜 것도 없다. 어차피 누가 와서 말을 건다고 해도 곤란하기만 할 뿐이니까. 기억도 나지 않는 학생이 말을 걸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

       

       나는 한동안 자리에 계속 앉아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 앉아있다고 득 볼 것도 없다. 나는 졸업장을 챙겨서 교실을 나갔다.

       

       “가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교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혜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아가씨.”

       

       양혜인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드르륵, 하고 문을 열자 그제야 교실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살짝 몰렸다. 하지만 내가 뒤를 돌아보자 다들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왜 그러냐고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겠지.

       

       나는 말없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 밖의 풍경도 비슷했다.

       

       부모님과 함께 온 학생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고, 오늘 일찍 끝났으니 어디라도 갈까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집이나 가야지.

       

       “…….”

       

       뭐, 아무리 그래도 졸업식에 사진 한 장 찍지 않는 것도 좀 그러니, 교문 앞에서 양혜인한테 한 장 찍어달라고 하자.

       

       *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교문 근처에 왔다. 그동안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이 학교에 예사라의 친구가 한 명도 없었을까?

       

       ……아니면, 혹시 예사라가 유진 그룹을 이어받지 못할 거로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아, 저, 저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내가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이미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검은 양복들이 튀어나와서 나와 나를 부른 아이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버렸다.

       

       “…….”

       

       아, 왜 친구가 없었는지 알 것 같다.

       

       누가 말 걸 때마다 이 지랄이었으면 친구가 없을 만했네.

       

       “저, 비켜주시겠어요?”

       

       내가 정중하게 말해봤지만,

       

       “저희는 아가씨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예사라가 학교에서 친구라도 사귀게 된다면 집안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으니까? 뭐, 아무튼 계모로서는 예사라의 인맥이 넓은 것 보다는 극도로 협소한 쪽이 더 좋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집 안에 처박아뒀던 것을 생각하면 예사라라는 인물 자체를 극도로 혐오했는지도 모르겠고.

       

       혹시 모르지. 같은 반 아이들, 혹은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돈을 뿌려서 예사라를 모른 척하라고 시켰을지도.

       

       현실이라면 말도 안 되겠지만, 고등학생이 죽이니 살리니 하는 내용이 나오던 아침드라마 풍 막장 스토리를 자랑하던 게임이 아닌가. 이 세계는 그 게임 속의 세상이고. 무슨 괴상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나는 딱히 악역 영애가 될 생각은 없다. 여주인공과 척을 졌다가는 그 여주인공과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에 따라서 죽거나 죽기 직전이 되거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될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건 주인공한테나 적용되는 거지.

       

       이름도 모르는 엑스트라한테 적용되는 법칙은 또 아니란 말이지.

       

       “메이드.”

       

       나는 검은 양복에게 다시 한번 부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뒤에 있던 양혜인을 불렀다. 나의 부름에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배꼽에 양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양혜인.

       

       “내가 알기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저택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예, 그렇습니다. 저택의 주인은 아가씨이십니다.”

       

       “당신, 이름이 뭐죠?”

       

       내 질문에, 나에게 등만 보이고 있던 검은 정장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회장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졸업식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몇 마디 나눈다고 세상이 뒤집히는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하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뒤통수를 빤히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뭐, 어느 돈 많은 사람의 호위 인력이 하나 준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뒤집히는 일도 없겠죠.”

       

       목뒤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침묵이 잠시 이어지고, 이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열렸다. 그래, 그래야지. 자꾸 사람 성질 긁으면 이렇게 악역이 되는 거야. 안 그래도 요즘 예민한데 진짜 확 잘라버릴까 보다.

       

       나는 뒤돌아선 경호원들의 얼굴을 한 번 쓱 훑어본 다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경호원들에게 조금 겁먹었는지, 손에 스마트폰을 든 채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녀는,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아니, 예뻐서 빛이나 보인다거나 성격이 너무 밝아서 손전등 대신 써도 되겠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저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혹시 이쪽 세상에는 얼굴에 바르면 빛이 나는 화장품이라도 있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다가, 나는 아직 나의 ‘육감’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니까, 저 아이의 얼굴에서 빛이 나 보이는 이유는, 아마 저 아이에게 내 육감이 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양 갈래로 묶은 금발, 크고 예쁜 눈, 그리고 조금 소심해 보이는 태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금발에 트윈테일은 ‘if you wish’의 한 여자 캐릭터가 하고 다니는 헤어스타일이었으니까.

       

       사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스트리머가 저 캐릭터를 보고 ‘인간 카피바라’라고 불렀던 것이 너무 인상 깊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도 모두 본명보다는 인간 카피바라라고 불렀고.

       

       저 아이는 미친 친화력을 바탕으로 교내의 정보란 정보는 다 꿰고 있는, 미연시에 흔히 등장하는 ‘정보 물어다 주는 동성 캐릭터’의 역할을 하는 아이였다.

       

       주연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미, 취향 같은 것을 건너 들어 게임상에서 팁으로 알려주는 아이였는데, 이 게임에서는 이 아이도 공략 대상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취향은 잘 꿰고 있어도 본인의 취향 같은 것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공략이 어렵다…… 라고 위키에 적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쟤가 나한테 무슨 이유로 말을 걸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카피바라 같은 본능이 또 발동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내의 모든 이를 친구로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다. 일단 후에 여주인공의 최측근이 될 인재였고, 교내의 정보를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듣고 다닌다는 점에서 내가 정보를 얻기도 편한 상대였으니까.

       

       “무슨 일이야?”

       

       조금 겁먹은 것 같은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물어보자, 그때까지 굳어있던 그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현실로 돌아왔다.

       

       “아, 어, 저기…….”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지, 아이는 옆으로 비켜선 경호원들을 흘끔거렸다.

       

       “저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말하면 되니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렇게 말했더니, 그 금발 트윈테일의 아이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 그, 사, 사, 사, 사……”

       

       사……?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으면 안 될까!?”

       

       너무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래, 그럴 거 같더라.

       

       “사진?”

       

       하지만 나는 일단, 이 아이를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다. 당연히 다짜고짜 함께 찍자고 하는 것은 조금 그랬다.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더라도 모른 척하는 쪽이 자연스럽겠지.

       

       “으, 응. 학교 다닐 때, 가끔 멀리서 보였는데 너무 멋져 보여서……. 졸업하기 전에 사진 한 번만 찍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참,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솔직함이었다.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네.

       

       하긴, 예사라의 실제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미소녀가 되기는 했다. 누가 봐도 아가씨라는 분위기가 있었으니, 저렇게 동경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웃음을 꾹 참고 있으려니, 내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그 푸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말했다.

       

       “여, 역시, 조금 그렇지?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이렇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면—”

       

       “좋아.”

       

       “—좀 별로……”

       

       “좋다고.”

       

       혼자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그 아이에게 자박자박 다가갔다. 내가 다른 아이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경호원들이 조금 움찔거렸지만, 내가 방금 한 협박이 꽤 효과가 있었는지 나를 직접 막아서지는 않았다.

       

       “어디서 찍을까?”

       

       바로 앞까지 걸어간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그 아이는 “앗, 읏, 엑,”하는, 내가 상태창을 외치다가 양혜인에게 들켰을 때 같은 반응을 보였다.

       

       기왕 가깝게 간 김에, 아이의 교복 주머니 쪽을 봤다. 나보다 훨씬 부풀어 있는 그 부위 때문에 이름표가 달려있다기보다는 가슴 위에 얹어져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스트리머도 히로인 루트를 어느 쪽으로 타야 하는지 엄청나게 고민했었지. 그림판으로 그린 그림이긴 했지만, 거기서도 가슴의 굴곡이 확실했던 캐릭터니까.

       

       최고의 그래픽카드는 상상력이라나 뭐라나.

       

       이름표에는 ‘이수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나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스마트폰.”

       

       내 말에, 아이는 황급하게 내 손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가, 이내 비밀번호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얼른 가져가 비밀번호를 풀어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랬다가, 이번에는 카메라 앱이 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다시 한번 가져가 카메라 앱을 켰다.

       

       상대에 따라 그 일련의 과정이 비호감으로 보일 수도 있다. 평소에 인성이 별로 좋지 않거나,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뭐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그녀의 태도에서 진심으로 당황한 것이 느껴져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호감 가지기 좋은 외모 때문인지, 그 일련의 과정이 몹시 귀엽게 느껴졌다.

       

       이래서 인기가 많았던 건가.

       

       “이제 됐어?”

       

       내가 물어보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내 뒤쪽에 서 있던 양혜인에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아, 맞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잡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이수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사진은 어디에서 찍으려고?”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여, 여기서 찍어도 좋아. 학교가 잘 보이는 곳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누가 보면 짝사랑이랑 사진 찍는 줄 알겠네.

       

       이 세계는 남자도 여자도 꼬실 수 있는 미연시 속의 세계다. 여자끼리 사귀거나, 반대로 남자끼리 사귀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고, 게임 시작 전 간단하게 소개하는 시간에 스트리머가 하는 말을 들었었다.

       

       물론 내 약혼 상대가 남자인 것을 보면 그게 ‘일반적인’상황과 같게 받아들여지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뭐, 좋아.”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리고 이수아의 옆으로 가서 섰다.

       

       물론,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가 나오지는 않았다. 나도 원래 평소에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처음 보는 여자애랑 사진을 찍어 보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건 이수아도 마찬가지였는지, 먼저 사진을 찍자고 한 것 치고는 다소 어색한 모습이었다.

       

       양손을 뒤로해서 선 채로 몸을 배배 꼬고 있었으니까. 얼굴은 여전히 엄청 부끄럽다는 듯 붉었다.

       

       “자, 그럼 두 분 모두, 이쪽을 바라봐 주세요.”

       

       양혜인이 스마트폰을 들어 우리 쪽을 향하며 말했다.

       

       “그럼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하고 스마트폰에서 소리가 났다.

       

       양혜인은 곧바로 우리 쪽으로 다가와 다시 스마트폰을 넘겼다. 나는 양혜인에게서 건네받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조금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나는 얼굴에 살짝 미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표정에 가까웠고, 이수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수아가 고개를 살짝 숙인 것을 고려해보아도, 키는 내 쪽이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하긴, 예사라는 몸매가 빈약한 거지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다시 이수아에게 돌려주었다.

       

       “어때?”

       

       “으, 응. 잘 나왔네…….”

       

       이수아는 나의 눈을 살짝 피하면서 말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너무 친근하게 굴었나.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오늘 사진 한 장 못 찍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찍었네. 고마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수아의 빨간 얼굴은 더더욱 빨갛게 변했다. 완전히 익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혼자 어깨를 으쓱였다. 뭐, 굳이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 아이도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할 테니까.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어, 아, 응.”

       

       내 말에, 이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다른 일정은 없지만, 상대 앞에서 무례하지 않게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내가 등을 돌려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저, 저기!”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더니, 이수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고, 고등학교에서 보자!”

       

       뒤를 돌아본 나에게, 이수아가 그렇게 외쳤다.

       

       “그래.”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뒤로 돌아섰다.

       

       바로 조금 전까지 별로 좋지 않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예쁜 미소녀와 대화도 하고, 사진도 찍고…… 뭐, 그런 것보다는, 내가 ‘악역’ 영애가 되지 않는 미래로 한 걸음 나아간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걷는 나를, 양혜인이 마치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

       

       이수아는 혼혈이다.

       

       아버지는 한국인 기업가, 어머니는 미국 출신의 모델.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동안 만난 사이라고 들었다.

       

       어머니 쪽의 금발과 푸른 눈을 물려받은 이수아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외지인 취급을 받았다.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이 있었고, 반대로 한국에서 머리카락 색이나 눈 색깔 때문에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수아는 그걸 이겨내려고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름대로 방법을 연구하고, 결과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의 수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돌림이라는 것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많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수아는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제일 먼저 친구가 될 사람을 찾았다.

       

       반에서 친해질 사람을 찾아 열심히 말을 걸고 비위를 맞춰 친구가 되고, 그 전에 사귀었던 친구들과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걸 위해서, 이수아는 자기 외모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백인 혼혈’이라는, 한국에서는 다소 희귀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몇몇 아이들의 허영심을 채워주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부지런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반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고 나면, 자신을 따돌리려고 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생활을 유지한다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인간관계는 유동적이다. 친구 둘이 서로 싸워서 양자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고, 새로 전학을 오거나 전학을 가는 아이가 생기거나…… 그 모든 인간관계를 관리하려면 정말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되었다. 그 상황에서 성적까지 유지해야 하니, 그녀로서는 정말 하루하루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쁜 것이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중학교로 진학한 그녀는 한 아이를 만났다.

       

       아니, 만났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으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봤다’라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쟤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지고, 마치 인형처럼 예쁜 외모를 하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왜?”

       

       이수아가 물어보자, 아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수아를 그 아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네 엄마가……”

       

       “유진 그룹의 세습이 복잡하게 얽혀서……”

       

       “아마 너에게도 곧 이야기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수아는 그 소녀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유진 그룹의 예사라 양과는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어느 날 그녀를 부른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왜요?”

       

       그때까지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던 이수아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물어보긴 했지만, 

       

       “미안하다. 이유는 자세하게 말하기 어렵구나. 다만, 유진 그룹과 얽힌 이야기라는 것만은 이야기해줄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까지 휘말려 들 수 있어.”

       

       아버지는 이수아에게 몇 번이나 다짐했고, 결국 이수아는 아버지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과연 옳은 표현일까?

       

       누군가를 따돌리고, 일부러 말을 걸지 않으며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것에 대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있을까. 그건 그 자체로 이미 끔찍한 범죄였다.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해 본 그녀였기에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지금의 이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수’에서 ‘소수’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뼈저리게 겪었으니까.

       

       그 소녀, 예사라와 같은 반이 되었던 1년 동안은, 그래서 항상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음 학년부터는 다른 반이 되어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를 직접 괴롭히고 있다는 죄책감에서는 조금 떨어질 수 있었으니까.

       

       다른 반이 되고 나서도, 그녀와는 종종 마주쳤다. 예사라라는 아이는 가끔 아무 표정도 없이 복도를 걷고 있기도 했고, 합동 체육 수업 때는 아무 말 없이 응원석에 앉아있기도 했고, 가끔 그녀가 있는 반 옆을 지날 때면 창문 안쪽으로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무언가로 콕콕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다. 그저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준다면, 어쩌면 그녀는 저렇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얼음 같은 벽을 깨고 웃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걸어주는 아이가 되는 것은, 동시에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2년이 더 흘렀다.

       

       화영중학교에서 학생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

       

       친구가 많았던 이수아는, 아이들과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여기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고등학생 때도 얼굴을 볼 사이였으니까. 제대로 얼굴도장을 찍어두어야, 고등학교에서도 친구로 지내기 수월할 것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와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예사라를 본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간 것은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3년 내내 말도 걸어본 적 없는 그 아이의 뒤를 따른다. 어쩌면, 그저 주변의 분위기에 휘말려서 그 아이에게 사죄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죄라. 인제 와서.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사진 찍는 것도 마다하고 따라온 것이다. 최소한 말이라도 꺼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 저, 저기!”

       

       그리고, 예사라가 교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그녀는 간신히 그렇게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

       

       사과하고 싶어,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아저씨들을 직접 물리치고, 지난 3년 동안 말 한마디 건 적 없었던 그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태도가 너무 시원시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 같은 태도.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으면 안 될까!?”

       

       결국 이수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한심한 말이었다.

       

       ……하지만 예사라는 받아주었다.

       

       다시 한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결과, 이수아의 스마트폰에는 사진 한 장이 생겼다.

       

       지난 3년간 다닌 학교를 배경으로, 몹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겨우 카메라를 보고 있는 이수아와 그 옆에 당당하게 서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예사라의 사진이.

       

       ……어떤 의미에서는 몹시 상징적인 사진이었다.

       

       수많은 친구를 가지고, 인기 많은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한없이 부끄러운 한 소녀.

       

       그리고 모두에게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해내고 당당하게 서 있는 한 소녀.

       

       이 사진은 절대로 지우지 말아야지.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이 아이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자. 그리고, 하지 못했던 사과를 하도록 하자.

       

       적어도 앞으로 3년간은, 지난 3년간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살아가리라.

       

       다수가 되건, 소수가 되건.

       

       누가 뭐라고 하건.

       

       예사라처럼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수아는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은방울꽃님, 후원 감사합니다!

    이제 새로 쓰기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소설인데, 이렇게 많은 응원을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거의 2주 가까이 쉬고 쓰는 글이고, 지난번 소설과는 소재도, 장르도 아주 약간은 달라 독자 여러분께서 어떻게 받아들여 주실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반응을 보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매일같이 열심히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전작을 완결 내고 새로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몸은 참 편했습니다. 직장에서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중간에 잠깐 생기는 쉬는 시간에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소리니까요. 소리를 살짝 작게 하고 유튜브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매일같이 쓰던 글을 쓰지 않으니 시간이 무척 느리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시간을 정해두고 글을 쓰면 그 촉박함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독자 여러분께서 달아주신 댓글을 읽는 것도 좋아합니다. 일상에서 당연히 즐기던 것이 사라졌으니, 그만큼 지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겠죠. 이렇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니,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후원 감사드립니다. 저를 믿어 주신 만큼, 앞으로도 성실하게 읽기 즐거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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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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