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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 작별입니다. 미스 아나스타샤. –

         

       

       

         나지막한 그 선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나신을 타고 도는 전류. 겨우 극복했던 공포와 긴장이 다시금 옥죄어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린데?”

         

         – 말 그대로입니다. 생체 임플란트의 설치 상태 완벽. 사이버웨어 적합도 및 응용능력 검증 완료. 닥터가 설계한 실험 수칙에 따라,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 개조인간의 전투능력 측정으로 넘어가야할 순간입니다. –

         

         찰칵… 찰칵…!

         콰지직…!! 쾅!

         

         수술실 구석에 있던 캐비닛으로 걸어간 그는, 잠겨 있던 보관함 문을 거칠게 잡아뜯었다.

         무참하게 찌그러진 철판은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캐비닛 안에 있던 내용물은 나에게 던져졌다.

         

         “으븝?!”

         

         검은 천뭉치가 얼굴을 뒤덮었다.

         시야가 가려져서 정확하게는 안 보였지만, 수술대 위에는 뭔가 딱딱한 게 여러 개 떨어졌고.

         

         – 헤이롱黑龍 사의 프로토타입 하이퍼 컴뱃 슈트 및 자동권총 모델 피스메이커와 여분 탄창, 그리고… 일반적인 전투식량이군요. 모두 착용을 마친 뒤, 복도로 나와 주시면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

         

         “?! …야! 기다려!!”

         

         내 말은 말로도 안 듣는 놈이 매정하게 수술실을 떠나버렸다.

         

         옷을 챙겨준 건 정말 고맙지만… 한꺼번에 너무 불길한 정보가 많이 주어져서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엑사테크가 로봇공학, 헤이롱이 군수장비 분야에서 최고인 기업이라면. 에나마(영원한 삶) 코퍼레이션은 모든 메가 코프 중에서도 인체실험 및 개조의 최선두를 달리는 싸이코패스들. 만약…. 아주 만약에, 게임에서 나오던 수많은 개조인간의 원형을 개발하는 실험이 지금 한창 진행중이라면…?

         

         저 안드로이드가 나를 일부러 치료해서 집어온 것도. 전부 실험 프로토콜의 변인 통제 일환이었다면…?

         

         “흐으… 흐읍…!”

         

         또 벌벌 떨리기 시작한 손을, 심호흡해서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걱정은 나중에. 우선은 주어진 물건들을 확인하는 게 최우선이다.

         

         아무리 내 몸이 작다지만. 이게 과연 들어가나… 싶었던 검은색 스포츠 브라와 팬티는, 팔다리에 끼워 넣는 대로 쭉쭉 늘어나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살짝 품이 넓어서 흘러내리지만, 마찬가지로 이 몸을 위해 준비된 게 분명한 검은색 재킷과 바지, 마지막으로 워커화.

         

         삐빅… 삑….

         

         임플란트와 함께 설치된 사이버웨어가 명멸하면서 입은 옷의 재질과 용도를 분석해주었다. 탄소나노섬유… 유리섬유… 방탄섬유… 광경화수지까지. 씨발, 진짜 방탄복 겸 전투복이다.

         

         “……. 웃기지 마…!”

         

         좋아하던 사이버펑크 세계를 즐기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처음부터 떠올리지도 않았다. 철과 화약, 돈이 지배하는 아포칼립스는 멀리서 볼 때나 희극이었지, 닥친 순간부터는 존나 비극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막 각오를 마쳤다고 바로 이렇게 죽이려 들어…?

         

         철컥!

         

         헤이롱 사의 피스메이커 자동권총을 집어 들고 탄창을 빼서 확인했다.

         친절한 사이버웨어는 그냥 결합된 상태에서도 남은 장탄 수를 알려줬지만, 이제는 이게 유일한 생명줄이라고 생각하니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The Peace Maker. Semi-automatic Pistol. Black Dragon Corp. 17/17 ]

         

         “겨우 17발……?”

         

         선심 쓰듯이 받은 여분 탄창까지 합치면 34발. 실험 상대가 인간이라면 넉넉할지도 모르겠으나, 우리 시건방진 깡통의 말본새를 보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으득…!!

         

         “내가 질 줄 알고…!”

         

         초기 아나스타샤는 절대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네오 헤이븐 지식을 동원해 특성을 조합한 게 그녀이니, 그걸 이용한다면 나름의 승리 플랜은 분명히 존재했다.

         

         땡그랑…!! 드르르륵…….

         

         난폭하게 집은 탄창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다가, 그 곁에 있던 뭔가를 떨어트렸다. 차디찬 수술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물건의 정체는… 다름아닌 통조림.

         

         이게 그 전투식량인가 뭔가겠지….

         1분도 버티기 힘든 조건을 설정해 놓고, MRE는 왜 챙겨줬는지 모르겠다.

         

         잠재적 배드엔딩을 앞둔 긴장 때문인지, 아직도 속을 괴롭히는 비릿한 배양액 때문인지. 딱히 식욕도 돌지 않았기에 무시하고 복도로 나가려 하던 와중, 사용자의 기분도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버웨어의 메시지가 다시한번 팝업 했다.

         

         삑…!

         

         [ 순도 100% 감자 샐러드 통조림 ]

         [ 빵 통조림 – 젤리 파이 버전 ]

         

         “……아?”

         

         ………이게 전투식량? 정말 헛웃음만 나온다. 재밌네… 재밌어.

         이 안드로이드 새끼가 아주 그냥 내가 좆으로 보였나 본데…! 진짜 좆을 잃어버린 사람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줘야겠다.

         

         

         터벅터벅. 백광만이 가득한 복도로 걸어 나오자, 케어봇의 기계음성이 나를 반겨주었다.

         

         – 검체 번호 RoTG-71214 개조인간에게 전투능력 측정 수칙 설명. 1항, 참여한 실험체는 복도 끝 훈련 벙커로 가서 생존을 도모합니다. 2항, 무장 불균형을 고려하여 드로이드는 30분이 지나기 전까지 추적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3항, 실험은 한쪽이 작동불가 상태가 될 때까지 지속합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

         

         “……좋아. 작동불가 상태가 뭐야?”

         

         – 드로이드의 경우, 동력원Main Core 이나 중앙 처리 장치의 파괴. 실험체의 경우, 중추신경계의 파괴입니다. 실험을 개시해도 되겠습니까? –

         

         …끝까지 무서운 말만 하긴.

         

         “그럼…… 내가 만약 이렇게! 하면, 어떻게 돼…?”

         

         철컥…!

         

         허벅지에 달린 홀스터에서 피스메이커를 뽑아, 곧장 녀석에게 겨눴다.

         

         – ……. –

         “…….”

         

         붉은 스캐너가 또 깜빡이고, 침묵이 길어졌다.

         쏠 생각이 없는 걸 들켰는지, 이런 계집애가 연사하는 권총으로는 주요 부품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건지. 역시… 기계 앞에서 허장성세는 무리였던 모양.

         

         “하아… 알았어. 얌전히 도망칠게. 그럼 됐지…?”

         

         – 능동적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검체 번호 RoTG-71214. 그러면 2195년 7월 15일 수요일, 오후 11시 34분. 전투능력 측정 실…. –

         

         팡!!

         

         말이 끝나기 직전, 나는 복도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과연 미래 중국친구들의 하이퍼 컴뱃 슈트. 신체능력이 바닥을 기는 나라도, 제법 빠른 속도로 드로이드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그건, 수칙 위반입니다. –

         

         콰드드드득…!!

         

         바닥 타일을 거의 모조리 갈아엎으며 녀석이 접근해왔다. 스스로가 무슨 재앙을 불러왔는지, 지금이라도 깨달으라는 듯 기계 팔에 부착된 톱날이 공포스럽게 회전하고 총구가 머리를 향해 겨눠졌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나를 노리는 건, 오직 안전하고 섬세한 조작이 가능한 팔과 집게.

         

         촤라락!!

         

         – !! –

         

         무릎이 시큰거릴 정도로. 갑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나는 몸을 뒤로 젖혔다. 이대로라면 부서진 파편에 휘말려 예쁜 몸이 걸레짝이 되던가, 위협용 톱날에 크게 다치던가, 넘어져서 뒤통수가 깨지던가, 셋 중 하나이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진짜로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던 녀석은 거의 뛰어들 듯 양팔로 나를 감싸 안고 복도를 데굴데굴 굴렀다.

         

         콰장창!

         

         – 이게 무슨 &*%^(&…?! –

         

         “세상에…! 뒤지게 비싼 자연식품 통조림을! 단순한 전투식량이라고 얼버무리려는 바보 깡통은 인간한테 혼 좀 나야 돼!!”

         

         인간을 닮은 케어봇의 CPU는 보통 머리에. 거미를 닮은 드로이드의 CPU는 보통 몸통쪽에 있었으니, 나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통제권을 얻기 위해. 녀석의 목부분에 양손을 대고, 준비한 특성을 발현했다.

         

         

         특성 : SLI 신드롬

         의지에 따라 방출가능한 전기신호로, 손에 닿는 모든 전자기기의 해킹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대신, 전자파 탐지에 항상 위치가 노출됩니다.

         

         특성 : 실험실 태생

         지능 수치 및 모든 생체 임플란트 적합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대신, 모든 캐릭터와의 호감도가 -10 에서 시작하며, 항상 기업의 추격부대에 쫓기게 됩니다.

         

         

         목을 잡은 손끝을 타고, 내 의지가 안드로이드의 회로속으로 파고들었다. 비록 접선 가능한 네트워크가 없어, 보조해줄 해킹 툴은 설치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복잡한 보안 시스템을 돌파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데…! 괘씸하게 실험이란 핑계로 겁을 줘서! 벙커로 먼저 탈출 시키려던 깡통에게 자세한 해명을 요구할 뿐!

         

         “우선명령권자의 명령 각인!! 드로이드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주어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 회피 및 거짓말을 금지한다!”

         

         – …생존한 우선명령권자의 명령 확인, 대기 모드로 전환합니다. –

         

         몸을 지탱해주던 기계 팔이 풀어지자, 몸이 바닥으로 우당탕 굴러 떨어졌다. 슈트가 없었다면 엉뚱하게 다칠 뻔했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자아가 있는 AI는 스스로 코드를 덧씌울 수 있어, 지속적으로 해킹을 시도하지 않으면 금방 제어에서 벗어나기에.

         

         “좋아…. 왜 이름을 숨겼어?”

         

         – 알에서 막 깨어난 새는, 처음 마주한 대상을 어미로 여기고 따를 수 있다고 닥터께서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안드로이드와의 과한 애착관계 형성은 미스 아나스타샤의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이 통조림들은 뭐야 그럼?”

         

         – 닥터 마크로비치의, 미스 아나스타샤를 위한 선물입니다. 구시대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생일 음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도 나를 위해서였다…. 저것도 나를 위해서였다…. 화가 치솟았다. 내가 세상물정을 모를지는 몰라도, 실험실 쥐는 아닌데.

         

         “마지막 질문. 혹시 위에는… 벌써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추적자(Seeker)들이 와있어?”

         

         – ……. –

         

         쿵…!

         

         그는 대답없이, 멋대로 대기 모드를 해제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잘나신 메가 코프가 자산이 남은 걸 눈치챘는데, 회수를 시도하지 않을 리가 없지.

         

         – …벙커에는 일인승 탈출 포드가 준비 되어있습니다. –

         

         “그걸 타고 무사히 나가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고? 그렇게 나를 도와주고 싶으면, 차라리 끝까지 살아서 내 옆을 지켜줘. 멍청하게 혼자 툭탁거리면서 추적자 부대랑 싸우다가 개박살 나지 말고!!”

         

         – …. –

         

         속에 있던 걸 전부 쏟아내고 씩씩거리는 나를 보고. 그는 마침내 프로토콜을 변경했다.

         

         – 연구소 상층부에, 무력화되지 않은 방어 시스템과 포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통제실에서 추적자 부대의 시스템 접속을 해킹으로 막아 주신다면, 모든 장비를 동원해 최대한 저항해보겠습니다. –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여전히 차갑지만, 전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기계 팔이 나를 감싸 안았다.

         

         쿵쿵쿵쿵쿵…!!

         

         그렇게 순식간에.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보호대상을 데리고 연구소 지상까지 올라온 우리 깡통은 텅텅 빈 통제실에 나를 남겨두고 추가무장을 꺼내 오겠다며 격납고로 사라졌다. 통제실 모니터에는 벌써 호버크래프트를 타고 접근해오는 추적자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꼭 필요한 추가 무장이라니. 대체 뭘까…?

         사실 그는 본판이 단순한 돌보미 로봇인 만큼 엑사테크 부품으로 마개조 되었더라도, 기업의 사냥개들을 상대하기엔 조금 불안감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삐빅…!

         

         [ 메인 시스템 접근 확인, 신원 식별…. 환영합니다. 미스 아나스타샤. ]

         

         지하에서 화려하게 자폭한 닥터가 남겼다는 위조 사원 신분으로 연구소의 메인 프레임에 접속했다.

         

         갑자기 치르게 된 실전인 만큼, 터치 패널 조작과 전기 신호 조작을 조금이라도 더 연습할 겸 궁금증도 해결할 겸. 격납고에 적재된 물품 목록을 불러왔는데….

         

         이… 이 나쁜 깡통 새끼! 지는 이런 게 있으면서, 나한텐 달랑 권총 한자루만 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 에나마 코퍼레이션 연구소 최종 방위선 형성을 위해, 폐기 드로이드 제어 및 외부장착무장 골리앗(Goliath) 결합 개시. 미스 아나스타샤, 준비되셨습니까? –

         

         “……너 만큼은 안 됐어.”

         

         – 미스 아나스타샤의 생존 확률 재계산…. 63%. 이걸로는 부족하겠군요. –

         

         날아온 통신에 최대한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우리 잘난 깡통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추적자 부대에게 환영 인사를 날릴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기이이잉—!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어썰트 라이플이 장전되고 전원이 나가 있던 로봇들의 몸체에 붉은 안광이 동시에 들어왔다.

         

         

       

       

       

       

       

       

         

       

       

         미스 아나스타샤 전속 케어봇 깡통, 섬멸 모드 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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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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