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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튈까.”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진실을 안다면.

     불쌍하게도, 아버지는 검에 대한 감각은 누구보다 날카로웠지만 여인에 대한 감각은 몹시 무뎠다.

     아마도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서 ‘그럴 리 없다’라고 생각하며,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겠지.

     나는 안다.

     이 시점의 아버지는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다’라는 걸.

     -소드마스터의 예우를 담아, 죽기 직전에 하나 알려주지. 네 마누라는 사실 국왕과 불륜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죽던 날, 제국의 황제는 직접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샬롯이 그럴 리가…!

     -어리석은 여자였지. 우리가 왕국을 점령하면 진짜로 왕을 유폐시키고 살려줄 거라고 믿은 게.

     -크, 으아악!! 거짓말이다!!

     -왜 그렇게 화를 내지? 아, 그런가.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드디어 깨달아서 그런 건가?

     

     황제는 잔인한 인간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가장 약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죽여라.

     -저런. 포기한 모양이군. 자식도 다 잃고, 마지막에는 죽은 아내까지 한 번 더 잃었으니.

     비록 이가 빠지고 날이 갈렸지만 부러지지는 않던 아버지의 칼날이 그렇게 부러졌다.

     -가만히 놔뒀어도 이 나라는 망했겠군.

     그렇게 아버지는 죽었다.

     그때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분명 이때의 일을 자세히 모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심각한 사고가 터지기 전, 한 번 더 아버지의 인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로 잠입한다.

     집안 식구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내가 서재로 들어간다고 딱히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긴 하다.

     

     아버지가 ‘왜 들어갔느냐’라고 경고하시겠지만, 변명이야 적당히 지어내면 그만이고.

     끼이익.

     서재의 문을 열어 아버지의 사무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에는 번호로 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1130.

     ‘너무나도 쉬운 비밀번호지.’

     변경백의 아내 사랑이 담긴 번호다.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고, 어머니를 처음 만난 날로 알고 있다.

     이 서재를 물려받는 날, 아버지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

     나중에 들키게 된다면-

     -아버지라면, 어머니를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날을 비밀번호로 설정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다고 네가 함부로 서랍을 연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방에 가서 하루 동안 근신하도록.

     -예.

     아버지를 좀 띄워주면서 변명하면 적당히 봐주겠지.

     여기에는 반역에 관한 자료는 아직은 없으니까.

     덜커덩.

     자물쇠를 따고 서랍을 열자, 안에 구겨진 양피지가 수북하게 들어있었다.

     [왕실 사교장 테라스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접촉’ 사고의 경위 보고서. -로버트 세빌리야.]

     “오.”

     아는 이름이 나왔다.

     ‘로버트 경이 보고를 했던 건가.’

     성실한 왕국의 ‘충신’이기도 하면서 아버지의 수하.

     그의 정갈한 글씨로 적힌 보고서에는 최대한 객관적이면서도 중립적으로 적으려고 한 피땀 가득한 흔적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따라서, 국왕 전하의 손길이 백작 부인의 흉부에 닿았다고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다는….

     ‘세이프.’

     다행이다.

     양피지를 앞뒤로 빼곡히 채운 보고서를 요약하자면.

    1. 왕실 파티에서 국왕과 어머니가 테라스에서 단둘이 있었다.

    2. 어머니가 자세를 잃고 쓰러지는 걸 국왕이 붙잡았다.

    3. 국왕이 나쁜 손으로 어머니를 뒤에서 애인처럼 끌어안았다.

     ‘치정 다툼을 시작하기 딱 좋은 빌미네.’

     단순한 실수라고 하기에는 과거도 과거고, 국왕의 손길도 대담했겠지.

     하물며 보고서에 따르면 안은 자세로 무려 5초 동안 그대로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국왕이 한 번 더 끌어안았다고 하더라.

     그걸 여러 귀족이 보고 말았으니, 아버지로서는 화를 내지 않는 게 바보가 되는 상황이다.

     물론-

     ‘비웃을 놈들은 비웃겠지만.’

     왕도의 사교계에서는 난리일 테지.

     자기 아내가 외간 남자에게 성희롱당했는데도 방구석에서 화를 내는 겁쟁이라고.

     국왕을 상대로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쫄보라고.

     그 비웃음은 10년 뒤, 반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10년 동안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 이들을 마음속에 기록했었고, 명단대로 모두 죽이거나 고문하여 산송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가볍게 놀리는 입방정 때문에 어떠한 요인으로든 죽을 것이다.

     그들의 생사에 대해 알 바는 아니지만-

     ‘[공주]는 얘기가 다르지.’

     그녀는 신경이 쓰인다.

     공주.

     과연 여기로 올까?

     왕비까지 따라온다면 아마도 그녀도 같이 이곳에 올 텐데.

     “아.”

     생각해보니.

     ‘왕비, 아버지랑 전에 연인관계였지.’

     …….

     “개판이네.”

     나는 양피지를 다시 서랍에 집어넣은 뒤,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치정 싸움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사람의 감정만큼 극단적인 상황을 만드는 게 또 없다.

     그리고 특히 그 감정이 연심, 사랑이라면 인간은 폭주하는 비공정과도 같이 마구 날뛰게 된다.

     그러다가 폭발하게 되면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는데, 그게 지금 국가 최고 권력자와 변경백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지만, 의외로 봉합은 생각보다 더 괜찮게 되었다.

     아버지는 진실을 모른다.

     국왕과 어머니는 진실을 묻기 위해,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백허그까지는 사람들이 봤지만, 그 이후 사람들이 모르는 부정한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숨기려고.

     만일 들킨다?

     그럼 아버지는 즉시 국왕의 모가지를 날려버리겠지.

     ‘그건 좀 괜찮은데.’

     반역자가 되어 효수되더라도, 아마 왕국 자체는 제국에게 지배되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무능왕이 지금 없어진다면, 미래는 밝을지도 몰라.’

     이 왕이라는 자가 앞으로 10년 동안 나라를 말아먹을 걸 생각하면, 지금 죽는 게 나으니까.

     ‘왕비는 어떻게 하려나. 그 여자, 조금 그런데.’

     왕비도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왕비는 여러모로 위험하다.

     ‘어떻게 정상이 공주뿐이지.’

     

     공주.

     

     생각해보니.

     “오늘이 첫 만남인가.”

     역사대로 왕비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따라왔다면, 분명 그녀도 함께 데리고 왔을 터.

     “…훗.”

     가문의 모두가 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조금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의 생명의 은인.

     나 때문에 몰락하고, 나 때문에 망가진 그녀.

     그리고 나의-

     “나리아 공주.”

     신이 만일 있다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역사대로 이루어지기를.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도하며,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아버지가 미쳤다.

     어느 정도로 미쳤냐면, 일국의 군왕이 변경까지 찾아왔는데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왔다.

     

     “으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이 나라, [노스트럼]의 왕이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짙은 수염을 가진 중년의 미남자.

     미중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남자는 모든 능력은 외모에 몰아넣은 인간이다.

     “자네는?”

     “제 소개를 하는 걸 허락해주신다면, 지브롤터 백작가를 대표하여 말씀 올리겠습니다.”

     예의는 갖추되, 한 번 떠본다.

     10살짜리 꼬맹이가 가문을 대표하러 왕을 맞이하러 왔다.

     “변경백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한들, 이런 어린아이를 보낸다니…?”

     

     즉위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능왕’이라고 불린 남자가 과연 알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과인을 모욕하는 것도-”

     “폐하.”

     무능왕의 옆, 날카로운 인상의 흑발 생머리 미녀가 부채를 펼치며 세인트 지오의 말을 끊었다.

     “…….”

     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을 하지만, 그 속삭임은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간다.

     왕에게 부족한 정치적 수사를 보조해주는 것.

     ‘카르멘 모르가니아 노스트럼. 모르가니아 대공의 금지옥엽이자, 유일한 자식.’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정치력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치가다.

     세간에서 괜히 저 여인을 ‘여왕’이라고 몰래 지칭하는 게 아니다.

     “크흠. …네가 혹시 ‘그레이’더냐?”

     “예. 그레이 지브롤터. 노스트럼의 금빛 태양을 뵙습니다.”

     “…하하하!”

     세인트 지오 왕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가 샬롯의. …어머니의 눈을 정말 많이 닮았구나. 눈매가 닮았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

     “아버지께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으나, 아버지는 ‘위’에서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아무리 집주인이라고 해도, 왕에게 ‘네가 올라와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셔야겠군요. 폐하.”

     

     하지만 왕비도 국왕을 뒤에서 등을 떠민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폐하께서 큰 잘못을 하셨으니.”

     “으음…!”

     “출발할 때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죠. 다른 이들이 보는 앞이 아니라면, 변경백에게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내가 듣는데 저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아니지. 나한테 압박을 주는 거네.’

     왕이 무릎을 꿇을 정도의 각오로 찾아왔으니,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그걸 왜 10살짜리 꼬마한테 그러는 건지.’

     아무리 아버지의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카르멘 왕비의 심술을 들을 이유가-

     ‘있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다.

     국왕에게는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의 아들이며.

     왕비에게는-

     ‘첫사랑을 빼앗아 간 여인의 아들.’

     세인트 지오 왕과 다를 바가 없는 입장.

     ‘개판이야, 개판.’

     개인적으로 가극 극단을 후원했을 때, 대본 작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짠 적이 있었다.

     -주연끼리 맺어지고 난 뒤, 조연끼리 짝을 맺으면 어떻게 될까요?

     대답은, 이와 같다.

     조연남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투영하고.

     조연녀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동시에, 그를 빼앗아 간 여인을 투영한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왕비 쪽이 낫군.’

     누군가가 혐오와 경멸을 보내는 시선 쪽이 익숙하다.

     저렇게 나를 통해 내가 아닌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정말이지, 역겹기 짝이 없으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왕국 예법은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갑자기 존대로 내게 묻길래, 순간 내가 아닌 줄 알았다.

     “공주와 나이가 같은 걸로 알고 있는데.”

     라는 말 뒤에,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걸 잘 알고 있다.

     -변경백과 백작 부인은 예법 교육에 관심이 없었을 텐데?

     -네가 10살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변경백 가문에 들어가는 가정교사 중에는 왕족을 대하는 예법을 아는 이가 없을 텐데?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왕을 대하는 예법을 알고 있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예법을 익힌 거지?

     ‘정보망의 어딘가가 누락된 건가, 걱정하는 눈치군.’

     참 머리 아프게 사는구나 싶지만, 옆에 있는 무능왕의 지능을 보좌해주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선택한 왕비의 길이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는 그 자리, 왕관을 옆에서 지탱하는 무게를 견뎌야겠지.

     ‘다른 사람이라면 머리 좀 아프라고 하겠지만, 미래에서 빚이 있으니.’

     나는 카르멘 왕비를 향해, 다른 예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국 예법?”

     “다행히, 가문의 고서관에 예법에 관한 책이 있어서.”

     “……그걸 혼자서 몰래 보고 익혔다는 것이냐? 왜?”

     “카르멘.”

     세인트 지오가 심드렁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 위를 가리켰다.

     “애가 대충 옛날 책 보고 익혔겠지. 올라갑시다. 혼자 가면…좀 그러니까.”

     “…….”

     카르멘은 여전히 나를 향해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나, 나는 최대한 ‘그’와 비슷하게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칫.”

     증오하는 여자의 자식이지만.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사랑했던 남자의 아들이니까.

     “아 참. 안내는 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그의 방을 아니까.”

     “예?”

     

     카르멘 여왕이 갑자기 내 앞을 막았다.

     “그대의 역할은 따로 있습니다. 저기, 뒤.”

     카르멘 여왕이 손으로 가리킨 뒤에는.

     “공주를 에스코트하여, 장미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주세요.”

     당신이 장미정원의 존재를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마차에서 여기사의 손을 잡고 내리는 새하얀 드레스 입은 소녀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레이 지브롤터?”

     “…여왕 폐하를 닮아서 그런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크림슨은 이런 말 잘 안 하던데.”

     아버지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게 칭찬받는 듯한 느낌은 들어서 싫지는 않나 보다.

     “그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왕과 왕비가 백작 성의 중앙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뒤, 나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식 있게.

     “나리아 공주님.”

     과거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몇 번이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지금 다가왔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다시 본 소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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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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