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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지하에서의 삶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고통을 각오하고 들어간 거긴 하지만.
     
   하루 두 끼 나오는 밥은 쓰고, 시고, 비렸으며.
     
   자유시간이라고는 기도의 피로를 추스를 때뿐이었다.
     
   일찍이 미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신이 내려주신 이 힘을 엄한 데 사용할 뻔했겠지.
     
     
   미아… 나의 친구이자 은인, 그리고 희망.
     
   그러니 그녀와의 약속만큼은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만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몸에 갇힌 미아를 위해서라도 언제까지고 끝까지.
     
     
   우물우물-
     
   그렇게 입 안으로 들어온 푸른 머리카락을 먹으며 잠들어 있던 소녀가 움찔 몸을 떤다.
     
   아침이 밝고, 잠기운이 희미해지자 무의식 속에 억눌러왔던 끔찍한 꿈이 떠오른다.
     
   -“기상! 일어나라! 기도 시간이다!”
   -“오오! 성자시여, 이쪽으로! 신도들에게 부디 축복을 나눠주소서!”
     
   팔다리가 없어진 채, 신도들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피와 살점을 쏟아내던 기억.
     
   “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잠에서 막 깨어난 소녀가 다급히 벌떡- 몸을 일으킨다.
     
   잠기운에 눈조차 다 뜨지 못한 꼴이었고, 이내.
     
   “으잇…?!”
     
   도롱이처럼 이불에 둘러싸여 있던 탓에 자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풀썩 넘어진다.
     
   워낙 비몽사몽인 상태라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자리에 쓰러진 채로 꾸벅, 꾸벅 고개를 흔들었다.
     
     
   졸려.
     
   조금만 더 자고 싶어.
     
   이제 더는 소원을 빌면 안 돼.
     
   이건 미아의 몸이잖아….
     
   “우응….”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소녀가 다시금 꿈속으로 빠져들어 가던 때였다.
     
   “허억… 헉….”
   “귀, 귀여워….”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짹짹! 짹!
     
   더불어 일어나라는 듯, 소녀의 머리 위에서 콩콩 뛰어대는 아참이까지.
     
   결국 소녀는 등쌀에 떠밀려 천천히 눈을 떠 올린다.
     
     
   “하아…아암…?”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하품이 뚝, 끊긴다.
     
   맞은편에 우뚝 선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다.
     
   정열적인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사각형 모양의 천.
     
   마치 집을 천으로 지어놓으면 저런 모습인가 싶은 거대한 크기다.
     
     
   어… 어라…?
     
   어젠 저런 게 없었는데?
     
   삐걱삐걱 시선을 돌리자, 바로 곁에 앉은 두 여인이 소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히죽거리며,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였다.
     
   “…힉!”
     
   큰일이다!
     
   내가, 내가 자다가 민가에 침입해 버렸구나!
     
   참새들이 날 옮겨온 걸까?!
     
   아니면, 비탈길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온 걸지도 몰라!
     
     
   소녀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 그렇게 급하게 일어나면…!”
     
   그리고 다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옆으로 픽 쓰러져 내린다.
     
   머리도 작고, 몸이 워낙 가벼워 머리가 땅에 부딪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 우리 이상한 사람 아니야!”
   “자, 여기 소시지 있는데, 이거 먹을래?”
     
   희게 질린 소녀의 안색.
     
   얼마나 벌벌 떨어대는지, 몸을 감싼 이불이 덩달아 발발거리면서 떨려 올 정도였다.
     
   누가 봐도 두 여인을 보고 놀란 듯, 경계하는 듯한 기색.
     
   “자! 존슨빌 소시지! 겨, 겨자 좋아하니? 아니면 케첩?”
   “언니!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불닭 소스지!”
     
   자매가 다급히 소시지를 포크에 꽂고 흔들어봤는데.
     
   “모,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라고 했어요….”
     
   오히려 소녀와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투우라도 하듯 이불을 풀어 제 앞을 가린 모습이 퍽 귀여워서 꼭 껴안아 주고 싶은데.
     
   몬스터와 싸우기 바쁜 자매가 아이를 상대해 본 적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음식으로 인한 회유가 실패하자 곧장 두 번째 방법을 시도해 보지만.
     
   “씁. 어른 말 잘 들어야지. 우리가 불편하면, 보호자분은 어디 계시니. 데려다줄게…?”
     
   소녀는 ‘보호자’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제자리에 이불을 버리고 오도도 도망가기 시작한다.
     
   딴에는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듯 거친 숨소리가 요란스럽다.
     
     
   “…언니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 도망가는 거 보니까 가출한 걸지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자매 역시 소녀를 따라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각각 S급과 A급 각성자인 두 사람의 신체 능력이라면 아이 하나 잡는 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매가 막 속력을 높여 소녀의 뒤를 따라잡자-
     
   “따라오지 마!”
     
   여태까지 겁에 질려 있던 건 연기였다는 듯, 살기 어린 고함이 돌아왔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손쉽게 잡는 자매조차 움찔 할 정도의 진한 살기.
     
   심지어, 달려가는 소녀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노, 놓치겠어!”
   “내가 갈게!”
     
   S급 각성자인 동생 역시 정신을 다잡고 진심으로 가속했다.
     
   휘이익-!
     
   빽빽한 나무가 이쑤시개처럼 얇아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
     
   전력을 다하면 금방 붙잡을 줄 알았는데, 소녀와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나무를 박차고, 땅을 구르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리저리 뛰어가는 소녀의 행동은 과연 같은 인간인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결국.
     
   “하아… 계속 따라가면 괜히 다치기만 하겠네.”
     
   이렇게 방해물이 많은 곳에서 달리는 건 그녀에게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아이라고 오죽할까.
     
   저 속도로 무리하다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최소 어디 한 곳은 부러질 터.
     
   심하면 어쩔 새도 없이 죽을 수도 있다.
     
   결국 동생은 터덜터덜 고개를 내리 숙인 채, 패잔병처럼 텐트를 향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혼자 오니?”
   “…애가 제대로 된 각성자였나 봐. 다칠까봐 쫓아가질 못하겠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제야 아이의 외모에 홀려 있던 자매가 큼큼, 괜히 음료를 들이켜며 이성을 되찾았다.
     
   여태 저희가 과하게 행동해 왔던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놔두자. 각성자라면 혼자 산에서 놀고 올 수도 있지. 괜히 납치범으로 몰리면 어쩌려고?”
     
   언니 쪽의 이야기에 동생이 옳다구나 대꾸한다.
     
   “그, 그렇지! 어쩐지 피부도 깨끗하고, 머릿결도 좋다 했어!”
   “응. 이불도 새것 같고, 산에서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거 보니까 좋은 집에 사는 아이겠지. 산이 익숙하니까 혼자 올라왔다면 말이 되잖아.”
     
   세상이 흉흉해진 지금이라고 해도, 돈 많은 이들의 별장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자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먼 곳까지 휴가를 갈 여유가 없어서 북한산으로 만족하는 것이었으니.
     
   “그래! 역시 언니 말이 맞아. 잘 사는 애니까 존슨빌 소시지는 눈에도 안 띄겠지.”
   “…넌 내가 이럴 때만 언니니?”
     
   소녀에게 집중하던 자매가 또다시 약속이라도 한 듯, 휙-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본다.
     
   똑같은 색의 동공이었지만, 너무나도 다른 눈매.
     
   “젖괴물.”
   “껌젖.”
     
   “이익!!”
     
   그렇게 자매는 오늘도 언제나 같은 의미 없는 말다툼을 시작한다.
     
   소녀가 부모도, 집도 없이 도망쳐 나온 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였다.
     
     
     
   * * *
     
     
     
   후텁지근하던 여름이 지나 어느덧 가을이 다가왔다.
     
   습기로 눅눅하던 북한산의 정경은 노랗게 물들었고.
     
   졸졸 흘러가는 계곡물은 발을 담그는 게 꺼려질 정도로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런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 위.
     
   “미친 년아! 너 이러다 죽어! 제발 도시로 내려가라고!”
   “…안 돼. 그러다 잡히면, 미아 네가 위험해져.”
     
   웬 꼬질꼬질한 막대기 하나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북한산에서 거지 생활을 두 달이나 겪어왔던 만큼, 눈에 띄게 변해버린 몰골의 소녀였다.
     
     
   “아니! 난 신경 쓰지 말라고! 이건 이제 네 몸이니까!”
   “하지만, 샤워도 못 하게 했잖아….”
     
   버럭버럭.
     
   미아가 주변이 메아리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따져왔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기운이 너무 없다.
     
   무엇보다, 미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화를 내는 것조차 듣기 좋은 탓이다.
     
   “부, 부끄러운 걸 어떡해!”
   “응, 다 이해해…. 그러니까 불만 없어. 여기서 같이 살자….”
     
   어지럽다.
     
   아침에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빵을 먹긴 했는데, 그거론 부족한 모양이다.
     
   계곡물이나 실컷 마셔야겠다.
     
     
   “아니이이!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미아가 쟁알대며 잔소리를 쏟아냄에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아 역시 이런 생존 경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탓이다.
     
   뭘 처먹고 자꾸 픽픽 쓰러지냐고 길길이 날뛰기에 독버섯을 보여줬는데.
     
   -“상한 걸 먹으니까 그렇지!”
     
   라고 말해서, 같은 독버섯을 주워 먹고 세 번이나 기절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
     
   이 흰 버섯은 먹으면 아프구나.
     
     
   지하에서 갇혀 지내던 소녀에겐 모든 게 낯설었다.
     
   가끔 산을 돌아다닐 때면 삐이익! 하고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무엇인지.
     
   비가 오는데 산이 왜 무너져 내리는지.
     
   어른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왜 물건을 집어 던지는지 등등.
     
   사지가 잘린 채 무력하게 있던 때와 달리, 몸이 멀쩡함에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지하에 있을 때와 달라지는 건 하나뿐이다.
     
   때때로, 제멋대로 나타나지만, 미아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그녀같이 속죄하지 못한 죄인에게는 지옥 같은 곳일 뿐이었다.
     
     
   풍덩!
     
   [야! 정신 차려!!]
     
   계곡에서 고개 숙이고 물을 마시던 소녀가 힘을 잃고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소름이 절로 끼칠 정도로 차가운 물.
     
   그러나, 그런 물이 뜨끈해질 정도의 열기.
     
   “헉… 컥…!”
     
   의식이 희미하다.
     
   소녀가 허둥대며 발버둥 치지만,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물살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쿵!
     
   심지어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머리에서 뭉글뭉글 핏물이 솟아오르자, 더 이상 바둥거릴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 오염 수치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찰을 옮기는 걸 고려해야…”
     
   저벅, 저벅.
     
   계곡물을 따라 오르던 한 무리의 인파 가운데.
     
   한 노인이 다급히 계곡으로 다가와 기다란 지팡이를 쭉 내밀었다.
     
   “아가! 이걸 잡거라!”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소녀… 아니, 미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회복력을 폐와 두 팔에 집중했고, 남은 온 힘을 다해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자명 스님! 아이가!”
   “꽉 잡거라!”
     
   노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함께 왔던 이들이 허겁지겁 뒤따라왔지만, 노인은 지팡이에 매달린 소녀를 구하고자 온 신경을 집중했고.
     
   “구경하지 말고 가서 아이를 데려오거라!”
     
   그렇게 소녀는 스님들의 팔에 이끌려 뭍에 끌어올려질 수 있었다.
     
     
   후두둑, 얼마나 젖어 있는지 자갈 바닥이 금세 물이 흥건해졌다.
     
   물뿐만이 아니었다.
     
   머리 쪽은 크게 다치기라도 한 듯, 피가 섞인 물이 분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스님! 아이가, 몸이 아주 뜨겁습니다!”
     
   색색이며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게,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처럼 보였다.
     
   “누가 가서 겨울옷 좀 가져오거라! 뜨끈한 국도 좀 끓여놓고!”
   “예!”
     
   그나마 노인이 함께였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종교계 각성자 중 한 명인 자명 스님.
     
   그의 능력은 자연 진기를 이용한 치료.
     
     
   다급히 걸음을 재촉한 자명 스님이 소녀의 이마 위로 주름진 손을 얹었다.
     
   몇 달 전에 겪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아이의 외모가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씻지 못한 듯, 전보다 더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런 상태로도 가릴 수 없는 강물을 닮은 푸른 머리카락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아아… 애초에 이리 이어질 인연이었던 것을…. 내 무심함이 널 고통스럽게 했구나….”
     
   단순히 주변 마을 아이인 줄 알았던 아이가, 이 꼴이 되어 나타났다는 건.
     
   그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이 산에서 내려간 적 없이, 누구의 보호도 없이 혼자 살아왔다는 것이리라.
     
     
   “아가, 나랑 같이 가자꾸나. 가서 맛있는 밥도 먹고, 기운 차려야지.”
     
   죄책감에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러나, 자명 스님은 아이가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몸속으로 기운을 불어넣으며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더러운 몰골이지만, 제 아이를 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노친네.’
     
   이번만큼은 미아 역시 별말 없이 눈을 감았다.
     
   힘겹게 숨 쉬던 아이가 완전히 눈을 감은 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구나.”
     
   자명 스님은 그제야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스님!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이건 내 업이니, 너흰 가서 아이가 쉴 곳이나 준비해 두려무나.”
     
   그렇게 소녀는 스님과 함께 사찰로 옮겨졌다.
     
   지하실에서 탈출해 온 지 약 두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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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의 삶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고통을 각오하고 들어간 거긴 하지만.

하루 두 끼 나오는 밥은 쓰고, 시고, 비렸으며.

자유시간이라고는 기도의 피로를 추스를 때뿐이었다.

일찍이 미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신이 내려주신 이 힘을 엄한 데 사용할 뻔했겠지.

미아… 나의 친구이자 은인, 그리고 희망.

그러니 그녀와의 약속만큼은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만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 몸에 갇힌 미아를 위해서라도 언제까지고 끝까지.

우물우물-

그렇게 입 안으로 들어온 푸른 머리카락을 먹으며 잠들어 있던 소녀가 움찔 몸을 떤다.

아침이 밝고, 잠기운이 희미해지자 무의식 속에 억눌러왔던 끔찍한 꿈이 떠오른다.

-“기상! 일어나라! 기도 시간이다!”

-“오오! 성자시여, 이쪽으로! 신도들에게 부디 축복을 나눠주소서!”

팔다리가 없어진 채, 신도들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피와 살점을 쏟아내던 기억.

“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잠에서 막 깨어난 소녀가 다급히 벌떡- 몸을 일으킨다.

잠기운에 눈조차 다 뜨지 못한 꼴이었고, 이내.

“으잇…?!”

도롱이처럼 이불에 둘러싸여 있던 탓에 자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풀썩 넘어진다.

워낙 비몽사몽인 상태라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자리에 쓰러진 채로 꾸벅, 꾸벅 고개를 흔들었다.

졸려.

조금만 더 자고 싶어.

이제 더는 소원을 빌면 안 돼.

이건 미아의 몸이잖아….

“우응….”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소녀가 다시금 꿈속으로 빠져들어 가던 때였다.

“허억… 헉….”

“귀, 귀여워….”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짹짹! 짹!

더불어 일어나라는 듯, 소녀의 머리 위에서 콩콩 뛰어대는 아참이까지.

결국 소녀는 등쌀에 떠밀려 천천히 눈을 떠 올린다.

“하아…아암…?”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하품이 뚝, 끊긴다.

맞은편에 우뚝 선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다.

정열적인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사각형 모양의 천.

마치 집을 천으로 지어놓으면 저런 모습인가 싶은 거대한 크기다.

어… 어라…?

어젠 저런 게 없었는데?

삐걱삐걱 시선을 돌리자, 바로 곁에 앉은 두 여인이 소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히죽거리며,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였다.

“…힉!”

큰일이다!

내가, 내가 자다가 민가에 침입해 버렸구나!

참새들이 날 옮겨온 걸까?!

아니면, 비탈길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온 걸지도 몰라!

소녀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 그렇게 급하게 일어나면…!”

그리고 다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옆으로 픽 쓰러져 내린다.

머리도 작고, 몸이 워낙 가벼워 머리가 땅에 부딪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 우리 이상한 사람 아니야!”

“자, 여기 소시지 있는데, 이거 먹을래?”

희게 질린 소녀의 안색.

얼마나 벌벌 떨어대는지, 몸을 감싼 이불이 덩달아 발발거리면서 떨려 올 정도였다.

누가 봐도 두 여인을 보고 놀란 듯, 경계하는 듯한 기색.

“자! 존슨빌 소시지! 겨, 겨자 좋아하니? 아니면 케첩?”

“언니!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불닭 소스지!”

자매가 다급히 소시지를 포크에 꽂고 흔들어봤는데.

“모,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라고 했어요….”

오히려 소녀와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투우라도 하듯 이불을 풀어 제 앞을 가린 모습이 퍽 귀여워서 꼭 껴안아 주고 싶은데.

몬스터와 싸우기 바쁜 자매가 아이를 상대해 본 적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음식으로 인한 회유가 실패하자 곧장 두 번째 방법을 시도해 보지만.

“씁. 어른 말 잘 들어야지. 우리가 불편하면, 보호자분은 어디 계시니. 데려다줄게…?”

소녀는 ‘보호자’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제자리에 이불을 버리고 오도도 도망가기 시작한다.

딴에는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듯 거친 숨소리가 요란스럽다.

“…언니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 도망가는 거 보니까 가출한 걸지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자매 역시 소녀를 따라잡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각각 S급과 A급 각성자인 두 사람의 신체 능력이라면 아이 하나 잡는 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매가 막 속력을 높여 소녀의 뒤를 따라잡자-

“따라오지 마!”

여태까지 겁에 질려 있던 건 연기였다는 듯, 살기 어린 고함이 돌아왔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손쉽게 잡는 자매조차 움찔 할 정도의 진한 살기.

심지어, 달려가는 소녀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노, 놓치겠어!”

“내가 갈게!”

S급 각성자인 동생 역시 정신을 다잡고 진심으로 가속했다.

휘이익-!

빽빽한 나무가 이쑤시개처럼 얇아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

전력을 다하면 금방 붙잡을 줄 알았는데, 소녀와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나무를 박차고, 땅을 구르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리저리 뛰어가는 소녀의 행동은 과연 같은 인간인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결국.

“하아… 계속 따라가면 괜히 다치기만 하겠네.”

이렇게 방해물이 많은 곳에서 달리는 건 그녀에게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아이라고 오죽할까.

저 속도로 무리하다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최소 어디 한 곳은 부러질 터.

심하면 어쩔 새도 없이 죽을 수도 있다.

결국 동생은 터덜터덜 고개를 내리 숙인 채, 패잔병처럼 텐트를 향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혼자 오니?”

“…애가 제대로 된 각성자였나 봐. 다칠까봐 쫓아가질 못하겠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제야 아이의 외모에 홀려 있던 자매가 큼큼, 괜히 음료를 들이켜며 이성을 되찾았다.

여태 저희가 과하게 행동해 왔던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놔두자. 각성자라면 혼자 산에서 놀고 올 수도 있지. 괜히 납치범으로 몰리면 어쩌려고?”

언니 쪽의 이야기에 동생이 옳다구나 대꾸한다.

“그, 그렇지! 어쩐지 피부도 깨끗하고, 머릿결도 좋다 했어!”

“응. 이불도 새것 같고, 산에서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거 보니까 좋은 집에 사는 아이겠지. 산이 익숙하니까 혼자 올라왔다면 말이 되잖아.”

세상이 흉흉해진 지금이라고 해도, 돈 많은 이들의 별장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자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먼 곳까지 휴가를 갈 여유가 없어서 북한산으로 만족하는 것이었으니.

“그래! 역시 언니 말이 맞아. 잘 사는 애니까 존슨빌 소시지는 눈에도 안 띄겠지.”

“…넌 내가 이럴 때만 언니니?”

소녀에게 집중하던 자매가 또다시 약속이라도 한 듯, 휙-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본다.

똑같은 색의 동공이었지만, 너무나도 다른 눈매.

“젖괴물.”

“껌젖.”

“이익!!”

그렇게 자매는 오늘도 언제나 같은 의미 없는 말다툼을 시작한다.

소녀가 부모도, 집도 없이 도망쳐 나온 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였다.

* * *

후텁지근하던 여름이 지나 어느덧 가을이 다가왔다.

습기로 눅눅하던 북한산의 정경은 노랗게 물들었고.

졸졸 흘러가는 계곡물은 발을 담그는 게 꺼려질 정도로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런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 위.

“미친 년아! 너 이러다 죽어! 제발 도시로 내려가라고!”

“…안 돼. 그러다 잡히면, 미아 네가 위험해져.”

웬 꼬질꼬질한 막대기 하나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북한산에서 거지 생활을 두 달이나 겪어왔던 만큼, 눈에 띄게 변해버린 몰골의 소녀였다.

“아니! 난 신경 쓰지 말라고! 이건 이제 네 몸이니까!”

“하지만, 샤워도 못 하게 했잖아….”

버럭버럭.

미아가 주변이 메아리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따져왔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기운이 너무 없다.

무엇보다, 미아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화를 내는 것조차 듣기 좋은 탓이다.

“부, 부끄러운 걸 어떡해!”

“응, 다 이해해…. 그러니까 불만 없어. 여기서 같이 살자….”

어지럽다.

아침에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빵을 먹긴 했는데, 그거론 부족한 모양이다.

계곡물이나 실컷 마셔야겠다.

“아니이이!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미아가 쟁알대며 잔소리를 쏟아냄에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아 역시 이런 생존 경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탓이다.

뭘 처먹고 자꾸 픽픽 쓰러지냐고 길길이 날뛰기에 독버섯을 보여줬는데.

-“상한 걸 먹으니까 그렇지!”

라고 말해서, 같은 독버섯을 주워 먹고 세 번이나 기절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

이 흰 버섯은 먹으면 아프구나.

지하에서 갇혀 지내던 소녀에겐 모든 게 낯설었다.

가끔 산을 돌아다닐 때면 삐이익! 하고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무엇인지.

비가 오는데 산이 왜 무너져 내리는지.

어른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왜 물건을 집어 던지는지 등등.

사지가 잘린 채 무력하게 있던 때와 달리, 몸이 멀쩡함에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지하에 있을 때와 달라지는 건 하나뿐이다.

때때로, 제멋대로 나타나지만, 미아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그녀같이 속죄하지 못한 죄인에게는 지옥 같은 곳일 뿐이었다.

풍덩!

[야! 정신 차려!!]

계곡에서 고개 숙이고 물을 마시던 소녀가 힘을 잃고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소름이 절로 끼칠 정도로 차가운 물.

그러나, 그런 물이 뜨끈해질 정도의 열기.

“헉… 컥…!”

의식이 희미하다.

소녀가 허둥대며 발버둥 치지만,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물살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쿵!

심지어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머리에서 뭉글뭉글 핏물이 솟아오르자, 더 이상 바둥거릴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 오염 수치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찰을 옮기는 걸 고려해야…”

저벅, 저벅.

계곡물을 따라 오르던 한 무리의 인파 가운데.

한 노인이 다급히 계곡으로 다가와 기다란 지팡이를 쭉 내밀었다.

“아가! 이걸 잡거라!”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소녀… 아니, 미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회복력을 폐와 두 팔에 집중했고, 남은 온 힘을 다해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자명 스님! 아이가!”

“꽉 잡거라!”

노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함께 왔던 이들이 허겁지겁 뒤따라왔지만, 노인은 지팡이에 매달린 소녀를 구하고자 온 신경을 집중했고.

“구경하지 말고 가서 아이를 데려오거라!”

그렇게 소녀는 스님들의 팔에 이끌려 뭍에 끌어올려질 수 있었다.

후두둑, 얼마나 젖어 있는지 자갈 바닥이 금세 물이 흥건해졌다.

물뿐만이 아니었다.

머리 쪽은 크게 다치기라도 한 듯, 피가 섞인 물이 분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스님! 아이가, 몸이 아주 뜨겁습니다!”

색색이며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게,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처럼 보였다.

“누가 가서 겨울옷 좀 가져오거라! 뜨끈한 국도 좀 끓여놓고!”

“예!”

그나마 노인이 함께였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종교계 각성자 중 한 명인 자명 스님.

그의 능력은 자연 진기를 이용한 치료.

다급히 걸음을 재촉한 자명 스님이 소녀의 이마 위로 주름진 손을 얹었다.

몇 달 전에 겪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아이의 외모가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씻지 못한 듯, 전보다 더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런 상태로도 가릴 수 없는 강물을 닮은 푸른 머리카락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아아… 애초에 이리 이어질 인연이었던 것을…. 내 무심함이 널 고통스럽게 했구나….”

단순히 주변 마을 아이인 줄 알았던 아이가, 이 꼴이 되어 나타났다는 건.

그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이 산에서 내려간 적 없이, 누구의 보호도 없이 혼자 살아왔다는 것이리라.

“아가, 나랑 같이 가자꾸나. 가서 맛있는 밥도 먹고, 기운 차려야지.”

죄책감에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러나, 자명 스님은 아이가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몸속으로 기운을 불어넣으며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더러운 몰골이지만, 제 아이를 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노친네.’

이번만큼은 미아 역시 별말 없이 눈을 감았다.

힘겹게 숨 쉬던 아이가 완전히 눈을 감은 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구나.”

자명 스님은 그제야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스님!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이건 내 업이니, 너흰 가서 아이가 쉴 곳이나 준비해 두려무나.”

그렇게 소녀는 스님과 함께 사찰로 옮겨졌다.

지하실에서 탈출해 온 지 약 두 달 만의 일이었다.


           


Don’t Die, It’s Not Your Body

Don’t Die, It’s Not Your Body

죽지 마, 네 몸이 아니야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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