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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최상급 화계마도 ‘체이서 플로우’를 이해했습니다.]

         

       [논문 심사 진행도에 다음과 같은 변경사항이 생겼습니다.]

         

       [화계마도 : 836개 습득 → 837개 습득(전체 1048개 中)]

         

       “으어….”

         

       날밤을 깠다. 반나절을 머리만 쓰며 보냈던 탓에 관자놀이가 윙윙 울려댔다. 하품도 연달아 나왔다.

         

       그래도 생각보단 버틸 만하다. 날을 새는 건 옛날부터 익숙했기에.

         

       밤샘은 하스펠트 교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습관이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그래.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했을 때부터였다.

         

       노곤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노예란 자고로 그런 존재였으니. 잡념을 떨쳐버리고는 공용 창고에서 항상 쓰던 빗자루를 꺼냈다.

         

       늘 그렇듯이 오늘 하루도 아침 청소로 시작한다. 우리 어여쁘…. 뭐 같은 교수님께서 출근하시는 길에 낙엽 하나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아암.”

         

       졸리다. 졸려 뒤질 것 같다. 눈이 침침한 게 꼭 도수에 맞지 않은 안경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빗자루를 껴안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앉은 채로 주변을 쓰는 시늉이라도 했다. 근데. 그게 잘 안 된다. 몸이 노곤해서 뜻대로 안 움직이는데에.

         

       “……!”

         

       터벅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조건반사로 의자에서 튀어 나갔다.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눈앞에서 황금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

       “날이 좋습니다. 교수님.”

       “졸았어요?”

       “네.”

       “…쓸데없이 당당하네.”

         

       당신한테 구라를 쳤다간 손모가지로 안 끝날 테니까.

         

       “어제 해 오라고 시킨 건 다 했나요?”

       “네. 여기요.”

         

       나에게서 스크롤 30장을 받아든 하스펠트 교수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평소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을 안 잤는지, 화장을 안 한 건지는 몰라도 평소보단 핼쑥한 모양새였다. 눈두덩이 가끔가다 떨리는 걸 보니 마그네슘 섭취가 부족한 듯했다. 금실 같았던 머리카락도 어딘가 푸석해 보였다.

         

       “문제… 없어요. 잘 만들었네요.”

         

       무엇보다도 원래 목소리보다 한 톤 다운된 음색이었다.

         

       “오늘은 바로 따라오세요. 연구실 청소는 안 해도 되니까.”

       “아직 다 치우지도 않았는데요.”

       “이만하면 됐어요.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

         

       나는 제비걸음으로 하스펠트 교수의 뒤를 쫓아갔다.

         

       **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하스펠트가 오늘따라 이상하다는 사실을.

         

       해가 중천을 지나가고 있는데 잔소리 한 번을 못 들었다. 원래라면 이것도 제대로 못 하냐, 눈치가 왜 이리 없냐고 히스테리를 부릴 사람이 신경질 한 번 내질 않고 있다.

         

       “교수님, 에나멜이 부족합니다. 밖에서 가져올까요?”

       “아뇨. 제가 동료 교수에게 빌려올 테니 잠깐 쉬고 있어요.”

         

       뭐지…? 이 사람이 어제 뭘 잘못 먹었나? 왠지 모를 위화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태도가 변한다던데. 아니면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나로선 다른 여자의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의도파악을 위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회로를 돌리던 중에도 손은 쉬지 않았다. 다른 스크롤부터 작성하거나 책상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곧이어 밖에 나갔다 돌아온 하스펠트가 문을 여닫으며 들어왔다. 한 손에는 구리선 묶음이 들려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접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설마 저 접시로 내 머리를 깨부술 생각인 건가?

         

       “잠시 이쪽으로 오세요.”

       “이게 뭔가요?”

       “동료에게 받은 거예요.”

         

       그럼 그렇지. 그냥 먹을 거다. 피곤해서 생각하는 게 잠깐 과격해졌었나 보다.

         

       히아신스 무늬를 새긴 접시 위에 놓여있는 몽블랑과 시금치 키슈 두 조각. 몽블랑에는 꿀이라도 발라놓은 건지 겉면이 번들거렸고, 키슈에는 발사믹 드레싱이 얹힌 채였다. 보통 키슈에 발사믹을 뿌려 먹나…?

         

       “점심 못 먹었잖아요.”

         

       하스펠트가 의자를 내빼고는 내 앞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이리 와서 앉으라는 뜻이다.

         

       접시 대신 스태프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불과 몇 초 새에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한 내 뇌내에서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신빙성이 가장 높은 건 ‘최후의 만찬’ 시나리오였다. 날 노예시장으로 되팔기 전에 최대한 좋은 품질로 만들어서 내보내려는, 악랄한 전략. 마치 집을 매매할 때 원주인이 내부 인테리어를 싹 뜯어고치고 나가는 것처럼, 하스펠트는 날 고점에서 물릴 생각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나 하나 사들이는데 금화 1천 장을 넘게 썼으니. 그만하면 대수림에 처박혀 안 나오는 하이엘프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만한 돈을, 수학 좀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불한 하스펠트도 참 안타깝다고 생각…….

         

       “뭐 해요? 멀뚱히 서 있고.”

       “…실례하겠습니다.”

       “전 먹고 와서 상관없어요. 드세요.”

         

       경건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잠은 어떻게든 떨쳐냈다. 지금의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다. 그동안 쌓은 처세술로 가장 적절한 말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교수님.”

       “무슨 일이죠?”

       “연구실에서 식사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코팅을 한 스크롤이라면 모를까, 날것의 마전지는 반도체를 담는 웨이퍼와 같아서 자그마한 이물질이라도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말고도 여긴 여러 가지로 민감한 실험기구들이 많잖아요? 교수님께서 예전에 제게 말씀하셨듯이 이런 곳에서 식사하는 건 연구자의 태도와 품위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라고 봅니다.”

         

       학부생 인턴까지 합치면 10년 넘게 랩실에서 굴렀던 몸이다. 연구실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수칙 같은 것들은 진작 몸에 배어있는 상태였다. 하스펠트가 연구 태도에 한해선 나에게 꾸중을 주지 않는 이유였다.

         

       배고픈 건 나중에 해결해도 된다. 무엇보다도 어제의 초콜릿 건으로 인해 당분이 끌리지 않았다.

         

       하스펠트가 멀뚱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근래 봤던 표정 중 가장 그녀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랬죠. 잘 알고 있네요. 재교육할 수고를 덜었어요.”

       

       그녀는 접시를 서늘한 곳으로 옮겼다. 그렇다고 저 맛있어 보이는 걸 먹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작업을 마저 끝낸 뒤 바깥 휴게실에서 식사하고 와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개처럼 뛰쳐나갔다.

         

       휴게실의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몽블랑의 노르스름한 식감, 키슈에서 느껴지는 그뤼예르 치즈의 쫀득함…. 아이 씨, 발사믹은 대체 왜 넣은 건데? 풍미를 망치잖아.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점심 겸 곁두리를 먹던 나는 생각에 잠겼다.

         

       좌우간 하스펠트의 상태가 이상하다. 원래라면 이런 걸 물린다고 했을 때 거듭 권유하진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스펠트 교수의 기행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재료가 부족해질 때마다 나 대신 바깥에 다녀온다거나, 항상 만나는 복도 앞에 나보다 먼저 와서는 더는 이곳을 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거나.

         

       마치 내 비위를 맞춰주는 것 같았다.

         

       아니, 전체적인 노동 강도만 치면 더 심해지긴 했다.

         

       아침 청소 시간이 전부 연구 시간으로 바뀌었고,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대는 뒤로 미뤄졌다. 일과 중 하스펠트와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뭔가 필요해질 때에는 나 대신 하스펠트가 직접 나가기 시작했다. 마석을 포함해 회로에 쓰일 마도소자가 떨어지면 그녀가 근처 연구실에서 곧장 얻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끝냈네요.”

         

       원래라면 일주일 걸릴 스크롤 작성을 겨우 사흘 만에 끝낸 뒷배경이 이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제가 다녀올 테니 잠시 쉬고 있으세요.”

         

       완성된 ‘라이트 애로우’ 스크롤 300장과, ‘체이서 플로우’ 스크롤 50장. 그녀가 물품을 기사단에 납품하고 돌아오기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늘 점심은 페퍼민트가 뿌려진 닭가슴살 샐러드였다. 아스파라거스랑 방울토마토를 같이 씹을 때의 맛이 안정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틀 연속으로 비싼 걸 얻어먹으니 어딘가 켕겼다. 가스라이팅의 효과가 장난 아니구나. 아니면 3년 만에 위장의 평화를 얻어서 그런 걸지도.

         

       턱.

         

       휴게실에서 야채를 곁들인 닭고기를 씹어먹던 내 앞으로 하스펠트 교수가 장바구니를 들이밀었다.

         

       “시장 가시게요?”

       “최상급 마석이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오후는 조금 바쁠 거예요.”

         

       가끔가다 있는 일이다. 날 짐꾼으로 데려다 쓰는 거.

         

       하스펠트는 시장에 잘 나가지 않는 대신 한 번에 많은 물품을 사 온다. 날 데려왔을 때도 도중에 뭔갈 잔뜩 사는 바람에 첫날부터 양팔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준비 다 했어요?”

       “네 교수님.”

         

       우리는 각자 나갈 채비를 마친 뒤 교문 밖으로 나섰다.

         

       아카데미에도 원래 세계의 대학처럼 ‘대학로’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잘 닦여진 가도 아래로 수많은 상점가가 진을 친 채 학생과 교직원의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겐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택배로 주문하지, 굳이 뭔갈 사러 바깥에 나오는 경우는 잘 없었으니까. 대로변의 양옆에 줄 세워진 잡화점들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지만.

         

       “공작님을 뵙습니다!”

       “뭐 하니…! 빨리 안 비켜드리고!”

         

       시장은 인파로 북적거렸지만 나와 하스펠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켰다. 인간 구급차가 여기 있었네.

         

       이거 민폐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보통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이면 하인을 시키지, 스스로 물건을 사러 직접 나오진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여긴 서민이나 하급 귀족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이 날 모질게 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신분제도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다. 적어도 소설에 나오는 악덕 귀족들처럼 ‘천한 노예년이!’와 같은 말은 안 하잖아.

         

       그렇게 상념에 젖어 얼마를 걸었을까. 내 손에 하나둘씩 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전지 5천 장과 대수림산 마력초 3백 갑 맞으시죠? 여기에 싸인 부탁드립니다.”

         

       아. 안돼. 이러다가 어깨 작살 나겠다.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그 소리에 내 입가가 빵긋 벌어졌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고행길이 드디어 끝나는구나!

         

       “아이고! 이거 하스펠트 교수님 아니십니까? 항상 저희 가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상급 마석이 들어왔다는데 알아보러 왔어요.”

       “물론이죠! 북방 전쟁에서 재앙급 마수를 쓰러뜨리고 얻은 것이랍니다. 가격이 꽤 나간답니다.”

       “상관없어요.”

       “크으, 역시! 그럼 곧바로 매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는 상인이 뭘 가져올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손에 꽤 큰 보석함이 들려왔다. 전자공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보면 좋아할 법한 디자인이었다.

         

       덜컥, 하고 상자가 열렸다. 나와 하스펠트는 그윽한 시선으로 그 속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내 호흡이 멎었다.

         

       “허어….”

         

       직육면체로 된 검은색 마석이었다. 아래쪽에는 길고 얇은 쇠침이 세 개 달려있는 것이었다.

         

       “최상급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강한 마수를 잡아서 얻은 것입니다. 쓰임새가 얼마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죠.”

       “그렇군요.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요.”

        “전방에서 부검한 마도사의 말에 따르면, 여기 쇠침에는 제국 공용어로 된 알파벳이 하나씩 대응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에는, 어디 보자…. P, N, 그리고 다시 P라고 하더군요. 이것들이 무얼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일까?

         

       “조수, 조수네 종족은 북쪽 산맥 출신이었죠. 이게 무슨 마석인지 아나요?”

         

       하스펠트의 물음에 난 잠시간 침묵을 택했다.

         

       저게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원리를 가장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렴, 발명한 사람이 물리학자인데. 저 마석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배우지 못한 물리학도가 세상에 있긴 할까?

         

       “모르면 모르겠다고 답해도 좋습니다.”

       “아뇨, 압니다.”

         

       나는 하스펠트 교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다섯 음절을 발음했다.

         

       트랜지스터.

         

       “저건, 보통 마석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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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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