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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

        

        

        연합왕국이 ‘연합’ 왕국인 이유를 묻는 원생들에게, 이반은 열차 노선도를 보라고 하는 편이다.

        

        마왕과의 전쟁 시절 군수물자를 나르던 이 거대한 철도망은, 도시와 도시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를 잇는 혈관으로 기능했다.

        

        마차를 통해 열흘 넘게 쉬지 않고 나아가야 했던 먼 거리를 단 사나흘이면 주파해버리는 금속 짐승들. 지난 전쟁의 진정한 주역들이다.

        

        

        “누가 먼저 도착한다고?”

        “드로안의 에이나르에요, 선배님. 에시디스 공주가 가장 먼저 출발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아직 1월인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느 누가 만리타향까지 두 달이나 미리 나와서 입학날을 기다려요? 심지어 왕족이! 정말 민폐라니까.”

        

        

        녀석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에시디스 공주가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에요. 고향에서요! 드로안 촌놈들은 아무래도 악기를 다루는 걸 우습게 여기니까요.”

        “…악기…?”

        “아, 이건 말씀 안 드렸나? 에시디스 공주는 음대에 지원했어요. 관현악부, 바이올린 전공이네요? 진짜 대단하죠? ‘그’ 에이나르 대왕의 혈육이 바이올리니스트라니.”

        

        

        이반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가 기억하는 에이나르는, 그러니까 대왕이 되기 전.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에이나르는 도끼 두 자루를 들고 아침엔 오크 대가리를, 저녁엔 타우루스 대가리를 수집하던 광인이었다.

        

        

       -크하하하, 이보게나 ‘작은’ 이반! 도끼질은 이렇게 하는 걸세!!

        

        

        보통 딸은 아버지를 닮지 않던가…?

        아니, 아니지.

        

        벌써 수 년 전이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에시디스의 모습은 가냘픈 꼬마아이였다.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는.

        

        사실 닮은 구석이 거의 없긴 했다.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어쨌건, 사상 최강의 음대생이 탄생하겠군. 이반은 짧은 감상을 남겼다.

        

        에시디스는 외모와 성격은 제 아비를 닮지 않았지만, 도끼질은 빼다 박았었으니까.

        

        

        “그나저나 선배, 그 정보 확실한 거에요? 진짜 열차 테러를 일으킨다고요?”

        “그래.”

        “누가요? 아니, 뭐어… 누구냐고 말하면 짚이는 놈이 너무 많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이나르 대왕의 딸인데요. 들키면 피의 독수리를 당할 텐데.”

        

        

        피의 독수리는 드로안 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민속놀이다. 대충 명절 윷놀이나 단오 그네놀이와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됐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한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자세한 사항은 너무 끔찍해서 크라실로프 왕국의 문명 사회 시민들에겐 차마 설명할 수 없다.

        

        

        “드로안에서 얀스크 대학까지 가장 짧은 루트로 직행 노선을 따면, 여기.”

        

        

        이반은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노선도의 한 줄기 실선을 그었다.

        제 12 수송로.

        크라실로프 왕국에서 드로안 왕국까지 이어지는 무역 수송로 중 하나.

        

        

        “그리고 예상컨데 이곳, 이고르비치 역. 이 근방이 가장 유력하군.”

        “어떻게 확신하세요…? 테러를 누가 장소까지 예고하고 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선배, 사람 심어 놨어요?”

        “그야, 국경선에서 터트릴 테니까.”

        

        

        누가 테러를 벌일지는 모른다. 예상할 수도 없다.

        일선에서 물러난데다 정보기관과는 연이 없는 탓이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테러가 일어나는 것 자체를 상수라고 가정하고,

        이제 ‘왜’, ‘누가’, ‘어떻게’를 하나씩 맞춰나가면 그만.

        

        

        “테러의 목적은 에시디스 공주겠지.”

        “그게, 어… 진짜 테러가 일어난다면 그렇겠죠?”

        “왜겠나?”

        “…네?”

        

        

        물론 크라실로프와 드로안의 분쟁 요소를 만들기 위해서겠지.

        여기까진 당연하다.

        

        

        “그렇다면 드로안 국경선 이남에선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 크라실로프 왕국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선 어쨌건 우리 국경선 안에서 벌여야 하겠지.”

        “어… 어, 네. 그렇겠죠?”

        “그런데 이 노선은 이고르비치 역을 지나면 총 세 구간의 군사 지구를 통과해.”

        

        

        아무리 열차가 테러에 취약하다고 한들 군사 구역 내에선 아니다.

        노선의 모든 방면이 군사 구역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 개의 군영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철도 자체가 군수 목적으로 설계되었던 흔적이다.

        

        

        “그리고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경계가 삼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렇다면 가장 취약한 곳은 이고르비치 역이다.”

        “오…. 네, 그렇죠?”

        “에시디스 공주의 출발 예정 시각은?”

        “이틀 뒤 12시 기차요.”

        “그럼 나흘 뒤 오전 10시쯤에 도착하겠군. 지금부터 출발하면 딱 알맞겠어.”

        

        

        이반은 노선도를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던 후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뭐 있어요? 신탁 받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선배가 예언을 할 줄 안단 얘긴 현역 때도 들은 적 없다구요. 테러 진압에 요원 파견을 해줄 수야 있는데, 증거가 있어야 저도 윗분들을 설득이라도 해보죠.”

        “그럼 내기 하겠나?”

        “…내기요?”

        “현장 지원 없이. 결과만 보자고.”

       

       

        이반은 피식 웃으며 후배를 돌아봤다.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 정보원이 있을 수도 없고. 하지만 테러는 일어날 것이다. ‘상식’이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설득할 시간도,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식’이 몇 차례는 더 나올텐데, 어떻게 매번 설득하겠는가.

       

       

        그러니까, 이반은 첫 단추에서 끊고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거기에다, 자신도 있었다.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애초에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담이 적다.

       

        테러가 일어난다면, 그의 말은 이제부터 진지한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하이킹의 딸을 구출해낸 셈이니.

       

        거기에 더해, 하이킹 에이나르가 가장 아끼는 딸을 홀몸으로 보내진 않았을 터. 당연하게도 수행원이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가 일어나는 것이 상수라면, 놈들은 반드시 에시디스의 수행원 전원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얻을 것은 많다.

       

        심지어 이반은 자신의 ‘아카데미 공식’이 맞아 떨어지는지까지 검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걸 포함해 몇몇 테스트를 실패한다면 뭐, 아카데미물이 아닐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진짜 자신 있는 모양이시네. 뭐, 좋아요. 저는 일단 손 떼고 있을게요.”

        

        

        이반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니까.

        

        보통 제정신이 박힌 반정부단체는 민간 수송 철도에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다.

       

        

        열차 테러라는 것은 수많은 인적 자원을 소모하기 마련이다. 사건이 터진 순간부터 관련자들, 수 년에서 수십 년을 고생해 구축했을 휴민트를 모조리 잃어버리기 때문.

        

        고작 민간 철도를 터트려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이 설령 에이나르 대왕의 소중한 장녀를 암살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국내에 체류 중일 때에 사살하는 것과 달리, 열차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책임 소재가 다소 불투명하다. 즉, 외교 관계가 냉각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분쟁 이상의 영역까지 확장되긴 어려울 것이란 뜻.

       

       

        고작 그 정도 목표를 위해 테러를 벌여 공연히 경계심만 높여주는 것은 하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크라실로프 왕가는 최소한의 경비 이상의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세계 사람들의 ‘상식’이다. 합리적인 추론과 판단이다.

       

        그러나 이반의 ‘상식’은 달랐다. 이건 공식이니까.

       

        

        테러나 분쟁 같은 흉흉한 사건들이 마왕과 함께 사라진 이 평화로운 4년.

        

        열차 테러 따위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이반 뿐이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해외의 공주가 입국한다 하더라도 고작 수도 역사에서 의전이나 준비하는 것이 전부일 테니.

        

        

        “이 짓을 세 번은 더 해야되는군.”

        

        

        이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열차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성녀를 제외하면 외국에서 출발하는 용사 파티 인원이 넷이나 되니.

        

        아카데미 ‘입학 열차’에서 테러가 일어난다면 녀석들의 입학 열차 노선 다섯 개를 모두 지켜내야 했다.

        

        지긋지긋한 이세계 같으니.

        

        이반은 열차에 올라타며 미간을 꾹 눌렀다.

        

        

       *

        

        

        이반이 열차를 타고 국경선 인근으로 떠났을 때, 후배는 착실히 상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궁정으로 향했다.

        

        

        “전하. 신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입궐했나이다.”

        “궁정에선 궁내장관이다.”

        “예, 각하.”

        

        

        원목을 조각해 도금한, 화려한 내벽.

        단 한 사람이 사용하기엔 터무니 없이 넓은 집무실.

        

        왕녀 엘리자베타 키릴로브나 크라실로프, 철혈의 리자가 소유한 집무실엔 대리석과 상아로 부조된 거대한 흑단목 탁자가 있다.

        

        수많은 서류들이 난잡하게 어질러 있는 탁자 너머로, 한 여자가 무심하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보고하도록.”

        “페트로비치 경이 떠났습니다.”

        “아는 내용 말고.”

        “열차 테러를 의심하고 있더군요. 시일과 장소를 제법 명확하게.”

        

        

        그 말을 듣고, 엘리자베타는 깃펜을 멈췄다.

        

        

        “반카에게 정보원이 있던가?”

        “아뇨, 지난 4년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보 조직이란 것은 결국 인적 자원이다. 그리고 모든 인적 자원은 꾸준한 관리와 적절한 기름칠이 필수불가결한 부품들이다.

        

        아무런 지원도, 관리도 없이 대뜸 맡은 임무에서 ‘신원미상의 반정부단체’를 정확히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뜻이었다.

        

        그럼 그의 행동이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인데도, 그에게선 어떤 종류의 ‘확신’이 느껴졌다.

        

        4년 전, 그가 마지막 임무를 떠날 때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이, 테러가 일어나는 일을 상식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이반이 아닌 다른이가 이렇게 주장했다면, 엘리자베타는 아무런 고민 없이 ‘광인’이라고 평가했을 터였다.

        

        

        “이번 정보야 두고보면 알 일이지만 적어도 페트로비치 경은 여전히 현역입니다. 각하. 예기가 전혀 죽지 않았더군요.”

        

        

        정보의 신뢰성은 둘째 문제다. 어차피 이반은 지원 요청도 없이 홀로 떠난 바, 정보가 설령 잘못되었다 한들 손해는 전혀 없다.

       

        드미트리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떠올리며 몸을 살짝 떨었다. 이반을 처음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기척을 죽이는 행동거지는 뭐, 절멸부대에겐 기본 소양이다.

        

        그러나 닫힌 문 너머로 보이지 않는 상대의 위치와 신장을 정확히 특정한 뒤에.

        

        오히려 기척을 드러내어 놓고 사선을 빗겨서 몸을 숙이며 반격을 준비하던 태도는 현역 요원들에게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훈련 상태였으니.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느껴지는 진득한 예감과 건조한 살기.

        

        그 순간 목소리를 높여 이반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린 것은 본능과 같았다. 거기서 입을 다물었으면 다음 찰나에 도끼날이 날아들었을 지도 모르니까.

        

        

        “후, 후후.”

        

        

        테이블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드미트리의 기억으론 3년만에 듣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다.

        

        

        “각하…?”

        “사람을 붙여라. 반카의 일거수일투족, 가장 사소한 행동까지 기록해서 가져와. 지급(매우 급함) 보고서로,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그으…. 그렇게 보고 싶으시면 차라리 직접 행차하심이…?”

        “그럴 거였다면 4년이나 보고만 있진 않았겠지.”

        

        

        엘리자베타는 피식 웃으며 다시 깃펜을 움직였다.

        

        

        “더 나은 순간에, 더 완벽한 타이밍에 재회하는 것이 옳아.”

        “아, 예….”

        “실 없는 소리 말고 경은 가서 나라나 더 지키도록. 한가한가?”

        “…예, 각하. 소신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퇴청하겠나이다.”

        

        

        드미트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서 떠났다.

        

        아니,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보고 받는 건 어디 떳떳하고 낭만적인 일인가.

        적어도 그의 연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길 바라며, 드미트리는 서둘러 동궁정을 빠져나갔다.

        

        

       *

        

        

        드미트리가 파견한 요원들이 이고르비치 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곱게 포장된 시체 가방 세 개를 받았다.

        

        꼼꼼하게 혈흔까지 지워버린 사건 현장에선 이반 페트로비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시점에 이반은 도끼를 쥐고 숲을 달리고 있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 날 이고르비치 역은 해골 세 개를 받았다. (물리적인 의미로)

    피의 독수리는 바이킹의 신나는 전통문화입니다. 혹시 처음 들어보셨다면 구글링에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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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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