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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아담은 자신의 삶에 이런 순간이 올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편지가 날아왔을 때 예상이야 했다지만, 실제로 엘프 장로를 마주하고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될줄은 몰랐다.

     

    특히나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고 이후로는 더더욱.

     

     

    “…부단장이 안오는군.”

     

    셀레브리엔의 가주. 그들의 장로, 아스칼 셀레브리엔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굵지 않은 목소리에는 분위기를 장악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눈이 집중하는 건 엘프 장로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또 다른 손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미모. 큰 키. 기다란 귀. 날카로운 눈매. 긴 녹발의 머리카락. 훤히 드러난 이마.

     

    아르윈 셀레브리엔.

     

     

    아담으로서는 아스칼이 제 딸을 왜 데려왔는지 모를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왔다는게 놀라울 뿐이었다.

     

     

    외모를 보고 거절하라는 의미였을까.

     

    거절했음에도 공격적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엘프장로의 모습에, 아담은 상대가 얼마나 급박한지 느껴졌다.

     

    그는 인형처럼 앉아있는 아르윈을 바라보다 장로에게 말했다.

     

     

    “…누가 오든 상관 없습니다. 이미 이야기는 끝났던 걸로 이해합니다만.”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는 끝난게 아니야.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나.”

     

    “달라질건 없죠. 제 동생은 이미 혼인을 했습니다.”

     

    “인족은 일부다처제가 가능하지 않나.”

     

    “새로운 혼인은 싫다더군요. 제 동생이.”

     

    “그러면 자네도 있는데.”

     

    “………”

     

     

    아담은 시선을 내리고 탁자에 놓여있던 술잔을 쥐었다.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자연스럽게 콧방귀를 흘렸다.

     

    “…하.”

     

    마치 그보다 우스운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아담은 다시 아스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장로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대답없이 술잔을 꺾었다.

     

    장로의 제안에 아담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집힌다.

     

     

    “…아, 죄송합니다. 제 문제라.”

     

    그리고 형식적인 예의를 갖춰, 비웃음에 대한 사과를 건넨다.

     

     

    그러자 아스칼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안되는가보군.”

     

    오랜 세월을 허투루 먹은 건 아니었는지, 누구를 설득하는게 더 어려운건지 그는 금방 파악했다.

     

    “어쨌든. 부단장을 만나보고 선택을 내려도 늦지 않아. 아르윈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럴지도요.”

     

    하지만 아담은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고 있었다.

     

    베르그가 예쁜 미모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거에 흔들리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똑똑똑.

     

    이내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베르그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명이 안에 있었다.

     

     

    아담 형.

     

    인족 기준으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귀티나는 엘프 남성.

     

    그리고 18살, 19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 아름답지만 앳된 엘프 여성.

     

     

    보자마자 나는 상황 파악이 가능했다.

     

    분명 거절했던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담 형을 바라보기도 전에 엘프 남성이 내게 걸어와 악수를 제안했다.

     

    “자네가 베르그인가? 이야기 많이 들었네. 블랙우드에서 높은 공을 세웠다고.”

     

    “…누구시죠?”

     

    “아스칼 셀레브리엔. 셀레브리엔 가문의 가주일세.”

     

    나는 가볍게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눈을 맞춰오는 엘프 여성을 바라보았다.

     

    잠시 우리는 시선을 교환한다.

     

     

    “…”

     

    “…”

     

    이내 그녀가 먼저 눈을 깔았다.

     

    느낌이지만, 이 여성에게도 네르에게 느꼈던 그 껄끄러움이 전해져왔다.

     

    정략혼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종간 혼인이면 더더욱.

     

    …특히나 장생종인 엘프들은 다른 종족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다고 들었다.

     

    희귀한 종족인만큼, 엘프를 직접 만나는건 처음이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의 말에 아담 형이 설명했다.

     

    “난 거절했다, 베르그. 네 의견을 무시하면서 밀어붙인게 아니야.”

     

    “그럼 이 엘프들은 왜 여기있어.”

     

    “널 보면서 설득하려고 찾아온 듯 한데.”

     

     

    아스칼은 잠시 나와 눈을 마주하다, 엘프 여성에게 말한다.

     

    “딸아, 잠시 나가있거라.”

     

    “….”

     

    엘프 여성은 그의 말대로 조신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고 나서야 얼마나 키가 큰지 체감이 된다.

     

    나보다는 작았지만 눈썹 언저리까지는 올라온다.

     

    긴 다리 덕에 비율도 좋았다. 엘프의 미에 대한 소문은 사실인 듯 했다.

     

     

    곧은 발걸음으로 엘프 여성은 자리를 떴다.

     

    그녀가 나가고서야 아스칼이 다시 말했다.

     

    “베르그, 그렇게 불러도 되겠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 장로가 본주제를 꺼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을거라 믿네. 베르그, 어떻게 우리 제안을 받아줄 수 없겠나.”

     

    아스칼은 빠르게 주제를 던져왔다.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담긴 선택들이 내게 주어질때마다 마음에 가해지는 부담감이 이루말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떠나, 어느선택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죽게 될거라는 사실이 힘들다.

     

    이 사실 때문에 여태 단원들의 훈련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왔을 것이다.

     

     

    나는 고뇌했다.

     

    돕겠다고 한다면, 홍염단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고.

     

    돕지 않겠다고 한다면, 엘프 사상자가 발생할 거다.

     

     

    당연히 나에게는 홍염단 단원들의 목숨이 중요했지만…그렇다고 엘프들의 목숨이 아예 신경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가상의 저울을 놓았다.

    자연스럽게 저울은 홍염단으로 많이도 기운다.

     

    이 저울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필요했다.

     

    또한 네르가 있는 이상, 더 이상 귀족의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지민을 살리려고 발악하는 아스칼에게 하기에는 차가운 말이었으나, 나도 결국 선택을 내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반대로 받을 이유라도 있나요?”

     

    아스칼은 단박에 답한다.

    “셀레브리엔 가문과 이어질 기회가 자주오는게 아니야.”

     

    자칫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

     

    하지만 나는 셀레브리엔 가문을 잘 알지 못했다.

    오만한만큼, 그에 맞는 명성을 갖춘 가문일지도.

    나는 곁눈질로 아담 형을 바라보았다.

    아담 형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거절하지만 않았더라도 형은 받아들였을 제안이었다.

     

    “블랙우드와 셀레브리엔의 힘을 동시에 업는걸세. 자네들이 왜 블랙우드 영애를 받아들였는지 알아. 하지만 셀레브리엔까지 등에 업으면 자네들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

     

    분명, 최근 원정을 나간 대원들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이 있긴 했다.

     

    네르와 내가 혼인하고서부터 우리 홍염단이 더욱 유명해진 것 같다고.

     

    홍염단의 일원이라는게 하나의 칭호가 되어,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고.

     

    네르 한명을 등에 업었을 때 벌어진 일이 이 정도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정도였다.

     

    …엘프마저도 등에 업으면 달라질게 분명 많긴 할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몇 명의 희생자를 더 늘릴만큼 중요한걸까?

     

    네르까지 생각한다면 거절하는게 당연한게 아닐까?

     

     

    “저는 혼인을 이미 했습니다.”

     

    “알면서 하는 말이네. 인족은 부인을 여럿두지 않나.”

     

    “다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네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밖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아까… 그 여인 이름이…”

     

    “아르윈. 아르윈 셀레브리엔.”

     

    “아르윈 양도 저와의 혼인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요?”

     

    네르때부터 느꼈던 문제.

     

    하지만 아스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중요치 않네.”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아. 자네도 아르윈과 혼인을 올린다고 한다면, 결국 이 용병단의 미래를 위해서지 자네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니지 않나. 첫 번째 아내도 행복을 생각하며 받아들인게 아닐텐데?”

     

    “첫번째 아내는 그렇다치지만, 두 번째 아내까지도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요.”

     

    “…”

     

    나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머리가 저릿해오기 시작했다.

     

    모든게 섞이고 흔들려 헷갈려오고 있었다.

     

     

    나는 또 아담 형을 찾는다.

     

    “…형.”

     

    “응.”

     

    “홍염단의 미래를 생각하면 뭐가 맞아?”

     

    “혼인을 하는게 맞지.”

     

    아담 형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해왔다.

     

    “엘프는…오래사니까. 최소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동맹이 끊일일은 없겠지. 우리에게 빚을 진 장로님도 오래 살거고. 이것저것 따져도…하나보다 둘이 낫고.”

     

    “…그럼 애초에 왜 거부했던 거야?”

     

    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야, 네가 싫다했잖아.”

     

    “그거 하나 때문에?”

     

    “그거면 충분하지.”

     

    “…”

     

     

    내가 고민하는 건 오로지 두가지였다.

     

    하나는 홍염단에게 가해질 피해.

     

    하지만 형은 외려 이 혼인을 받아들이는게 더 이득이 많을거라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사실, 그 무얼 얻으려고 하더라도 희생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속된말로 술통 하나 얻기 위해 죽어간 대원들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용병단이란 그런거니까.

     

    목숨과 자원을 맞바꾸는 거니까.

     

    그러니 어쩌면 이번 교환은 잃는 것보다 얻는게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면 내 다음 고민은…네르였다.

     

    늑인족으로서 네르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그녀도 내가 인족이라는 걸 감안해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의 문화에 입각해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굴욕적일게 분명했다.

     

     

     

    잘 지내보려 하는데, 자꾸만 장애물이 튀어나왔다.

     

    나는 또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

     

     

     

    네르는 걸어나오는 아르윈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르윈님…!”

     

    여기서 마주할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상대.

     

    아르윈은 차갑다고 말할수도 있는 눈으로 자신을 부른 네르를 찾았다.

     

     

    “…네르.”

     

    엘프 여성은 네르를 잊지 않았다는 듯 이름을 불렀다.

     

    네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엘프는 수명이 긴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쉽게 잊어버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네르를 더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몰려든 홍염단의 인파 중심에서 둘이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오랜만이야. 얼마만이지?”

     

    “…6년…쯤, 네. 그쯤 됐을거에요.”

     

    “많이 컸네. 몰라볼 뻔했어.”

     

    “네.”

     

    “흰꼬리는 여전하구나.”

     

    “…네.”

     

    네르는 수 년전, 아르윈의 고향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와 닿았던 인연이 네르에게 특이했던만큼, 그녀는 아르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아르윈은 세계수의 양분이 되어주고 있었다.

     

    어린 엘프들은 200년간 세계수의 양분이 되어주어야 하니 말이다.

     

    그들은 세계수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 봉사해야만 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 특이한 모습에 네르는 아르윈에게 다가갔었고, 둘은 짙다고는 할 수 없는 가벼운 인연을 맺었었다.

     

    물론, 그 가벼운 인연조차 네르에게는 특별했지만 말이다.

     

     

    네르는 문득 의아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르윈님, 현재 나이가…”

     

    “….170살이야.”

     

    평균 수명이 타종족의 10배가 넘어가는 엘프로 감안했을 때, 아르윈은 아직 성년이 지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

     

    “…어떻게 영지를 벗어나신 거예요?”

     

    성년이 지나지 않은 엘프는 셀레브리엔 영지를 떠날수가 없다. 아직도 30년은 남아있을 터였다.

     

    “…다른 장로님들도 허락을 해주셨거든.”

     

    “이유가…”

     

    아르윈은 차가운 표정 그대로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너랑 같은 이유야.”

     

    “….네?”

     

    “정략혼.”

     

    “………….”

     

     

    네르는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그 자리 그대로 굳었다.

     

     

    그 동안 아르윈이 설명한다.

     

    “세계수가 공격당할 위기에 있어. 세계수의 양분이 되어주는 것 따위…이제 중요치 않아. 존속이 위험에 빠졌는걸.”

     

    하지만 이후의 설명은 어째서인지 네르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정략혼이라는 말에 자꾸만 눈이 깜빡여진다.

     

    “…아, 상대는 단장님이신-”

     

    “-아니, 부단장. 이름이…베르그던가.”

     

     

    네르는 아주 가벼운 무언가가 심장을 톡 누르고 지나감을 느꼈다.

     

    “…아.”

     

    또 동시에 느껴지는 의문.

     

    아담이 있는데 왜 또 베르그일까.

     

     

    그러며 아무렇지 않은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것도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가슴부근이 잠시 뻐근해진 이유를 파악하려 했다.

     

    베르그가 인족인 이상 다수의 아내를 거느릴건 예상하던 바였고, 그를 좋아하지도 않을텐데 이 느낌은 뭘까.

     

    왜 조금 놀랐을까.

     

    베르그가 이 혼담을 받아들일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러는 동안 아르윈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 네르.”

     

    “네?”

     

    네르는 그녀의 사과에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왜요?”

     

    “너희 문화로는… 한 명이 한 명의 짝만 두잖아. 나조차도 아내가 되면 분명 싫겠지.”

     

    아르윈도 이미 베르그의 아내가 네르인걸 알고 있는 듯 했다.

     

    “…”

     

    네르는 곧장 그 말에 미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이유일 것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래서 잠시 뻐근했을 거다.

     

    문화적으로 너무 말도 안되는 상황이니.

     

     

    동시에 네르는 제 감정은 잠시 미뤄두었다.

     

    영지가 마물들에 공격당하는 느낌이 어떤지 아는만큼, 위로를 건넨다.

     

    “…아르윈님, 힘드시겠어요. 영지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윈.

     

    “조금 두렵긴 해. 일이 잘 풀리길 바랄 뿐이야.”

     

    동시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 네르.”

     

    “네?”

     

    “아직 혼인하기로 결정된것도 아니야. 원래는 네 남편이 나를 거절했어.”

     

    “아.”

     

    그리고 들려온 사실에 어째서인지 곧장 납득이 간다.

     

    자신이 아는 베르그라면 분명 그랬을 것 같았다.

     

     

    “…사랑 받고 있구나?”

     

    아르윈이 차가운 표정을 깨며 농담처럼 말했다.

     

    네르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생소한 감정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

     

    아르윈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한다.

     

    “…걱정하지는 마. 설령 혼인하게 되더라도 방해는 안될게.”

     

    “…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벌컥 열린다.

     

    네르와 아르윈의 눈이 모두 그 문을 향해 쏠렸다.

     

    베르그가 가장 앞서서, 진중한 얼굴로 걸어나온다.

     

     

    그는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며 네르에게 곧장 다가왔다.

     

    “가자.”

     

    “베, 베르그?”

     

    팔목을 부여잡는 베르그.

     

    이어서 엘프의 장로, 아스칼이 걸어나왔다.

     

    네르는 그에게 예를 표하기도 전에 베르그에게 끌려갔다.

     

     

    장로가 외쳤다.

     

    “고민 좀 해보게!”

     

    “…”

     

    베르그는 답이 없었다.

     

    그냥 굳은 얼굴로 네르를 쭉 이끌었다.

     

     

    ****

     

     

    베르그는 집에 도착한 이후로 술을 계속해서 마셨다.

     

    딱히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마신다기보단, 고민을 안주삼아 술로 한숨을 돌리는 듯 했다.

     

    애초에 베르그는 술을 좋아했다.

     

    오늘은 평범했던 날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시는 정도였다.

     

    네르는 그런 베르그의 잔을 옆에서 계속해서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술잔을 채울때마다, 베르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창을 열고 뒷마당을 감상하는 베르그.

     

    그가 중얼거린다.

     

    “확실히 달은 안보이네.”

     

    셀레브리엔 가문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산책의 이야기로 다투던 베르그와 네르였다.

     

    하지만 네르는 이미 일전의 다툼 따윈 잊은지 오래였다.

     

     

    네르는 그렇게 침묵을 지키다, 끝내 용기를 끌어모았다.

     

    “…베르그?”

     

    “…”

     

    “어떻게 된 일이야?”

     

    베르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한 표정으로 그가 잠시 네르를 훑더니 설명했다.

     

     

    “얼마전에 아담 형이 또 다른 혼담을 제안했었어.”

     

    “…”

     

    “그때 거절했었는데…엘프 장로가 한번 더 설득하겠다고 온거야.”

     

     

    여기까지는 이미 네르도 아는 이야기였다.

     

    네르는 이어질 베르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보다는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

     

    하지만 베르그는 말이 없었다.

     

    네르는 기다리다 못해 다시금 물었다.

     

    “…베르그?”

     

    “…”

     

    “그 다음은?”

     

    “…”

     

     

    베르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그가 고민중이라는 사실은 저명했다.

     

    “고민…중인거야?”

     

    네르가 묻자, 베르그는 눈을 꾹 감았다 뜬다.

     

    “…난 싫어.”

     

     

    그가 어떤 이유로 거절하려 하는 건지는 이미 감이 잡혔다.

     

    아마도 자신 때문에 거절하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눈치를 보는 것도 그 증거의 일환이었다.

     

     

    네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 혼담에 대해 고민을 했다.

     

    처음에는 그리 좋지 못한 기분을 받았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문화가 너무도 달랐기에 놀란것일 터였다.

     

     

    하지만 이후로 네르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맞는 일인지 계산해보았다.

     

     

    일단 첫 번째로…여기서 베르그가 혼담을 거절한다면, 수많은 엘프들이 죽을 것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엘프들도 아니다. 일면식이 있는, 아르윈 같은 엘프들이 죽어나갈 거다.

     

    한 사람의 결정으로 수 많은 목숨이 좌우된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느낄 불쾌감 때문에 이들을 외면하는게 맞을까?

     

     

    두 번째로는…

     

    “…”

     

    네르는 몰래 베르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언젠가는 떠나려고 한 상대다.

     

    다른 부인이 있다면 떠나는게 더 수월하지 않을까.

     

    이후에 몸값 협상을 할 때, 더욱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아르윈이 없는것보다, 있는게 어쩌면 이점이 더 많아보였다.

     

    애초에 아르윈이라는 또 다른 친구가 곁에 있는 것도 많은 힘이 될거고.

     

     

    네르로서는 상식적으로 아르윈을 밀어낼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랬다.

     

     

    그러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난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봐.”

     

    그러자 베르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

     

    조금은 커진 그의 목소리.

     

    하지만 네르는 차분히 제 의견을 표출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그러면 난 괜찮아.”

     

    “…”

     

    “다른 이유가 있는거라면 모르겠는데…내가 이유라면…”

     

    “…”

     

    “내가 싫다고 거절하는 거면 수 많은 엘프가 죽게 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아르윈님이랑은 서로 알기도 한단 말이야…”

     

    “…서로 아는 사이였어?”

     

    “…응.”

     

     

    베르그는 네르의 말에 고민이 깊어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르는 어째서인지 심장이 두근대고 있었다.

     

    이런 제안을 스스로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네르.”

     

    베르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베르그는 다시금 조심스레 네르의 손을 잡았다.

     

    최근들어 익숙해지고 있던 베르그의 행동이었다.

     

     

    네르는 베르그를 거부하지 않고, 외려 그의 눈을 바라본다.

     

    “…다시 말하지만…난 싫어.”

     

    “…”

     

    “어차피 어느 선택을 해도 사람은 죽어. 물론…혼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엘프가 수십배로 죽기는 하겠지만.”

     

    “…”

     

    “그러니 어느쪽도 힘든거라면, 나는 내 기분을 우선시하고 싶어. 난 나에게 더 이득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고.”

     

    “…”

     

    “그런 입장에서 이 혼담이 너와는 분명 맞아들지 않는 문화라는 걸 알아. 그러니 묻는 거야.”

     

     

    네르는 그 말에 눈을 잠시 피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그는 똑같이 물어온다.

     

     

    “…너 정말 괜찮은거 맞아?”

     

     

     

    네르는 떨려오는 심장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이게 역시나 맞는 길이었다.

     

    “…응.”

     

     

    그 말에, 베르그의 표정이 한층 차분해진다.

     

     

    베르그는 말 없이 술잔을 한번 더 꺾어마셨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그래.”

     

     

     

    ****

     

     

    깊은 밤.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신 베르그는 이미 골아떨어진 후였다.

     

    하지만 네르는 아직까지도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해 두 눈이 밝게 떠 있었다.

     

     

    왜 자꾸만 아까의 선택이 뇌리에 남아있는지 알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계속해서 되짚었다.

     

     

    네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떠날거잖아. 뭐가 문제야.’

     

    친구를 빼앗기기 싫어 한 가문을 외면할만큼 악독한 그녀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편이었다면 어쩌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랑의 감정을 몰라 그게 얼마나 짙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베르그는 아르윈에게 양보하고, 먼 훗날 떠나면 될 일이었다.

     

     

    네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심장에게 그만 좀 뛰라고 짜증을 내고 싶었다.

     

     

    -툭.

     

    그리고 그 순간, 베르그가 몸을 뒤척이며 팔 하나를 네르 앞으로 둘렀다.

     

    “….”

     

    네르는 굳은 듯 그의 팔에 깔린다.

     

    부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잠자리.

     

    예전같았다면 놀라 밀어냈겠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럴수가 없었다.

     

     

    네르는 자신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의아한 욱씬거림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 아래에서 또 한참을 씨름해야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ppark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다니 다행입니다ㅎㅎ! 하지만…피폐파트는…사람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볍게 가기가 힘들것 같습니다ㅠㅠ 그조차도 재밌게 보실 수 있도록 힘내볼게요! 감사해요!

    Raeni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아이고 제가 첫 후피집이라니 영광이네요. 재밌게 봐주셔서도 감사합니다…!

    백승운1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ㅋ제 필명만 보고 따라와주셨다니ㅠㅠ 감사해요.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재밌게 써볼게요! 감사해요!

    여러분, 연참은 아니지만 연참 분량입니다…! 연참맛을 조금이나마 느끼셨으면 하네요!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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