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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들것에 실려가는 황자를 보며, 버멜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군.’

         

       이제부터 잘해야 한다. 버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잠시 볼 일이 있어서.”

         

       클리온 황자의 뒤를 밟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버멜은 화장실에 들리는 척 양호실로 향했다.

         

       버멜 호르데. 입학식에서 벌어진 마수 소동에서 교수진과 함께 학생들을 인솔하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였다는 공로로 표창장을 받은 엘프 남학생이 바로 그였다. 그의 비범한 행적은 이사장인 로베스피에르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였다.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이사장은 학기 초 버멜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 무얼 원하나?

         

       이사장의 질문에 버멜은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지갑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자금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카우렐리아에서 번 돈으로 졸업 때까지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버멜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 그걸 달라고? 자네가 그걸 어찌 알고 있나?

         

       버멜이 이사장에게 주문한 건 최상급 고유마도가 담긴 스크롤의 작성식이었다. 게임에서 고인물 플레이어들이 루트를 짤 때 가끔 챙겨가는 희귀한 물품이었다.

         

       대결 이벤트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클리온은 죽어도 별 상관없는 존재였다. 애초에 그는 게임 엔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인내심이 부족한 플레이어들은 여캐에 클리온이 집적거리는 게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클리온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주곤 했다.

         

       ‘하지만 전개가 바뀌었다.’

         

       대부분의 루트에서 클리온과 대결을 벌이는 건 이르카거나, 혹은 주인공이다. 특히 주인공의 능력치가 클리온과 비슷하면 주인공은 클리온과 대리전을 벌이게 된다. 거기서 재수 없는 제2황자를 깨부수고 나면 이르카의 구원 서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버멜은 이미 카우렐리아에서 웬만한 기연을 다 얻고 왔는지라 클리온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과 대결을 벌이지 않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상태였다.

         

       ‘아까 전의 전개대로라면 이르카가 제2황자와 싸워야 했겠지만….’

         

       이번에도 변수가 생겨버렸다.

         

       ‘에테르가…. 진짜 빙의자인가?’

         

       잘 모르겠다. 자신과 같은 게임 플레이어라고 하기에는 행동 패턴이 이상했다.

         

       그럼에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클리온의 대결을 받아들이기 전에 자신의 표정을 읽었다는 것.

         

       ‘내 반응을 살피면서 행동하는 것일지도 몰라.’

         

       소름이 돋았다.

         

       버멜은 세차게 도리질을 친 뒤 당장 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그가 직접 짜 놓은 공략 빌드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클리온이 보였다. 그 옆에는 랩실코트를 입은 보건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자신처럼 귀가 길쭉하고, 눈은 초록색 계통이었다.

         

       엘프였다.

         

       ‘세피아 글리스턴. 전 세계를 뒤져봐도 이 사람보다 치유계 마도를 잘 다루는 사람은 없어.’

         

       치유계 고유마도는 흔하지 않다. 흔했더라면 제국은 전투마도사를 좀비마냥 갈아 넣어서 북방전선을 밀어버렸을 것이다.

         

       ‘세피아 선생님이 틸레트에 계신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카우렐리아 출신의 엘프이기 때문이다. 제국인으로 태어났더라면 북방에서 평생 구르셨겠지.’

         

       물론 카우렐리아도 그녀를 잡아 남부 해상 전선에 투입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세피아는 두 나라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 틸레트에서 보건교사를 하는 정도로 타협을 봤다.

         

       ‘게임 설정하고는.’

         

       실제로는 주인공 일행을 도와주기 위한 편의적 장치였지만 말이다.

         

       “어라, 친구니?”

       “황자의 상태는 괜찮은가요?”

       “웬만한 처치는 해 뒀어.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야. 아, 그게 지금이려나 보네.”

         

       세피아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클리온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으윽.”

         

       ‘대형 캘리퍼스로 머리를 얻어맞았는데 이걸 살다니…. 세피아 선생님의 치유마도가 그만큼 수준급이라는 소리겠지.’

         

       버멜은 세피아의 능력에 대해선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도 지금은 황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클리온이 실눈을 뜨며 버멜을 쳐다보았다. 표정이 어딘가 멍한 것으로 봐서는 원래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럼 난 잠시 나가 있을게.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줘.”

         

       세피아 선생님이 자리를 뜨자마자 버멜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한 손에 돌돌 말아쥐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

       “아니….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윽, 머리가…!”

         

       황자의 반응을 본 버멜은 안도했다.

         

       ‘세뇌가 풀렸군.’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에서 풀려난 인물들이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몇 시간 이내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클리온에게는 이르카에게 결투 신청을 했던 기억도, 에테르와 싸우다가 머리에 강타를 얻어맞고 혼절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넌 조금 전까지 다른 여학생과 교정결투를 벌였어. 거기에서 졌고, 부상을 입어서 여기 왔지.”

       “정말인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만…. 혹시 내가 술이라도 마시고 무례를 범했었나?”

       “그래, 꽤 큰 사고를 쳤지.”

         

       버멜의 말에 클리온 황자는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 클리온에게는 잠시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수 분 동안 자신의 머릿속을 탐방하던 클리온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블랜튼 공작에게 엘리예프 자작가의 영애를 어떻게 하겠다는 말까지는 들은 것 같은데…. 설마 그 때문인가?”

       “맞아.”

         

       짤막한 신음이 양호실 벽면을 따라 기어올라갔다. 클리온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인생만사 술이 문제군. 이래서 무턱대고 과음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아니, 술 때문이 아니야.”

       “음, 그럼 뭐가 문제였단 말이냐? 내가 맨정신으로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

         

       얘기하자면 길었다. 설득하려면 종일 걸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귀찮고 어려운 루트였지만, 성공한다면 클리어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황실에 뿌리를 뻗고 있는 마수들의 껍질을 한 번에 벗겨낼 절호의 기회.

         

       그 기회는 오로지 클리온이 중반부까지 살아있어야만 가능하다.

         

       **

         

       “그게 사실인가?”

       “정말이야.”

         

       이야기는 극적으로 진행됐다.

         

       “블랜튼 공작이 절멸급 마수라고?”

       “그래.”

       “나는 그 사람에게 세뇌를 당해 몹쓸 짓을 하고 다닌 거고?”

       “맞아.”

         

       클리온 황자는 버멜의 말을 온전히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지만, 일단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버멜에게서 말을 주워섬긴 클리온은 짐짓 침음을 흘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황실 전체가 마족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뜻이 된다.”

       “아직이야. 아직 완전히 마수들 쪽으로 제국이 넘어간 건 아니야.”

       “네 말을 사실이라 믿고도 대응할 방법이 있다고?”

       “황자, 네가 잘만 해주면.”

         

       그러면서 버멜이 내민 것은 수십 인치에 달하는 길이를 자랑하는 스크롤이었다. 그 스크롤의 안쪽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서로 교차하며 위상 사이의 견고함을 더하고 있었다.

         

       마전지에 새겨진 구축식이 복잡하다는 건, 그만큼 그 마법의 급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이게 뭐지?”

       “세뇌를 막을 수 있는 대비책.”

         

       [최상급 고유마도 ─ 불복종(Disobedience)]

         

       버멜이 이사장에게 주문한 스크롤에 새겨진 구축식이었다.

         

       완성된 ‘불복종’ 수식은 극히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버멜은 틸레트 아카데미의 이사장이 어떤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이 구축식을 얻어올 수 있었다.

         

       “24시간에 한 번씩, 여기에 마력을 흘리고 나오는 분진을 들이마쉬면 돼. 그러면 블랜튼 공작의 세뇌를 피할 수 있어.”

       “…한번 해 보지.”

         

       클리온은 아직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성에서 무언가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눈치만 채준다면 제2황자를 악당에서 조력자로 꾀어낼 수 있으리라.

         

       예로부터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게 가장 좋은 전술이라고 했다. 클리온에겐 황자라는 권력이 있으니 동료로 포섭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도움은 될 터였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기껏해야 1단계를 밟은 것에 불과하다. 버멜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클리온으로 하여금 블랜튼 공작을 끌어내고, 그 빈자리에 다른 인물을 채우는 것이었다.

         

       버멜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클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거야?”

       “미안하다. 황실의 이름을 달고 국민 앞에서 추태를 부려서.”

       “아니, 네가 사과할 게 아니지. 잡아내야 할 건 블랜튼 공작이니까.”

       “기억이 없더라도 내가 급우들에게 한 짓은 달라지지 않는다. 황자로 태어나서 그 정도 책임도 지지 못한다면 제국을 이끌 재목이 되지 못하는 거겠지. 어쨌건 세뇌에 저항하지 못한 내 문제가 크다.”

         

       클리온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다. 그는 곧 다른 학생들에게도 결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굽어가는 허리를 폈다.

         

       “아니, 당장 그건 안 돼?”

       “…아, 그렇군.”

         

       황자는 버멜이 무슨 말을 함의하려는지 단번에 눈치챈 모양새였다.

         

       “내가 이상행동을 보이면 블랜튼 공작이 날 제거할 가능성이 있겠군.”

       “그러니 당분간은 망나니 황자를 연기해야 해. 할 수 있겠어?”

       “레이디에게 욕 먹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니 얘, 세뇌되기 전에도 여자 밝히는 건 여전했지.’

         

       선만 넘지 않을 뿐이지, 어지간한 미인에게는 들이대고 보는 놈이 클리온이었다. 오죽하면 클리온의 세뇌를 풀어주고 갱생 루트로 가면 주변 인물에게 고백했다가 차이는 게 일상이 되는 개그 캐릭터로 전락할 정도로 그는 여자에 환장한 캐릭터였다.

         

       아무래도 클리온은 에테르에게 더 맞을 운명인가 보다. 버멜은 짐을 정리한 채 양호실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없었다.

         

       다음 단계는, 제1황자를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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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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