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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주서연 배우님, 그리고 표지우 배우님.”

       

       조도율은 서연과 표지우를 불러 말했다.

       

       “두 분의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거든요. 혹시 4막 3장 가능하실까요?”

       

       4막 3장.

       이건 남주인공 ‘배성학’이 아닌, 여주인공 송민서를 위협하는 장면이다.

       음습함과 불길함 속에 내제된 홍정희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부분.

       

       ‘물론, 대본을 다 외워둔 건 맞아.’

       

       서연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오디션을 위해 연습한 3막과 달리, 4막 3장은 대사는 전부 외웠어도 직접 연기를 펼쳐본 적은 없었다.

       

       “……연기를 펼치기 전, 잠시 연습 시간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하셔도 됩니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후 말했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다. 

       다른 배우들의 질문이 금방 끝난 탓이다.

       

       “그럼.”

       

       10분만 연습시간을 가져보겠다고 서연이 말하려던 순간.

       

       “전, 됐어요.”

       

       딱딱한 표지우의 말소리가 들렸다.

       서연의 시선이 움직이고, 그녀의 눈과 표지우의 눈이 마주쳤다.

       

       “당장해도 괜찮아요.”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서연을 향해, 표지우는 웃었다.

       마치 도발하는 것처럼.

       

       ‘자, 어떻게 할래?’

       

       보아하니 자존심이 강한 계집애다.

       조금 비웃어준 걸 그대로 되받아친 것만 봐도 그렇다.

       

       천재 아역?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래봤자야.

       

       표지우는 진심이었다.

       방금 조도율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녀는 ‘홍정희 역’의 어떤 장면도 상관없었다.

       대본에 등장하는 홍정희의 모든 장면을 달달 외우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펼쳤다.

       

       ‘홍정희는 나.’

       

       누구보다 그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메소드 연기.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

       그녀의 집념.

       

       연극의 관중에 불과하던 그녀가, 이 자리에 설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연습해도 돼.’

       

       표지우는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서연을 보았다.

       고등학생이라고 했지.

       십 대의 계집애라면 이런 도발에 손쉽게 넘어올 게 분명했다.

       

       ‘그럼, 네가 승리할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질 테지만.’

       

       표지우는 서연을 무시하지 않았다.

       분명, 방금 본 연기는 정말 괜찮았다.

       제법 홍정희와 닮은 연기였다.

       

       만약 연습시간을 준다면, 또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재수없게 질 수도 있었다.

       

       그런 건, 표지우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할게요.”

       

       서연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과 목소리다.

       하지만 그 눈에 서린 명백한 승부욕에 표지우는 입매를 비틀었다.

       

       ‘됐다.’

       

       아무리 대단한 재능이어도, 해보지 못한 걸 잘할 수는 없는 법.

       물론 연습한다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지만, 이건 서연이 홀로 백기를 드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당연히 조도율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역시 아직 고등학생인가?’

       

       설마 이렇게 표지우의 도발에 간단히 넘어가다니.

       

       ‘너무 감정적이면 안 좋은데.’

       

       서연에 대해 평가를 하향 조정하려던 찰나.

       

       “대신.”

       

       서연의 말이 그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이번엔 제가, 표지우 배우님 다음에 해도 괜찮을 까요?”

       “표지우 배우님 다음이요?”

       “네. 이전에는 제가 먼저 했으니까요.”

       

       당돌한 서연의 말에 조도율은 잠시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상관없다는 의사를 표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연기는 표지우 배우님이 먼저 하는 것으로 하죠. 표지우 배우님은 괜찮습니까?”

       “……네.”

       

       무슨 생각이지?

       표지우는 입가를 씨근덕거리며 서연을 보았다.

       얼굴을 봐도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마치 인형 같다.

       감정 표현이 옅고, 그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우니.

       

       “4막 3장입니다. 홍정희가 송민서의 앞에 나타나 협박하는 장면.”

       

       그런 조도율의 말고 함께.

       표지우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너, 네, 네가 특별한 줄 알아?」

       

       떨리는 목소리, 홍정희는 벽에 송민서를 몰아붙이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쿵, 하고 벽을 치며 몸이 떨렸다.

       등이 굽은 홍정희이기에 그 시선은 정면.

       송민서의 신장을 완벽히 고려한 시선 처리다.

       

       겁먹은 송민서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다.

       

       「너, 너는 그냥 동, 동정하는 거야. 우리 오빠가 착해서, 귀가 들리지 않는 병신 같은 년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조된 감정을 나타내듯 떨리는 눈동자.

       무대의 관객은 그 감정을 볼 수 없을 테지만, 표지우의 시선은 심사위원을 향했다.

       

       동시에, 표지우의 손이 움직였다.

       허공.

       보이지 않는 벽을 내리치듯 그 허공을 때렸다.

       팔이 정말 벽에 부딪친 것처럼 몸이 떨렸다.

       

       홍정희의 격한 감정과 폭력성을 나타내는 표시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공격성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홍정희의 방어 기재에서 나오는 과도한 반발.

       

       표지우는 그것을 말을 토해내며, 그 몸짓으로 격렬하게 나타냈다.

       

       ‘이런.’

       

       조도율은 그 광경을 보며 말을 잃었다.

       다른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꿀꺽 목소리를 삼켰다.

       

       ‘거의 홍정희 본인이잖아.’

       

       표지우는 홍정희의 대사를 그대로 읊는다.

       그 목소리에 담긴 열등감.

       공포, 그로 인한 폭력성.

       

       ‘이건, 아무리 주서연이라 해도…….’

       

       첫 3막 6장의 연기는 비슷했다.

       서로 다른 색채의 홍정희를 나타냈다.

       

       어느 쪽이나 채용할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배역에겐 맞는 배우가 있는 건가?’

       

       표지우는 너무도 배역에 잘 어울렸다.

       그 감정의 표현, 동작.

       마치 이 배역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안 되겠군.’

       

       서연에게는 아쉽지만, 이 배역은 표지우의 것.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을 보자.

       

       조도율은 뭔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서연의 눈이 표지우를 직시하고 있었다.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표지우를 보았다.

       붉은 눈.

       어둠 속에서 묘하게 그 눈이 붉게 느껴졌다.

       

       ‘분명.’

       

       그런 조도율의 시선 속에서, 서연은 생각했다.

       

       ‘홍정희를 표현하는 건 표지우가 위야.’

       

       처음 표지우가 두 번째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서연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역시 이 배역은 당신의 것이구나.

       솔직히 말해, 안 된다고 하면 순순히 승복하고 물러설 생각이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

       혹은 연극을 찾아보면 그만이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도,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놓이자 그런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승부욕.

       

       서연은 또 새로운 감정을 강렬히 느꼈다.

       새로운 자신을 깨달았다.

       

       ‘나는.’

       

       지는 걸 싫어하는구나. 하고.

       

       「새, 생각해봐, 송민서. 귀머거리인 너를 진심으로 호감을 품을 사람이 있을까?」

       

       표지우를, 그리고 그녀가 나타낸 홍정희를 표상한다.

       그녀가 나타내는 감정을, 행동과 움직임을 눈에 새긴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멍하니 지금 그녀가 표현하는 모든 정보를 담는다.

       하나씩, 또 하나씩.

       

       「까불지마, 까불지 말라고!!」

       

       이건, 그래.

       습관적인 공부다.

       또한 전생의 자신이 펼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이었다.

       

       감정이란 화폭(畫幅)을 모사하는 것.

       

       「내가 훨씬 더 전부터 좋아했어.」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상 매체를 접했나.

       수많은 책을 읽고 그 막연한 무언가를 나타내고자 망상했나.

       

       「그런데, 가, 갑자기 끼어든 건 너야.」

       

       서연은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붓을 들었다.

       

       지금 표지우가 나타내는 홍정희의 감정을 모사(模寫)한다.

       그녀의 화폭(畫幅)을 따라 작은 물감 하나 놓치지 않고 붓을 놀린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서연이 나타낼 수 있는 감정 모사는 한없이 진짜에 가깝지만, 메소드 연기와 마찬가지인 표지우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

       

       「송민서어어어!!」

       

       쾅, 하고 송민서의 머리채를 움켜쥔 홍정희가 벽에 그 머리를 찍으려던 순간, 팔이 우뚝 멈췄다.

       배성학이 등장하여 홍정희의 팔을 움켜쥐는 장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끝났습니다.”

       

       담담한 그 말에, 심사위원들은 멍한 얼굴로 짝짝, 박수를 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홍정희의 연기였다.

       

       이 이상의 연기가 과연 나올까? 싶을 정도로.

       

       ‘예전에 홍정희 배역을 누가 했었지?’

       

       이 ‘눈을 감고’는 이미 한 번 대학로에서 3년 전 초연(初演)했던 연극이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재연(再演).

       그런데 표지우를 보고, 이전에 홍정희 배역을 누가 맡았는지 순간 떠오르지 않았을 정도다.

       

       “그럼 다음은, 주서연 배우님.”

       

       조도율은 담담히 서연을 부르며 그 얼굴을 살폈다.

       아직 고등학생인 서연이라면, 이 연기에 큰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아까 보았던 서연의 눈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담담한데요?’

       ‘멘탈 쎄네~.’

       

       심사위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방금 연기는 어지간해선 큰 압박을 가질 연기였다.

       

       차라리 먼저 연기를 펼치는 것이 나았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4막 3장의 연기 기대하겠습니다.”

       “네.”

       

       담담한 대답.

       서연은 앞으로 나왔다.

       방금, 표지우가 섰던 바로 그 장소에.

       

       그런 서연을 보며 표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묘한 계집애.’

       

       이래도 표정 변화 하나 없다니, 재미없는 녀석이었다.

       

       ‘흐, 흐흣.’

       

       아무튼, 표지우는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방금 펼친 연기는 여태까지 표지우가 홀로 연습했던 어떤 연기보다 좋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았다.

       

       ‘심사위원에 서호 오빠가 있어서 그런 거야.’

       

       은밀히, 표지우는 민서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민서호의 몸이 조금이지만 부르르 떨렸고, 주변을 살피는 게 보였다.

       

       역시 홍정희는 자신이다.

       민서호와 함께 연극을 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할 수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1년 전, 민서호가 이 연극의 출연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담담한 서연의 말과 함께.

       4막 3장.

       서연이 펼치는 홍정희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응?’

       

       처음, 가장 먼저 이질감을 느낀 건 당사자인 표지우였다.

       서연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몸짓.

       

       얼굴에 드러난 감정.

       움직이는 눈동자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절박한 호흡.

       

       ‘이, 이 계집이!’

       

       움직인다. 

       그 몸이 행동이 발을 움직이며 나아가는 블로킹(blocking)이 누군가를 그대로 닮아있었다.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표지우, 자신이다.

       

       「너, 네, 네가 특별한 줄 알아?」

       

       그녀가 나타낸 ‘홍정희’의 감정을 빼다 박은 듯이 움직였다.

       

       ‘나를 따라했구나! 그래, 나를, 나를 흉내내서……?’

       

       감정선을 타며, 내뱉는 대사.

       분명 표지우가 나타냈던 감정과 닮았다.

       

       ‘뭐야?’

       

       그런데, 뭔가 달랐다.

       

       ‘단순히 정보를 이해하고 모방한 것 만으론 안 돼.’

       

       아역 때면 괜찮았겠지만, 이제는 기준이 다르다.

       결국 모방한 연기로는 절대 표지우를 못 이긴다.

       

       그러니.

       이번에 서연이 사용한 감정모사는, 어디까지나 배역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표지우가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건 결국 그녀가 홍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했기 때문.

       서연이 그녀보다 감정선이 부족했던 건, 결국 홍정희라는 인물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

       

       표지우가 나타낸 홍정희의 감정을 모사하고 이해했다면.

       이제 준비는 끝났다.

       

       배역에 완벽히 빠져들 준비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디션은 다음 화로 끝! 입니다!! 본래 이번 화로 오디션 끝나고 이어 표지우의 귀여운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예상보다 길어져서… 이렇게 됐습니다..
    다음화 보기


           


I Want to Be a VTu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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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I definitely just wanted to be a VTuber... But when I came to my senses, I had become an 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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