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40

       원작의 전투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JRPG의 전투방식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게임들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턴제 전투라는 틀 안에서 나름대로 변주하여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전투방식 때문에 그 전투만으로 스토리 연출을 하는 것에는 상당히 큰 제약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거대한 전장’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같은 일본에서 만든 턴제 RPG라도 만약 장르가 SRPG라면 전장 그 자체를 담아내기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특히 1차세계대전의 참호전을 묘사하며 참호에서 참호로 이동하는 과정을 담아내기에는 최적의 장르가 아닌가. 실제로도 그런 비슷한 게임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시리즈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이 게임은 비교적 전통적인 JRPG식 전투방식을 채택했고, 덕분에 전투만으로 상황을 연출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다.

        

       뭐 어쨌거나.

        

       그래서 개발사에서 선택한 방법은 바로 ‘연전’이었다.

        

       하나의 전투를 끝내면 이벤트 신 후 다음 전투로 넘어가고, 다시 이벤트 신 후 다음 전투로…… 그렇게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면 저 임시 참호를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고, 도중에 지게 되면 탈락 처리되게 된다. 불이익은 포상으로 나오는 아이템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사실 초반에 아주 잠깐 도움이 될 정도의 아이템이다.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걸 남이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게임에서는 그런 아이템은 모조리 내 차지였는데.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충이라도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혜택을 가지고 가지 못하면 기껏 이 세상으로 넘어온 이유가 없다.

        

       뭐 내가 넘어오고 싶어서 넘어온 건 아니긴 하다만.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이쪽 세상에서 쌓아온 이미지에 악영향이 갈 수 있다. 기껏 ‘무슨 일이건 다 할 수 있다’라는 이미지를 세워놨는데 ‘쟤도 이건 안되는구나’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귀찮은 건 그냥 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쌓아둘 걸 그랬나?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특히 ‘시스템적’으로 얻는 아이템들— 그러니까, ‘성공 보상으로 ●●●을 얻었습니다’ 같은 식으로 메시지가 뜨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어떨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이 세계에는 딱히 상태창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이미 시스템적으로 막혀있던 부분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다면 전부 가능하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세계관이나 스토리 외에 ‘시스템이 관여하던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이길 필요가 있었다.

        

       “빛……?”

        

       내 말을 들은 미아 크로우필드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밝은 빛을 내뿜으면, 여러분의 시야도 가리게 될 텐데요?”

        

       미아 크로우필드가 굉장히 미심쩍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애초에 빛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안 보인다면 그 사람 시신경이나 뇌에 큰 문제가 있다는 소리고.

        

       환각에 관련된 마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큰 범위의 수십 명을 상대로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게임을 클리어하는 내내 그런 마법을 본 적은 없다.

        

       ……하늘이 열려서 거대한 손이 튀어나와 레이저를 쏘거나 하는 마법은 본 적 있지만.

        

       “……왜 그렇게 보시죠?”

        

       내가 미아 크로우필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그래. 게임에서야 그냥 ‘최대한 멋있어 보이게’만든 연출일 뿐이다. 슈●로●대전 시리즈의 기술처럼. 실내고 실외고 할 것 없이 그냥 막 쓸 수 있는 기술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스킬이나 마법들이 현실에서는 또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것도 언젠가는 확인해봐야겠지.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그 마법이 나한테 날아올 수도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어야 했고.

        

       “가능하십니까?”

        

       가능할 거다. 원작에선 가능했으니까.

        

       미아의 특기는 얼음과 물에 관련된 마법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에서는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과 ‘추가 장비를 해야 쓸 수 있는 마법’으로 나뉜다. 특기라고 해서 특별히 더 강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 덕분에 다른 마법들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진 ‘마법 공격력’이 월등히 높기도 했고.

        

       장비만 맞춘다면 다른 캐릭터들도 똑같은 마법은 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마법 자체가 전혀 없다 보니 쓸 수 있는 마법이 한정되고, 마법 공격력이 좋지 못하니 데미지나 효과도 반감된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 ‘마법’ 자체를 쓸 수 있는 캐릭터는 미아 크로우필드 하나뿐이고.

        

       “…….”

        

       대답 없이 질문만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미아 크로우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학생회에서도 살기를 내뿜긴 했지만, 결국 내가 학생회라면 자기도 들어가겠다고 말했던 미아 크로우필드였다. 친해지고 말고를 떠나, 내 주변에 있어야 내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증거도 찾을 수 있고, 혹시 기회가 왔을 때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당장 그 아버지가 했던 일에 대해서 밝힌 뒤 미아 크로우필드와 오해를 푸는 건 불가능하다. 분위기가 분위기이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시도는 해봤으니까. 아마 우리 단둘이 있는 곳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준다고 해도 얘는 전혀 믿지 않을 거다.

        

       자기 아빠가 약쟁이에 소아성애자였다는 말을 해봐야 누가 믿고 싶겠는가.

        

       본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이 마법 지팡이는……”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저 ‘밝은 빛’을 ‘최대한 멀리’ 보내주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

        

       원작에서는, 다들 눈을 가린 채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간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하지만, 레오도,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제니퍼도 ‘성공한 건 대단하지만 실전에서 그러지 마라’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 나라는 변수가 끼어든다면 어떨까.

        

       ‘우연’이 아닌 ‘필연’.

        

       물론 내가 하려는 짓도 백 퍼센트 우연에 기대는 일이긴 하다만.

        

       뭐, 어차피 상대가 보기에는 필연만 남을 테니까.

        

       시선을 살짝 돌려보니 제니퍼가 내 쪽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아마 지난번의 대련 이후로 나에게 관심이 조금 생긴 모양이다.

        

       제니퍼라면 ‘황제의 아이들’의 소문도, 그리고 크로우필드 백작의 죽음에 연관된 의문도 어느 정도 들어봤을 거다.

        

       “그럼, 이쪽으로.”

        

       내가 몸을 돌려 원래 소속되어있던 조로 돌아가자, 한 박자 늦게 미아 크로우필드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 크로우필드가 떠나는 것을 보고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그만큼 무서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미아 크로우필드가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던 모양이거나.

        

       *

        

       “……우리는 그렇다 치고.”

        

       내 계획을 들은 앨리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어쩌려고? 앞이 보이지 않으면 총을 쏴도 맞지 않을 텐데.”

        

       “엄호 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맞추지 않을 자신은 있고?”

        

       “자신 있습니다.”

        

       “……뭐, 좋아.”

        

       내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은 앨리스였기에, 나의 말에 결국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앞이 보이지 않는데……”

        

       “실비아가 그렇다잖아.”

        

       레오가 꺼내던 의심스러운 말도 클레어가 막아버렸다.

        

       ……원래는 네가 제안하던 작전인데 말이지. 하긴, 그때는 자기네 등 뒤에서 총을 쏴주겠다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

        

       클레어는 아무래도 내 능력에 대해서 의심 없는 것을 넘어 일종의 신앙 수준인 것 같긴 하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고.

        

       샤를로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의심이 담긴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묘한 확신이 담긴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자기 아버지한테 뭔가 들은 것이 있는 게 틀림없다.

        

       “저는 찬성하겠어요.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결국 샤를로트도 그렇게 말했다.

        

       “그럼, 언제 밖으로 나가면 될까?”

        

       모두 의견이 한곳에 모인 것을 확인하고, 앨리스가 나에게 물었다.

        

       “타이밍은—”

        

       내가 생각하던 타이밍에 대해서 말해주기 위해 입을 여는데,

        

       “돌겨어어어어억!”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미아 크로우필드가 있던 그룹이었다.

        

       “지금.”

        

       내가 미아 크로우필드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일어나 주문을—

        

       “미아 크로우필드! 탈락!”

        

       —외우려다가 총에 맞았다.

        

       ……다시.

        

       *

        

       “지금!”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바로 일어나 상대 쪽을 보았다. 얼굴만 쏙 나와 있는 상대방을 향해 총을 쏘자, 상대방에게 곧장 탈락 통보가 떨어졌다.

        

       “룩시나!”

        

       빛이여!

        

       게임 세계관 내의 오리지널 언어인 정령어와 사람의 언어가 함께 겹쳐 들리는 것은 꽤 신기했다.

        

       생각해보니 마법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세계에 와서 정작 마법을 쓰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네.

        

       한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그 빛 덩어리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섬광탄이라기보다는 엄청나게 환하게 밝혀진 전등을 보는 느낌이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자동차의 상향등을 똑바로 보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자동차 상향등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빛은 사방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상황을 보자면 빛이 가까운 저쪽도 마찬가지지만, 이쪽에서 보기에도 저기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앨리스, 샤를로트, 클레어, 레오가 곧장 모래주머니를 뛰어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는 엽총 한 자루씩을 들고 있었다.

        

       뭐, 좋아.

        

       어쨌거나 작전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볼트를 뒤로 잡아당겼다. 탄피를 빼내고, 차탄을 장전한다. 그 과정이 조금 경쾌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의 위치라면 이미 이전에 몇 번이고 봤다.

        

       찰칵!

        

       물론 맞추는 건 별개지만.

        

       방아쇠를 당겨도 ‘탈락!’하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시!

        

       *

        

       내가 모래주머니를 뛰어넘은 것은 먼저 돌격한 사람들이 거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였다.

        

       물론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빛 때문이었다.

        

       나에 대한 감정은 어쨌거나, 미아 크로우필드는 내 지시에 충실히 따라 몇 번이고 하늘에 빛 덩어리를 띄웠다.

        

       그사이에 나는 상대를 몇 명이고 쓰러뜨렸다. 일곱? 여덟? 숫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빠르게 쏴서. 다만 한 발에 한 명씩 쏘며 총을 다른 총으로 바꿔 들어야 했으니 적어도 여섯 명 넘게 쓰러뜨린 셈이다.

        

       약실 한 발, 탄창에 다섯 발 들어있는 산탄총을 든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전, 나는 미아 크로우필드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 남아서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해 주십시오.”

        

       내 말에 그녀는 다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아마 내 말을 들어줄 거다.

        

       뭐, 들어주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다. 나는 나대로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니까.

        

       아마 지금쯤 다른 일행들은 참호 바로 근처까지 도달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래주머니를 뛰어넘었다.

        

       “으꺅!”

        

       그리고 곧장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

        

       아주 잠깐의 침묵.

        

       순간 전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은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아마 그것까지는 아니리라. 그냥 내 기분 탓이겠지.

        

       그냥…… 아마도 저 위쪽에서 바라보고 있을 제니퍼나, 내 뒤쪽에서 앞을 살피던 미아 크로우필드 정도나 봤을 거다.

        

       개쪽팔리네.

        

       다시!

        

       *

        

       다행히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다시 보니 모래주머니 앞에 작은 돌멩이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나는 그걸 밟고 넘어진 모양이었다.

        

       좋아.

        

       그럭저럭 멋지게 뛰어넘었다는 확신이 들어, 나는 곧장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는 빛을 최대한 보지 않고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한 채, 지그재그로 전진.

        

       그동안에 총격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우리 쪽 말고 다른 귀족 조원 측에서도 넘어가는 데 성공한 학생들이 있을 거다. 모래주머니 너머에서 뛰어다니고 뭔가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아마 그쪽도 공황 상태인 모양이었다.

        

       열심히 뛰다 보니, 평소의 대낮보다 더 환하게 밝혀진 운동장에 쌓인 모래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있는 힘껏 달려 그 모래주머니 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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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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