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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왜.

       

       하필이면 왜.

       

       지금 이 순간에.

       

       수십 년간 걸쳐야 했던 베일을 걷어내는 오늘에서야.

       

       그토록 기다려왔던 대면식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 감시자가 잠적해버린 걸까.

       

       설마.

       

       엘든 라펠리온에게 들켜버린 걸까.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돼.

       

       겔우드 경도 그랬잖아.

       

       실력으로 치자면 업계 최고 수준이라고.

       

       그런 실력자가 엘든 같은 인간에게 발각되었을 리 없잖아.

       

       아니면, 그 여성 호위기사에게 발각된 걸까?

       

       ‘……설마.’

       

       자색의 여기사란 이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실력가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게 탐색 능력의 척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잖아.

       

       상대는 은신에 특화된 업계 최고 실력자라고.

       

       그래.

       

       아닐 거야.

       

       그저, 무언가 차질이 생겼을 뿐이겠지.

       

       잠적이 아니라 부재일 거야.

       

       모종의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거겠지.

       

       보고를 올리지 못 할 정도로 급한 용무가 생겨 잠시 본분을 망각한 거겠지.

       

       그래.

       

       “……아가씨?”

       

       그럴 거야.

       

       그래야만 돼.

       

       쥐새끼처럼 얄밉게 도망치는 엘든 라펠리온에게 작은 빌미 하나 제공할 수 없으니까.

       

       “아가씨!”

       “어?”

       

       단상의 뒤편에 서있던 르미앙이 마리엔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외성에서 중앙 광장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상념에 깊게 빠져있던 르미앙이 마리엔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괴인족장의 저주로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다.

       그 저주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모진 일들을 당해야 했었다.

       그것을 벗어나, 이제 르미앙 윈터펠로서 세상에 발돋움을 하는, 그토록 꿈꿔왔던 순간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 머릿속엔 다시금 엘든 라펠리온에 대한 생각들로 복잡했다.

       

       “왜?”

       “정신 차리셔야죠. 아가씨께서 평생을 꿈꿔온 순간이잖아요.”

       “아… 응.”

       

       기뻐야 할 순간이다.

       이제 이 답답한 가면을 벗어버리고 세상 앞에 떳떳히 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제게 지옥을 선물해 주었던 4인방 앞에 당당히 나서 참회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선포할 수 있으니까.

       한데, 기쁨보다 불안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설렘보다 짜증이 솟구치는 건 왜일까.

       해방감보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하….”

       

       한숨을 토해내는 르미앙.

       불안, 짜증, 답답함.

       한숨 한번에 그것들을 털어내기 힘들지만, 애써 머릿속을 비워낸 르미앙이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꺾어야 보이는 드높은 계단.

       그 끝에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르미앙 윈터펠 대공녀님을 모시겠습니다-!”

       

       

       단상 너머에서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꼬집어 올리며 첫 발을 계단에 올렸다.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레 계단을 밟으며 단상으로 올라가는 르미앙.

       평소 구두보다 단화를 좋아했던 터라, 걸음이 쉽지 않지만 오늘을 위해 연습도 했었다.

       넘어지지 않으리라.

       4인방의 앞에 우뚝 서 환히 웃으리라.

       그리 다짐하며 계단을 오른 르미앙이 그 끝에, 단상의 위에 섰다.

       

       보였다.

       

       먼발치에 서서 자신을 우러러보는 만백성이.

       

       보인다.

       

       한참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4인방이.

       

       “꺄- 대공녀님!”

       “우오오-! 가면으로 가리셨음에도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잖아?!”

       “엄청 예쁘실 거 같아~!!”

       “대공녀님! 여기 좀 봐주세요-!!”

       

       중앙 광장이 떠나갈 세라, 우렁차고 열렬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함성을 내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사람들.

       감격에 겨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

       그런 그들을 아울러보는 르미앙.

       

       완벽한 순간이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꿈꿔왔던 것대로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

       

       그 벅찬 행복이 찰나로 스쳐갔다는 것과 엘든 라펠리온의 얼굴이 시선에 잡히자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착각이 든다는 거였다.

       분명 표독스럽고 매서운 살쾡이의 눈이었는데, 어느샌가부터 그의 눈은 순둥한 강아지의 것처럼 변해있었다.

       그 순진무구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무얼까.

       의중을 모를 저 순한 눈동자가 무언갈 꼬집는 듯한 건 왜일까.

       정말, 비밀 감시가 들통난 걸까.

       설마, 그것을 무기로 삼으려는 걸까.

       

       불안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어떤 심정으로 지옥을 견뎌내어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어떤 마음으로써 오늘을 준비하고 내일을 계획하며 계단을 올라왔는데.

       이 단상에서 내려가는 순간, 그가 기권 승인을 종용하며 모든 것을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종용을 받아줄 생각은 없지만, 자꾸만 그에게 휘말리고 있다는 느낌은 불안감을 종용하기에 충분했다.

       

       억울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불안을 느껴야 하는 이 불합리한 상황이 너무도 억울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쏟게끔 만들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이 불안과 억울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하루만 더 이르게 겔우드 경의 충고를 들을걸, 이란 후회가 밀려왔다.

       소득 없는 보고에 아집을 피우지 말걸, 이란 후회가 밀려왔다.

       

       “자-! 그럼 르미앙 윈터펠 제 3대공녀님께서 가면을 벗고 이 세상에 고결한 이름을 널리 알리시겠습니다-!”

       

       제 속도 모른 채, 속절없이 진행되는 대면식.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오직 엘든에게 꽂혀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가면을 잡았다.

       다른 3인방의 반응은 예상이 갔지만, 엘든의 반응은 눈곱만큼도 예상되지 않았다.

       데론과 블런드, 카일은 1차, 2차 암시를 통해 이상함을 느꼈을 터다.

       검증을 위한 시험이라기엔 과함을 느꼈을 터다.

       그렇기에,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색에 상관없이 과거를 떠올릴 터였다.

       

       과연.

       

       엘든은 어떠할까.

       

       그의 표정을 예의주시하며, 천천히 가면을 벗는 르미앙.

       

       “오오-! 드, 드디어-!”

       “어서 그 절세미모를 보여주십시오-!”

       

       그 가면이 내려가며 그녀의 매끈한 이마를 드러내었을 때, 광장엔 환희가 피어올랐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드러내었을 때, 희열을 피어올랐고, 그녀의 오똑한 코를 드러내었을 때, 열락이 피어올랐고, 그녀의 붉은빛 입술을 드러내었을 때,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와아아-!!”

       “꺄아아-!!”

       

       그럼에도, 르미앙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1초.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2초.

       

       그의 눈썹이 들린다.

       

       3초.

       

       그의 눈이 커진다.

       

       4초.

       

       그의 입이 벌어진다.

       

       5초.

       

       경악서린 그 얼굴로 그대로 굳어버린다.

       

       ‘…….’

       

       그렇게.

       

       제 정체를 알고 도망치는 것이란 가설조차 검증에 실패하는 르미앙이었다.

       

       물론.

       

       엘든의 얼굴에 깃든 것은 다른 의미를 담은 경악이었지만.

       

       

       

       

       

       

       

       

       

       **

       

       

       

       

       

       

       

       

       

       ‘와…! X발, 저게 뭐야. X나 예쁘잖아?’

       

       미쳤다.

       돌았다.

       저게 사람이야?

       여신이 강림한 건가?

       아니.

       

       ‘표지에 있던 일러스트는 AI 복붙한 것 같은 평범한 느낌이었는데?’

       

       더군다나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얼짱도 투턱괴물로 만든다는 구도임에도 여신급 미모를 뽐낸다고?

       꽤나 먼거리임에도 이목구비가 저렇게 또렷할 수가 있다고?

       원작 엘든의 기억 속 에린시아보다 훨씬 예뻐진 거 같은데?

       아리엘의 말대로 붉은색보다 새하얀 머리색이 찰떡 궁합이라 그런 걸까?

       

       그야말로 조각 장인이 아닌 눈의 여신이 직접 자신을 빚어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아름다움이다.

       최첨단 기술인 AI조차 구현해내지 못 한 극강의 미모를 영접하니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세간에 떠돌던 ‘추녀’란 풍문이 가당치도 않은 거짓이었음을 단번에 증명할 정도로, 르미앙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였으니까.

       

       후광이 비친다.

       그 말도 안되는 허언이 진언임을 알려주는 천상의 미모.

       아무래도 우리 여주인공께선 사진빨(?)이 안 받는 타입이었던 듯 싶다.

       물론 미적 기준이란 게 개인의 취향에 따라 편차가 있다지만, 아마도 르미앙의 미모는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찬양만 있을 것을 자부했다.

       만약 원작 소설이 여성향 로판 후피집물만 아니었다면, 첫눈에 반해버렸을 정도로 황홀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와아아-!!”

       “꺄아아아-!!”

       

       짝짝짝짝!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쩌렁하게 울리는 함성과 박수 갈채는 그녀의 미모에 부연 설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왔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저 환호와 환희로 가득찬 인파들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아리엘이 보였다.

       

       ??????????????????

       

       인지부조화가 온듯, 온통 물음표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백발의 에린시아와 독대했던 그녀였으니까.

       그 표정이 웃겨 피식 실소가 나올 뻔했지만, 여기서 웃었다간 르미앙에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꾹 참은 후.

       시선을 옆으로 틀어 후회캐 3인방들을 보았다.

       

       예상대로.

       

       “…!”

       “…?!”

       “…!!!?”

       

       사색이 된 얼굴로, 그리고 당혹과 불길한 눈빛으로 서로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의아했을 거다.

       1차, 2차 평가전이 평범치 않았으니까.

       경악이 깃든 면면들을 보아하니, 암시를 주겠다던 여주인공의 계획이 제대로 먹혀든 듯 싶다.

       

       잠시 후.

       

       또각.

       

       또각.

       

       또각.

       

       르미앙이 단상의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경악.

       후회캐 3인방 입장에선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나도 대공녀님을 가까이서 뵙게 싶어-!”

       “대공녀님! 제발! 여기도 와주세요오-!!”

       

       그렇게 단상을 내려와 지면에 발을 내딛은 르미앙.

       좌측부터 데론, 블런드, 카일, 나.

       순서대로 서있었고, 그녀의 인사를 가장 먼저 받은 이는 데론이었다.

       

       르미앙이 손을 내밀자, 손등에 입을 맞추는 데론.

       그 뒤, 르미앙이 인사를 건넸지만 시끌벅적한 광장에 어떤 내용인진 들리지 않았다.

       인사가 길어질수록 사색을 넘어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로 보아, 평범한 인사는 아닌 듯 했지만.

       

       그렇게 블런드를 거쳐 카일의 앞에 선 르미앙.

       

       똑같은 인사를 건네는 듯 했는데, 그녀가 가면을 벗은 순간부터 휘청거렸던 카일이 눈을 까뒤집으며 풀썩,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후피집의 시작을 알리는 졸도였다.

       

       “꺄-! 대공녀님의 우월한 미모에 카일 공자님이 쓰러지셨어!”

       “역시! 귀공자께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인 거야-!!”

       

       물론 내막을 모르는 대중들의 눈엔 나라마저 기울게 만든다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감당치 못 한 졸도로 보였지만 말이다.

       블런드가 급히 카일을 부축했고, 르미앙이 내게 다가왔다.

       

       ‘와… 가까이서 보니 더 미쳤네. 진짜 X바 X나 예쁘네.’

       

       육두문자가 절로 나올 정도로, 가까이서 보니 실물 깡패가 따로 없다.

       늘 수수하게 다녔던, 귀족가 영애에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꼴로 다녔던 에린시아였건만, 풀메이크업을 한 르미앙을 보니 사뭇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말없이 손등을 내밀었고, 백옥과 같은 손등에 입술을 맞춘 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래도, 정녕 제 고백을 거절하실 건가요?”

       

       

       왕국을 홀릴 엄청난 자신감이 건네져왔다.

       

       

       ……

       

       

       ………

       

       

       …………

       

       

       어우.

       

       하마터면 ‘아니요’라고 답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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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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