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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파스텔은 사과 농장을 혼자 거닐었다.

         

       사과파이, 사과주스. 사과와인 등등의 대접을 받은 뒤 멜리사에게 농장 안내를 받다가 혼자 구경하고 싶다 양해를 구한 참이었다.

         

       멜리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거렸지만 비자금에 정신이 팔린 파스텔은 못 본 척했다.

         

       미안, 멜리사.

         

       나 같은 인기인에겐 친구 스케줄의 교통 정리가 필요한 법이야. 오늘 네게 쓸 시간은 없어. 비자금 친구와 지내기로 했거든.

         

       허억.

         

       비자금 친구.

         

       심장을 콩닥콩닥하게 해주는 친구!

         

       비자금 친구가 농장 땅속에서 구조 요청을 해왔다.

         

       구해줘요~, 구해줘요~.

         

       날 꺼내줘요~.

         

       으아아.

         

       친구가 위험에 빠졌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파스텔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손날을 눈썹에 대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농장을 훑어봤다.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허억.

         

       온통 사과나무.

         

       매우 넓은 농장은 무질서한 사과나무와 정리하지 않은 식물로 가득했다. 비자금은커녕 길 잃기 딱 좋다. 피해자가 꽤 있는지 군데군데 나무 팻말이 거리와 길을 알려줬다.

         

       으윽.

         

       미아가 될 거 같아.

         

       악마님악마님 거리며 울 거 같아.

         

       “기다려 친구!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파스텔은 몸을 숙여 지면에 귀를 기울였다. 비자금의 소리를 듣다가 이번엔 냄새를 맡아봤다.

         

       킁킁.

         

       뱃속에 들어간 통돼지구이 친구, 도와줘!

         

       킁킁 킁킁.

         

       『뭐 하는 거지?』

         

       움찔.

         

       파스텔은 비자금의 냄새를 더 맡아보다가 몸을 일으키고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농장이 너무 넓어서 절망한 바람에 이상한 짓을 한 건 절대 아니에요.”

         

       끄덕끄덕.

         

       “그보다! 여기 너무 넓지 않아요?”

         

       양팔을 펼쳤다. 빙글빙글 돌자 시야에 닿는 온 사방이 농장이었다. 규모가 자연 수준인 게 사과나무 숲에 울타리만 둘러놓고 농장이라고 우기는 거 같다.

         

       “비자금 친구가 우엥우엥 울고 있어도 못 찾을 규모예요!”

         

       파스텔도 우엥우엥.

         

       이런 곳에서 어떻게 숨겨진 비자금을 도굴해 낸단 말인가. 그것도 남의 농장인데.

         

       『별수 없다. 탁월한 결실은 성실한 노력 끝에 얻어지는 거니.』

         

       악마가 말하곤 멈칫했다.

         

       『비자금 찾기가 성실한 노력은 절대 아니긴 하다만.』

       “허억.”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맞아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죠!”

       『아니, 성실하진 않다. 곡해해서 듣지 마라.』

       “성실한 파스텔……!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남의 농장을 도굴하려고 하면서 무슨 소리냐.』

         

       파스텔은 조언을 받들어 열심히 비자금을 수색했다. 비자금을 묻으며 남은 흔적이 없나 땅을 살피고 인위적인 식생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웬 바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는 파스텔의 무릎 높이쯤 될 크기였는데 인위적 무늬가 언뜻 보였다. 의심쩍게 살피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자국처럼 느껴질 정도로 미묘한 무늬였다.

         

       오잉.

         

       명탐정 파스텔의 촉이 반짝반짝.

         

       명탐정의 뛰어난 두뇌로 추론한 결과 이곳에 비자금의 실마리가 보였다!

         

       파스텔은 팔짱을 끼고 바위를 내려봤다. 진중한 얼굴로 오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떤 기만과 위장도 명탐정 파스텔 앞에선 무용지물!”

         

       에헴.

         

       “기만과 위장을 파훼하는 초지성!

         

       양 검지 손가락을 머리에 댔다.

         

       “초지성 추론……!”

         

       이야압.

         

       각종 단서가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형이상학적 논리를 거쳐 고차원적인 결론을 만들어 냈다.

         

       삐슝~!

         

       해답이 보였다!

         

       명탐정 파스텔은 당당히 바위를 가리켰다.

         

       “이것은……!”

       『이 아래 있겠군.』

         

       악마가 눈치 없이 말해왔다.

         

       파스텔은 바위를 가리킨 채 굳었다.

         

       『겉면을 살짝 파서 확인해 보고 밤에 삽을 챙겨 돌아오는 게 좋겠어. 아마 묻힌 내용물은 부피가 크지 않을 거다. 금화 주머니에 어음 수표가 있지 않을까 싶군.』

         

       가차 없는 부연 설명.

         

       으아아.

         

       명탐정이 되지 못한 파스텔은 양팔을 휘저었다.

         

       “악마님 완전 나빠! 사악! 악마 그 자체!”

       『왜, 왜 그러지?』

         

       악마가 당혹스러워했다.

         

       “왜 그러냐니요! 그냥 악마님을 악마님이라 불렀을 뿐이거든요! 에베베베~!”

       『왜 그러는 거냐.』

         

       파스텔은 악마를 무시하고 바위 아래를 팠다.

         

       양손으로 땅을 우다다다.

         

       “빨랫감 만들기~!”

         

       흙이 푸바바박 튀며 하얀 옷을 더럽혔다.

         

       『어린 크래프트?』

         

       악마가 경악했다.

         

       파스텔은 뿌듯해졌다.

         

       뿌드읏.

         

       이것이 무수한 경험이 담긴 빨랫감 만들기.

         

       보호자를 약올릴 수 있답니다~.

         

       배덕감은 서비스~.

         

       오예.

         

       악마의 속삭임을 한 귀로 흘리며 땅을 팠다. 발목이 잠길 만큼의 깊이를 파곤 손을 털었다.

         

       “겉면을 파긴 했는데 뭘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하아. 기다려 봐라 살펴볼 테니. 흠. 흙에 마법 처리가 돼 있군. 비자금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마법 처리?

         

       그러고 보면 흙에 검은 마석 가루 같은 게 미세하게 섞인 듯도 하고.

         

       “탐색 마법 차단 같은 효과의 흙이에요?”

       『맞다.』

       “헤에.”

         

       파스텔은 옅은 구덩이를 다시 덮었다. 발로 꾹꾹 다지고 슬쩍 살펴봤다. 촉촉한 안쪽 흙이 뒤엎어져서 그런지 색이 짙었다.

         

       “속전속결로 끝내버리죠!”

         

       오늘 밤 도굴!

         

       오예.

         

         

         

       #

         

         

         

       멜리사는 달을 멍하게 올려봤다.

         

       ―크래프트가 못 믿을 대상이긴 해도 계속 다가오는 또래 친구를 차갑게 거절하면 어떡하니, 없던 원한도 생기겠다.

         

       기억 속 어머니가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남남처럼 지내는 게 불가능하면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렴.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건 정말 사람 그림자를 말하는 게 아니야. 어두운 속사정에 얽히지 말라는 얘기란다.

         

       사람 그림자가 아니었어?

         

       멜리사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파스텔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태양의 방향을 보고 그림자가 늘어지는 방향을 경계하는 등 세세한 신경을 썼다. 파스텔은 대뜸 달려와 인사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였지만 몇 번의 실수를 빼곤 완벽히 해냈다. 괜히 친한 척하며 다가오는 파스텔의 그림자를 예의주시한 결과였다.

         

       근데 헛수고였다니.

         

       멜리사는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테라스 난간을 잡아 중심을 잡았다. 저택 옆 사과 농장이 내려 보였다.

         

       이번에도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아무리 크래프트라도 숨 쉬듯 나쁜 짓을 할 리 없죠.

         

       오늘도 그래요. 순수하게 절 만나기 위해 영지까지 찾아왔잖아요. 그런 친구를 역병 피하듯 도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어요.

         

       멜리사는 주먹을 꼭 쥐었다.

         

       친구가 되자.

         

       아무리 크래프트라도 숨 쉬듯 나쁜 짓을 할 리 없으니까.

         

       한편 그 시각 파스텔은 사과 농장에 숨어들어 바위 아래를 삽질하고 있었다.

         

       허억.

         

       완전 범죄.

         

         

         

       #

         

         

         

       파스텔은 성실한 노력 끝에 과실을 얻을 수 있었다. 구덩이를 파던 삽을 내려놨다. 이마의 땀을 훔쳤다.

         

       “후우.”

         

       이것이 참된 노동인가.

         

       숨 쉬듯이 매일 할 수 있을 거 같아.

         

       뿌듯.

         

       땅속에서 언뜻 드러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얼추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다.

         

       “작네요.”

         

       금괴는 없을 듯.

         

       『금은 묻어놓기 탁월하지만 여긴 엄연히 캐머롯 영지니 말이다.』

         

       하긴.

         

       흙을 털어내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두근두근.

         

       먼저 보인 건 금화 주머니였다. 금화로 상자를 꽉 채우긴 해도 상자 사이즈 상 비상 여비의 용도 같다.

         

       주머니를 챙기고 내부를 살펴봤다. 가죽으로 포장된 수표들이 있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수표들은 각종 상단과 기관에 크래프트와 무관해 보이는 듯한 여러 명의로 안전하게 분할됐다.

         

       금액을 종합하자 긴 숫자가 정신에 들어왔다.

         

       잉.

         

       0이 몇 개고 쉼표가 몇 개…….

         

       점점 금액이 자각되자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허억.

         

       내 전 재산의 열 배……!

         

       파스텔 열 명 몫……!

         

       양팔을 번쩍 들었다.

         

       “우와앙!”

         

       감탄사가 밤하늘을 갈랐다.

         

       상쾌한 하루!

         

       오예.

         

       그러다 흠칫했다.

         

       『흠.』

         

       허억, 맞아.

         

       여기 남의 사과 농장.

         

       나는 도굴꾼.

         

       삽을 다시 쥐고 후다닥 구덩이를 덮었다. 흙더미를 푹 퍼서 차곡차곡 밀어 넣고 삽으로 토닥토닥했다.

         

       흔적도 없이 말끔.

         

       수표를 소중하게 품에 챙겼다. 완전 수상쩍은 삽을 들고 사과 농장을 달렸다. 어디선가 사냥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아아.

         

       후다다닥.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오!

         

       그냥 밤 산책이 좋았을 뿐이에요……!

         

       무수한 사과나무를 지나쳤다. 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단박에 달려가 울타리를 잡고 뛰어넘었다. 몸이 붕 뜨다가 착지했다.

         

       파스텔은 그대로 후다닥 도망쳤다. 계획했던 수풀에 삽을 숨기고 어색한 휘파람을 불며 저택 산책로에 들어섰다.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면 됐다.

         

       괜히 뒤를 힐끔힐끔.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파스텔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완전 범죄.

         

       “악마님! 악마님! 저 완전 소질 있는 거 같아요!”

         

       도굴계의 신성!

         

       오예.

         

       악마가 어이없어했다.

         

       『……그건 자랑이 아니다.』

         

       허억.

         

       그렇구나!

         

       충격.

         

       충겨억.

         

       아하하.

         

       파스텔은 혼자 웃고는 품에서 수표를 꺼냈다. 가죽 포장을 벗기자 화려한 숫자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아! 마음이 따드읏!”

         

       수표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은 아름다워~.”

         

       너도, 나도 아름다워~.

         

       노래에 맞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래프트?”

       “맞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내 이름은 파스텔 러브, 으에?!”

         

       파스텔은 화들짝 놀랐다.

         

       가벼운 복장의 멜리사가 산책로를 걸어왔다.

         

       “메, 메, 멜리사?!”

         

       파스텔은 몸을 떨다가 수표를 품에 집어넣었다. 어색한 휘파람을 불었다.

         

       “무슨 일이야 멜리사아?”

         

       정말 모르겠어.

         

       멜리사가 살짝 쑥스러워하며 머뭇거렸다.

         

       “잠이 안 와서요.”

       “아하!”

         

       정말 아무 일도 아니구나.

         

       휴우.

         

       파스텔은 잠 못 든 친구를 위해 목소리의 톤을 가다듬었다. 평소보다 낮춘 텐션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데 같이 걸을래?”

       “……좋아요.”

         

       산책로를 걸었다. 파스텔이 밤 시간을 고려해 일부러 대화를 걸지 않자 고요한 산책 시간이 이어졌다.

         

       곤충의 지저귐이 들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저택이 가까워졌다.

         

       멜리사가 힐끔 바라봤다.

         

       “크래프트,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앗, 얼마든지.”

         

       멜리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동안 당신을 밀어낸 제 행실을 사과할게요. 무례했어요. 이런 절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라도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린 원래 친구였잖아.”

       “그건…….”

         

       멜리사가 머뭇거리다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런가요.”

         

       그리곤 달을 올려봤다.

         

       “그동안 당신을 너무 오해한 거 같아요. 아무리 크래프트라도 숨 쉬듯이 나쁜 짓을 할 리는 없죠. 사람이니까요.”

         

       파스텔은 순간 굳었다. 품속 금화 주머니와 수표가 무겁게 느껴졌다.

         

       허억.

         

       갑자기 양심이 찌르르.

         

       파스텔 ← 숨 쉬듯 나쁜 짓을 하는 애.

         

       으아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생계형 비리로 봐주세요오!

         

       파스텔은 양팔을 허둥댔다. 멜리사를 턱 잡았다. 멜리사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크래프트?”

       “사, 사, 사과할 필요 없어! 우린 친구니까!”

         

       완전 양심이 찌릿찌릿.

         

       친분 쌓겠다는 목적으로 와놓고 하는 짓은 농장 도굴인 완전 나쁜 애가 된 기분.

         

       근데 기분이 아니라 사실인……!

         

       “내일부턴 정말 친구처럼 지내자! 아, 맞아! 멜리사의 평소 일상을 같이 보내는 거야! 과거의 고민도 망설임도 잊고 같이!”

         

       티파티를 하며 하하호호.

         

       허억.

         

       찻물 호로록.

         

       쿠키 냠냠.

         

       완전 귀족 아가씨의 일상.

         

       “같이요.”

         

       멜리사가 쑥스러워했다.

         

       “크래프트, 그럼 내일은 같이…….”

         

       남부 사령관의 후계자가 말했다.

         

       “적멧돼지를 토벌하러 갈까요. 민가에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이 있어서요.”

         

       토벌?

         

       오잉.

         

       다음날 파스텔은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멜리사에 의해 강제로 깨워졌다.

         

       그리고 머리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마구간에 끌려가 말을 배정받았다.

         

       이슬비가 내렸다.

         

       오이잉.

         

       내 티파티는 어디?!

         

       찻물 호로록, 쿠키 냠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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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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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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