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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이미지하는 것은 귀족 영식.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은 살짝 치켜들며 눈은 오연하게 내리깔았다.

       

       그 상태에서 리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디아 경.”

       

       “……!”

       

       리디아의 반쯤 감긴 눈이 부릅떠졌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리디아에게는 최상급의 감정표현이나 다름없는 반응.

       

       흔들리는 적색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걸.

       

       그 틈을 타 빠르게 설정을 정리했다. 이쪽은 내 특기 아닌가.

       

       어디 보자…일단 모험가 복장을 입고 있으니 평범한 귀족은 안 되겠지. 몰락 귀족으로 가자.

       

       정쟁에서 밀려 몰락한 귀족. 작위는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가문.

       

       부모는 암살자에게 당해 죽었고, 하나 남은 남동생은 나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스스로 원수의 첩이 되었다.

       

       …그리고 첫날밤을 치른 다음 날에 자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으니.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이다.

       

       오직 나만이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고.

       오직 나만이 복수를 행할 자격이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마.

       

       평생 잡아본 적 없는 검을 쥐는 것도, 천하다고 여긴 모험가들 사이에 섞이는 것도, 그리고…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기사를 이용해 먹는 것마저.

       

       결코 마다하지 않으리라.

       

       …응. 어쩌다 보니 조금 다크해졌지만, 몰락 영식이라면 이 정도 배경은 있어야지.

       

       철부지 귀족이 모험가 놀이 해보겠답시고 호위 기사 하나만 대동한 채, 미궁을 쏘다니는 컨셉도 나쁘진 않긴 한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리디아의 로망을 충족시키느냐 아닌가.

       

       그리고 기사라면 철부지 도련님을 모시는 것보다, 사연 있는 도련님을 모시며 복수의 선봉에 서는 것을 좋아할 터.

       

       귀족 예법은 잘 모른다는 소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애초에 이건 일종의 플레이. 적당히 그럴싸하면 충분하겠지.

       

       머릿속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세운 뒤,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

       

       “당신을 원합니다 리디아 경.”

       

       ***

       

       리디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가 아는 요나는 작고 귀엽지만, 하는 짓은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분홍 머리 미소년이었다.

       

       어두운 과거가 있음에도 최대한 이를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잘못 배우긴 했을 뿐 여전히 사람을 잘 따랐고.

       

       출신이 출신인지라 생기 넘치는 매력이 있긴 하나, 도련님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요나는 어떠한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세운 자세. 분명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내려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분홍색 눈동자에는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의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요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원합니다 리디아 경.”

       

       “…어?”

       

       당황한 리디아가 멍청한 소리를 내는 사이. 요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빠르지는 않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느린 편. 하지만 그렇기에 시선이 더욱 집중되는 잘 계산된 발걸음이다.

       

       어느새 리디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요나의 입에 쓴 웃음이 걸렸다.

       

       “물론, 제가 경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지요. 훌륭한 무구도, 드높은 명예도, 심지어 작은 땅덩어리 하나 내어줄 수 없으니까요.”

       

       어찌 보면 비관처럼 들리는 말. 그러나 요나의 목소리에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나열한다는 듯 담담하게 울려 퍼졌을 뿐.

       

       “대신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뭐…?”

       

       리디아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야한 어필은 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를 어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성급한 판단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제 몸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죠. 필요하다면 얼마든 내어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안된답니다.”

       

       순간 요나의 분위기가 다시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진짜 귀족 영식처럼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무게감을 자아냈다면.

       

       지금의 요나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보다 질척한 무언가였다.

       

       “리디아 경. 당신은 제게 말씀하셨죠.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항상 곁에 있어 주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신가요?”

       

       “…응.”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지만, 요나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리디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엘리의 부탁을 받아서, 기사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그런 거창한 일이 아니다.

       

       리디아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요나에게 연민을 품었으니까.

       

       요나의 과거를 안다. 상식과 괴리된 모습을 알며,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리라. 아닌 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리디아에게는 그러하다.

       

       허나, 이런 리디아의 얄팍한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요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럼 저와 함께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주실 수 있을런지요?”

       

       “…뭐?”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웃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어중간한 각오로 발을 디뎠다가는 크게 후회할 거라는 경고였다.

       

       평소의 장난기도, 조금 전까지 엿보이던 신념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날것의 무언가.

       

       그 밀도 높은 감정에 압도당한 리디아의 귓가에 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래 주신다면 저는 리디아 경에게 모든 것을 내어드리지요.”

       

       “모든 것…?”

       

       “예에. 제 몸과 마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세상 가장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뻗어나간 명성? 미궁에 잠든 신들의 무구라도 얼마든 쥐여드리겠습니다. …제 복수의 선봉장이 되어주신다면 말이지요.”

       

       “……!”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요나의 눈에 담겨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세상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마저 불태워 버릴 듯한 격렬한 복수심.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이미 황혼을 삼키는 자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세뇌에서도 풀려났으니 그저 평범하게 사는 방법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만한 일을 겪었으면서 헤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복수.

       

       오직 복수만이 요나를 진정으로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리라.

       

       리디아는 멍하니 요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불쌍한 아이도, 조금 야하고 귀여운 아이도 아니었다. 굶주린 복수귀였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귀신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리디아를 향해 손등을 내미는 자세.

       

       평범하다면 평범한 몸짓이지만, 세세한 모든 것이 귀족식 예법을 따르고 있었다.

       

       한미한 기사 가문 출신인 리디아로서는 도저히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수준.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리디아였으나, 여기에는 재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혼을 삼키는 자는 사이비에 광신도지만…어쨌든 그 뿌리를 성직자에 두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제의 예법을 가르치는 일은 있어도 귀족의 예법을 가르치는 일은 없겠지.

       

       허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나긋나긋한 몸 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요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니야.’

       

       어린 시절에 황혼의 삼키는 자에게 납치당했던 건 알겠다. 하지만 그 이전은? 정말로 요나는 뒷골목 고아인 걸까? 고아라고 쳐도 그 부모는 누구지?

       

       실제로는 요나의 설정이 구체화된 세상인 만큼, 예법 또한 요나의 생각에서 벗어나질 않았기에 일어난 일.

       

       귀족이라면 이런 느낌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지만…리디아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사정이다.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디아. 그런 그녀를 향해 요나는 선택을 종용하듯 손등을 내보였다.

       

       “…….”

       

       “…….”

       

       오가는 말은 없었다. 침묵 속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흔들리지 않는 신뢰뿐.

       

       요나는 진심으로 리디아가 있어 준다면 복수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이다.

       

       이를 자각하는 순간 리디아의 가슴에 한줄기 불씨가 타올랐다.

       

       기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도 리디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 허나,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에 몸을 맡겼다.

       

       철컥.

       

       한쪽 무릎을 꿇고, 요나의 손을 받아 드는 리디아.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낭랑한 목소리가 오래된 맹세의 말을 읊조린다.

       

       “고한다. 나의 의지가 그대의 의지이며, 나의 영광이 그대의 영광일지니. 그대, 나의 대행자가 될지어다.”

       

       “맹세를 이곳에.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의 뜻을 이루겠나이다. 부디 검을 받아주소서.”

       

       부드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장검 하나를 꺼내 받쳐 드는 리디아.

       

       요나 또한 이를 양손으로 들어 검신에 한차례 입을 맞추고는 리디아의 어깨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장난스러움으로 얼버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걸로 공범이네요 리디아 경?”

       

       “아….”

       

       자신이 얼떨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챈 리디아. 요나가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장검을 다시 돌려주었다.

       

       “충직한 기사인 리디아 경에게 부탁이 있답니다.”

       

       “뭐야…요.”

       

       리디아가 어설프게 존대를 덧붙이는 사이. 어느새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요나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러로 가죽 잘라주세요!”

       

       “……?”

       

       꿈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몰려오는 현실감. 아직 얼떨떨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디아를 향해 요나가 우쭐거렸다.

       

       “제가 이긴 거 맞죠? 그러니까 빨리 오러로 아이언 울프 가죽 챙겨요! 80쿠퍼 이대로 버릴 거예요?!”

       

       “…….”

       

       리디아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내 첫 경험(맹세)이….’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기분이었기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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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EP.40





       이미지하는 것은 귀족 영식.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은 살짝 치켜들며 눈은 오연하게 내리깔았다.


       


       그 상태에서 리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디아 경.”


       


       “……!”


       


       리디아의 반쯤 감긴 눈이 부릅떠졌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리디아에게는 최상급의 감정표현이나 다름없는 반응.


       


       흔들리는 적색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걸.


       


       그 틈을 타 빠르게 설정을 정리했다. 이쪽은 내 특기 아닌가.


       


       어디 보자…일단 모험가 복장을 입고 있으니 평범한 귀족은 안 되겠지. 몰락 귀족으로 가자.


       


       정쟁에서 밀려 몰락한 귀족. 작위는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가문.


       


       부모는 암살자에게 당해 죽었고, 하나 남은 남동생은 나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스스로 원수의 첩이 되었다.


       


       …그리고 첫날밤을 치른 다음 날에 자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으니.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이다.


       


       오직 나만이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고.


       오직 나만이 복수를 행할 자격이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마.


       


       평생 잡아본 적 없는 검을 쥐는 것도, 천하다고 여긴 모험가들 사이에 섞이는 것도, 그리고…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기사를 이용해 먹는 것마저.


       


       결코 마다하지 않으리라.


       


       …응. 어쩌다 보니 조금 다크해졌지만, 몰락 영식이라면 이 정도 배경은 있어야지.


       


       철부지 귀족이 모험가 놀이 해보겠답시고 호위 기사 하나만 대동한 채, 미궁을 쏘다니는 컨셉도 나쁘진 않긴 한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리디아의 로망을 충족시키느냐 아닌가.


       


       그리고 기사라면 철부지 도련님을 모시는 것보다, 사연 있는 도련님을 모시며 복수의 선봉에 서는 것을 좋아할 터.


       


       귀족 예법은 잘 모른다는 소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애초에 이건 일종의 플레이. 적당히 그럴싸하면 충분하겠지.


       


       머릿속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세운 뒤,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


       


       “당신을 원합니다 리디아 경.”


       


       ***


       


       리디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가 아는 요나는 작고 귀엽지만, 하는 짓은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분홍 머리 미소년이었다.


       


       어두운 과거가 있음에도 최대한 이를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잘못 배우긴 했을 뿐 여전히 사람을 잘 따랐고.


       


       출신이 출신인지라 생기 넘치는 매력이 있긴 하나, 도련님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요나는 어떠한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세운 자세. 분명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내려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분홍색 눈동자에는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의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요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원합니다 리디아 경.”


       


       “…어?”


       


       당황한 리디아가 멍청한 소리를 내는 사이. 요나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빠르지는 않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느린 편. 하지만 그렇기에 시선이 더욱 집중되는 잘 계산된 발걸음이다.


       


       어느새 리디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요나의 입에 쓴 웃음이 걸렸다.


       


       “물론, 제가 경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지요. 훌륭한 무구도, 드높은 명예도, 심지어 작은 땅덩어리 하나 내어줄 수 없으니까요.”


       


       어찌 보면 비관처럼 들리는 말. 그러나 요나의 목소리에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나열한다는 듯 담담하게 울려 퍼졌을 뿐.


       


       “대신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뭐…?”


       


       리디아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야한 어필은 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를 어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성급한 판단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제 몸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죠. 필요하다면 얼마든 내어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안된답니다.”


       


       순간 요나의 분위기가 다시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진짜 귀족 영식처럼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무게감을 자아냈다면.


       


       지금의 요나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보다 질척한 무언가였다.


       


       “리디아 경. 당신은 제게 말씀하셨죠.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항상 곁에 있어 주겠다고. 그 말은 진심이신가요?”


       


       “…응.”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지만, 요나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리디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엘리의 부탁을 받아서, 기사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그런 거창한 일이 아니다.


       


       리디아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요나에게 연민을 품었으니까.


       


       요나의 과거를 안다. 상식과 괴리된 모습을 알며,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고자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리라. 아닌 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리디아에게는 그러하다.


       


       허나, 이런 리디아의 얄팍한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일까. 요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럼 저와 함께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주실 수 있을런지요?”


       


       “…뭐?”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웃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어중간한 각오로 발을 디뎠다가는 크게 후회할 거라는 경고였다.


       


       평소의 장난기도, 조금 전까지 엿보이던 신념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날것의 무언가.


       


       그 밀도 높은 감정에 압도당한 리디아의 귓가에 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래 주신다면 저는 리디아 경에게 모든 것을 내어드리지요.”


       


       “모든 것…?”


       


       “예에. 제 몸과 마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세상 가장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뻗어나간 명성? 미궁에 잠든 신들의 무구라도 얼마든 쥐여드리겠습니다. …제 복수의 선봉장이 되어주신다면 말이지요.”


       


       “……!”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요나의 눈에 담겨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세상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마저 불태워 버릴 듯한 격렬한 복수심.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이미 황혼을 삼키는 자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세뇌에서도 풀려났으니 그저 평범하게 사는 방법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만한 일을 겪었으면서 헤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복수.


       


       오직 복수만이 요나를 진정으로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리라.


       


       리디아는 멍하니 요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불쌍한 아이도, 조금 야하고 귀여운 아이도 아니었다. 굶주린 복수귀였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귀신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리디아를 향해 손등을 내미는 자세.


       


       평범하다면 평범한 몸짓이지만, 세세한 모든 것이 귀족식 예법을 따르고 있었다.


       


       한미한 기사 가문 출신인 리디아로서는 도저히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수준.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리디아였으나, 여기에는 재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혼을 삼키는 자는 사이비에 광신도지만…어쨌든 그 뿌리를 성직자에 두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제의 예법을 가르치는 일은 있어도 귀족의 예법을 가르치는 일은 없겠지.


       


       허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나긋나긋한 몸 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요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니야.’


       


       어린 시절에 황혼의 삼키는 자에게 납치당했던 건 알겠다. 하지만 그 이전은? 정말로 요나는 뒷골목 고아인 걸까? 고아라고 쳐도 그 부모는 누구지?


       


       실제로는 요나의 설정이 구체화된 세상인 만큼, 예법 또한 요나의 생각에서 벗어나질 않았기에 일어난 일.


       


       귀족이라면 이런 느낌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지만…리디아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사정이다.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디아. 그런 그녀를 향해 요나는 선택을 종용하듯 손등을 내보였다.


       


       “…….”


       


       “…….”


       


       오가는 말은 없었다. 침묵 속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흔들리지 않는 신뢰뿐.


       


       요나는 진심으로 리디아가 있어 준다면 복수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이다.


       


       이를 자각하는 순간 리디아의 가슴에 한줄기 불씨가 타올랐다.


       


       기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도 리디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 허나,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에 몸을 맡겼다.


       


       철컥.


       


       한쪽 무릎을 꿇고, 요나의 손을 받아 드는 리디아.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낭랑한 목소리가 오래된 맹세의 말을 읊조린다.


       


       “고한다. 나의 의지가 그대의 의지이며, 나의 영광이 그대의 영광일지니. 그대, 나의 대행자가 될지어다.”


       


       “맹세를 이곳에.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의 뜻을 이루겠나이다. 부디 검을 받아주소서.”


       


       부드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장검 하나를 꺼내 받쳐 드는 리디아.


       


       요나 또한 이를 양손으로 들어 검신에 한차례 입을 맞추고는 리디아의 어깨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장난스러움으로 얼버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걸로 공범이네요 리디아 경?”


       


       “아….”


       


       자신이 얼떨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챈 리디아. 요나가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장검을 다시 돌려주었다.


       


       “충직한 기사인 리디아 경에게 부탁이 있답니다.”


       


       “뭐야…요.”


       


       리디아가 어설프게 존대를 덧붙이는 사이. 어느새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요나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러로 가죽 잘라주세요!”


       


       “……?”


       


       꿈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몰려오는 현실감. 아직 얼떨떨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디아를 향해 요나가 우쭐거렸다.


       


       “제가 이긴 거 맞죠? 그러니까 빨리 오러로 아이언 울프 가죽 챙겨요! 80쿠퍼 이대로 버릴 거예요?!”


       


       “…….”


       


       리디아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내 첫 경험(맹세)이….’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기분이었기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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