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사막과 모래, 그리고…
“…어머.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모래 마녀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허나 한번 굳은 분위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에샤가 더듬더듬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 루나를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 하… 조, 조금 당황스럽군. 인간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미안.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루나의 눈꼬리가 아주 살짝 처졌다. 그간 루나를 섬세하게 관찰한 에샤의 빅데이터에 따르면, 지금 굉장히 침울해진 상태다.
“아니, 괜찮다. 그, 크흠. 나이가 뭐 중요하겠나. 그럴 수도 있지. 난 됐다.”
“……!”
루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랑 앞에 나이가 대수랴.
에샤는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깟 나이, 음. 200살이나 연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루나가 연상인 것은 맞았으니까 상관없는 거 아닐까?
“후후. 보기 좋네요.”
모래 마녀의 웃음에 에샤와 루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추태라니!
하물며 상대는 최소 고위급 악마, 어쩌면 대악마와 한 몸이 된 여인.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넘어갔지만. 너,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차르륵.
그림자로 만들어진 모닝 스타가 흉흉하게 빛냈다. 모래 마녀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키하하하! 멍청한 년! 끄릅, 너 같으면 이런 꼴을 한 년을 믿겠냐!》
모래 마녀의 몸에서 튀어나온 검은 점액질이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루나의 모닝 스타가 쏘아지며 검은 점액질을 후들겼다.
푸학!
“으음.”
그 모습을 본 모래 마녀가 신음을 흘렸다.
“자세하게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기니까… 짧게 말씀드릴게요. 일단 앉아요.”
앉으라니?
천막 안에는 바닥에 깔린 양탄자와 모래 마녀가 앉아 있는 의자밖에 없었다.
스윽.
마녀가 손짓하자 바닥의 모래가 솟구치며 의자의 형태를 이뤘다. 에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마와 하나가 되면서 생긴 잔재주랍니다.”
조심스럽게 앉아보니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막에서 모래를 다루는 능력이라. 분명 무궁무진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을 터.
‘그래서 모래 마녀인 건가.’
참 직관적인 이명이었다.
“흐으음. 제가 어렸을 적이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이 사막에 만신전의 영향력이 유독 닿지 않았어요. 아마 모라트리스 사막 때문이겠죠.”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신전의 오랜 고민 중 하나가 동부 사막에 사는 이들의 교화였다.
“만신전의 입김이 약한 것을 노리고 숨어 들어오는 녀석들이 참 많았어요. 저희 부족은, 재수 없게 그중 제법 거물인 녀석들한테 마을 통째로 인질 잡혔죠.”
루나의 표정이 굳었다.
이후의 일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을 단위로 바쳐지는 인신 공양, 악마의 강림, 주변 부족을 몰살 후 심연을 지상에 불러내려 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의 절반이 죽었어요. 전부 번제되었죠.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심장과 영혼으로 고위급 악마를 불러냈어요.”
담담하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모래 마녀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했다.
“아마 우리 밤의 귀족께서는 이렇게 생각했겠죠? 고위급 악마를 불러내고, 다른 마을을 전부 죽여서 제물로 바치고, 심연을 지상으로 불러내고…”
흠칫.
루나가 몸을 떨었다.
“후후. 아니에요.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미친 자들이었어요. 어떤 미치광이가 생각한 거죠. 우리가 언제까지 악마를 모시며 살아야 하지? 악마가 우리를 모시도록 할 수는 없을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꾸르륵ㅡ 모래 마녀의 옆구리에서 검은 점액이 튀어나오더니 스스로 입을 만들고 떠들었다.
《키하하…! 그게 되더군. 설마 버러지들이 진짜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기어코 고위급 악마에게 목줄을 씌우는 것에 성공했죠. 악마를 말 잘 듣는 사냥개로 만든 거예요.”
《인간의 심장 580개, 염소의 두뇌 134개, 암송아지의 눈알 128개, 임산부의 탯줄 99개! 그것들로 나의 목줄을 만들었지! 키하하하!》
“우윽.”
에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듣기만 해도 절로 혐오감이 치밀었다.
“그다음부터는 흔한 이야기예요. 저는 이 녀석한테 바쳐질 산 제물로 잡혀있었는데, 운이 좋게 감옥에서 탈출한 다음 이 녀석과 거래했죠. 제 몸의 절반을 줄 테니,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썩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키하하! 그때 이 몸도, 이 년도 거의 소멸 직전이었거든!》
세상에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죽은 이에게도 사연은 있는데, 살아있는 이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겠는가.
“……안타깝네. 그래도 나는 널 죽여야 해.”
루나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악마는 죽인다. 이단도 죽인다. 그것이 루나의 신앙이었다.
원칙에 예외를 둘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정의는 굳건한 규칙 위에 세워지는 법이니까.
“뭐. 아가씨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저를 죽인다면 원하는 걸 들을 수 없을 텐데요?”
움찔.
도대체 눈앞의 여인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모래 마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요사하게 빛을 흘리는 것 같았다.
“송곳니의 주인, 찾고 싶으시죠?”
“……거래하자는 거야?”
“네. 저는 지금 죽을 수 없거든요. 죽으면 안 돼요. 적어도 아직은.”
“복수를 원해?”
“아뇨. 진작에 다 죽였어요. 자, 칙칙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죠.”
짝! 모래 마녀가 박수를 치자 하인들이 황금 쟁반에 올린 과일을 들고 왔다.
사막 한복판에서 싱싱한 과일이라. 아마 이 황금 쟁반과 비슷한 가치가 아닐까?
모래 마녀는 포도를 한 알 똑 떼서 오물오물 씹었다.
“저는 모종의 이유로 이 오아시스 주변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랍니다. 그런데 요즘 이 주변에서 자꾸 오아시스의 물을 더럽히는 녀석이 있단 말이죠.”
“……심부름을 시키다니.”
“이왕이면 거래라는 말을 쓰죠.”
루나와 모래 마녀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가뜩이나 모래 마녀를 좋게 볼 수 없는 루나인데, 여기서 거래라는 명목으로 심부름시키려 하다니.
에샤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송곳니의 주인을 알려줄 테니, 그 대신 오아시스를 더럽히는 녀석을 처리해달라는 건가?”
“맞아요. 대략적인 위치는 밖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안내해줄 거예요.”
“……”
루나가 이빨을 우득 씹었다.
이단이, 악마가 자신을 부려 먹다니.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거래는 지켜야 할 거야.”
“당연하죠.”
모래 마녀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루나는 모래 마녀를 노려보다가 휙 천막을 나갔고, 에샤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모래 마녀는 멀어지는 둘의 기척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우욱, 우에엑! 웨에에엑!!”
모래 마녀의 입에서 검은 피가 후드득 쏟아졌다. 바닥의 모래가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키히…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지금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얌전히 살아. 그러면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후우… 흥. 아직 멀쩡해.”
익숙하게 입가의 피를 닦은 모래 마녀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아시스, 사막이 숨겨둔 보물.
그녀가 이끄는 부족의 유일한 수원.
자신은 아직 죽을 수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돼.”
가만히 눈을 감은 모래 마녀의 의지를 따라, 지하 깊은 곳의 모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의 사방으로 퍼지는 모래는 마치 뿌리의 형태였다.
* * * * *
루나와 에샤가 천막을 나서자 모래 마녀의 말처럼 병사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मैं इंतज़ार कर रहा था। चल दर।”
투두두두두ㅡ
병사와 함께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기묘한 동물의 등에 올라타 사막을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에샤와 루나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쿠구구구궁ㅡ!
“…도대체, 이건 뭐지?”
“……그 망할 여자가.”
에샤와 루나의 고개가 끝없이 올라간다.
위로, 더 위로.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구치고 있는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
사막을 헤엄치는 유사의 애벌레, 샌드웜.
일반적인 샌드 웜이라면 성인의 2, 3배 정도 크기일 테지만, 이것은… 이것은 샌드 웜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우람했다.
“……쯧. 이런 괴물을 처리하라고? 제대로 당했군.”
에샤가 혀를 찼다.
───────!!!
거대한 샌드 웜이 하늘 높게 솟구친 몸체를 뒤틀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나! 도망쳐라!”
“……에샤!”
위치 에너지와 중력의 아름다운 합작에 따라, 끔찍할 정도의 충격파가 사막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모래 파도가 일어나 둘을 덮쳤다.
* * * * *
“……”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돛단배.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역경을 여럿 마주하기 마련이다.
무너지고, 부딪혀도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일 터.
허나, 돛단배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역경이, 시련이 불현듯 닥쳐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시여, 부디 이 역경과 난관을 헤쳐 갈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아. 용기와 지혜.
좋지.
그런데 내가 신이라면?
나는 누구한테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나?
“ㅡㅡㅡ그러니까 말이지 박 주임. 내가 아무한테나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아, 예…”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싸이코 팀장, 박덕춘 부장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맹세하건대 여기 프로젝트로 오고 나서 저 인간이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래서… 어떤가? 아예 우리 프로젝트 쪽에서 일해 볼 생각은?”
‘내가 미쳤냐? 여기서 죽도록 갈려 나가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팀장이다. 한낱 주임 나부랭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물.
“하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직 전에 있던 프로젝트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은근히 돌려서 거절하려 했더니, 박덕춘 부장이 씩 미소 지었다.
덫에 걸린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빛.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이 사람 급하기는. 일단 이것부터 보고 생각하게. 우리 프로젝트가 제법 규모가 있고, 회사에서도 나름 주목하는 프로젝트라서 말이지… 일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대우는 확실하기 해주거든?”
스윽, 은밀하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뭔가 길고 잡다한 이야기 끝에 적혀있는 숫자, 오오 그것의 이름은 연봉이라.
‘일, 십, 백, 천… 어, 어어?’
주임에게는 너무나 크고 거대한 연봉.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흐흐. 어떤가? 업무 강도가 조금 센 건 미리 말해두지만, 주임인 자네한테는 절대 나쁜 경험이 아닐 텐데? 거기에 이만한 연봉…… 주임 중에서 이런 대우는 자네가 아마 처음일 거야.”
‘이, 이 돈이면 한 달에 적금을 넣고도 남는 돈이 도대체 얼마야?’
자본주의는 차갑다.
돈으로 나를 사려고 하는 박덕춘 부장의 마수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그건…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의 돈이었다.
“……꿀꺽.”
자본의 거대한 유혹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다.
Ilham Senjaya 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ㅡ쩔그렁! 성지에서 온천욕을 즐기던 이베르는 작은 황금 동전을 주웠다…!! 원반 던지기 놀이를 하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삐이익! 이베르는 기분이 좋은 듯 마구 첨벙거렸다…!!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흐음…! 후원 메세지가 간략하게 변한 이상… 뭔가 다양한 리액션을 고민해봐야 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