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비익연리
화면 가득 보이는 것은 사막을 은혜롭도록 적시는 물의 향연.
사막에 푸른 생명의 기운이 퍼져간다.
“캬……”
지하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웅장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한 개인의 힘으로 사막의 지형이 바뀌어간다.
비록 사막 전체에 비하면 일부분에 불과한 영역일지라도, 물 한 방울 귀중한 사막에 강과 오아시스를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업적.
“이걸 혼자서 했다고?”
카메라를 잔뜩 확대했다. 구릿빛 피부의 미녀가 미소를 띤 얼굴로 피를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래 마녀, 모래의 악마 굴라카흘>
특이하게도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보였다. 왜 그런지는 이미 알고 있다.
“악마와 한 몸이 되었다고 했지.”
인간의 몸으로 모래를 조종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일 터.
사막에서 모래를 다루는 힘의 유용함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런 힘으로 한다는 게 지하수 끌어올리기란 말이지?”
실실 웃음이 나온다.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개인의 사리사욕을 탐할 수도 있었고, 사막의 부족을 다스리며 왕 못지않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래 마녀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보살펴준 부족에게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수명을 깎아가며 물을 끌어 올린 것이다.
“거기에 악마가 순순히 협조했다는 것도 놀랍네.”
모래 마녀의 초월적인 의지가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악마가 모래 마녀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기에 가능했던 대업.
악마와 인간의 합작으로 사막에 물이 샘솟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하.”
영감이, 창작 욕구가 샘솟는다.
사막에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가 나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자극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자아(아님)가 속삭인다.
‘악마와 인간이 사막에 물을 끌어 올렸어. 사막에 강과 오아시스를 만들었다고. 그런데 신이 보고만 있을 셈이야?’
아니.
절대로 그럴 수 없지.
멈출 수 없는 충동이 나를 이끌었다.
화면을 축소해 일대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사막의 모래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줄기가 보인다.
‘밑바탕은 모래 마녀가 훌륭하게 만들었어. 그렇다면 뭐가 필요하지?’
물이 흐른다. 땅이 비옥해진다. 식물이 자란다.
내가 할 일은 그 과정을 극단적으로 가속하는 것.
‘좋아.’
띠링ㅡ!
실로 오랜만에 상점창을 열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화려하게 붙은 세일 마크들이 나를 반겼다.
슥, 스슥-
공격 스킬, 보조 스킬, 방어 스킬, 버프 스킬, 디버프 스킬… 까마득하도록 많은 카테고리를 지나쳤다.
<기타 스킬>
말 그대로 온갖 잡다한 스킬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특정 구역을 반짝이는 빛으로 꾸미거나, 하늘에서 깃털이 흩날리는 효과를 부여하거나, 갑자기 빛이 내리쬐거나, 주변에 짙은 안개를 깔거나…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냥 이팩트만 존재하는 스킬들.
‘딱 겉멋용이고, 분위기 조성용이지.’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려는 일에 가장 어울린다.
잡다하게 쌓인 스킬들을 하나하나 살필 생각에 살짝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한숨 한번 푹 쉬고 열심히 스킬 목록을 뒤적였다.
반짝-!
– “얍!”
SD 케넬름이 뿅하고 나타나 귀신같이 내가 원하는 스킬을 반짝거리는 표시로 강조했다.
“오.”
<씨 뿌리기 : 선택한 영역에 씨앗을 마구 뿌립니다. 씨앗이 빠른 속도로 마구마구 자라나 꽃밭을 만듭니다.>
간단한 효과, 지극히 꾸미기에 불과한 스킬.
가격도 무척이나 저렴한 가격이다.
‘단돈 4,900원!’
와!
지금 스킬을 사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싸다!
어째 느낌은 딱 한 번 쓰고 스킬창에서 썩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저렴한 가격이기에 부담 없이 결제했다.
우웅-
[WEB 발신] 카드 4,900원 일시불 승인.
후회 없는 결제였다.
“자. 가즈아!”
악마와 인간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강줄기 곁으로 내 손가락이 스쳤다.
띠링ㅡ!
《‘씨 뿌리기’ 스킬을 사용합니다! 선택한 영역을 따라 씨앗이 마구마구 뿌려집니다!》
내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무수한 녹빛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 *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물은 필수적이다.
살기 위해서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요, 그 물을 마시는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으며,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음이 마지막 이유였다.
분명 모래 마녀의 업적은 길이 남을 업적임이 분명했다.
개인의 힘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강과 오아시스를 만들었으니, 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허나.
모래 마녀는 모라트리스 사막의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원을 새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주 작은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다.
조금 더 사막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작은 기회를 만든 것이다.
물이 흐르면 언젠가 생명이 피어날 테니.
나머지는 시간이 천천히 해결하도록 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모래 마녀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수원을 만들었음에도, 땅이 비옥해지고 숲이 자라나고 농사가 가능해지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아.”
그렇기에 모래 마녀는 자신의 두 눈으로 녹빛의 사막을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당장 남은 수명의 대부분을 끌어다 바쳤다. 내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기에, 그저 계기를 마련했음에 만족하려 했다.
다만…
아주 작은 욕심은 있었다.
‘내 두 눈으로……볼 수만 있다면.’
사막의 곳곳에 씨앗이 싹트는 모습을, 꽃이 피어나고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울까.
파아아아아앗ㅡ!
“아아아아…!”
하늘에서 태양이 내려온다.
모래 마녀의 목숨을 걸어서 끌어올린 강물의 곁으로, 따스하고 밝은 빛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두 개의 태양이 뜬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두 눈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었고, 도리어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안락함마저 느껴졌다.
“아, 아…! 저기! 저기를 봐!”
누군가 비명처럼 외쳤다.
거대한 빛이 지나간 자리의 뒤로, 작고 사랑스러운 녹색 이파리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존재의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빛이 지나간 자리의 뒤로 빼곡하고 싱그럽도록 녹색의 생명이 피어났다.
“싸, 싹이…! 싹이 피어오른다…! 새싹이 자라고 있어!!”
부족민들이 빛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모래 마녀는 머리를 숙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시야의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아득하도록 넓은 사막이 점차 녹색의 생명으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파릇한 새싹이 발가락 사이를 수줍게 간지럽히며 인사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탁 터져 오르는 모래 마녀의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다.
“……이건.”
루나가 경이에 찬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이단 심문관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온 사방 천지에 가득하게 내려앉은 밀도 높은 신성력을.
저 밝은 빛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족적처럼 자라나는 새싹 가득 신성력을 머금고 자라나고 있다.
“하나 된 분……”
루나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그림자에서 나온 밤의 일족들도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흐에에에에엥……! 저, 저희 다시 데려가주세요오오…!!”
“이, 이제 낮잠도 안 자고 여, 열심히 일할 테니까…! 다, 다시 성지로 가고 싶어요!”
생명을 뿌리며 지나가는 태양은 무정하게도 밤의 일족을 지나쳤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보다 이 은총의 의미는 도대체.’
모래 마녀와 악마가 만들어낸 수원에 신께서 생명을 뿌리고 계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르겠어.’
악한 자가 지닌 힘을 옳은 일에 사용하면 그것은 선함의 증거가 되는가? 혹은 일시적인 위선인가?
루나는 상념을 이어가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 혼자서 고민한다고 결론이 나올 주제가 아니었다.
신실한 수도자들이 모여 몇 날 며칠이고 토론해야 할 논쟁거리가 되리라.
다만ㅡ
모래 마녀를 바라보는 루나의 시선이 아주 조금은 달라졌다.
“……끄응. 이것 참 장관이군.”
“에샤!”
붕대를 칭칭 감은 에샤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일어서기도 힘들 텐데 걸어 다니는 모습에 루나가 펄쩍 기겁했다.
“모, 몸은 괜찮은 거야? 아니. 그보다 어떻게 벌써?”
“뭐… 혼자 살다 보면 아파도 억지로 움직여야 할 때가 많거든.”
에샤와 루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차올랐다. 루나는 괜스레 고개를 숙여 발밑의 새싹만 바라봤다.
에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널 원망했다.”
“…읏.”
“원망하고 미워했지. 화도 났다. 설마 나를 속이고 접근한 건가 싶기도 했고.”
“그, 그건 정말로ㅡ!”
“아니겠지. 알아.”
에샤는 조용히 자신의 암살검을 매만졌다. 서늘하고 무거운 감촉의 검날이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송곳니에 대해 나에게 숨겼던 건… 넘어가도록 하자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뭐 그래. 그때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때니까.”
“…그때는?”
“그래도 지금은 나름 잘 안다고 말할 만하지 않나?”
에샤가 루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루나의 멍한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쩝. 이래서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는 건가?’
루나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의 언니에게 죄를 물어야지.
“설마 아직도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예를 들면 그쪽 나이처럼.”
“어, 없어! 정말로 없어……!”
루나가 에샤를 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로드와 일족은 숨죽이고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척.
에샤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언가 싶어 루나가 에샤를 올려봤다.
“에샤, 17살. 아이아테르 산 출신이고… 암살검을 무기로 사용한다. 좋아하는 건 새벽의 공기와, 루비.”
맨 끝의 루비를 언급하며 루나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 뒤로 물러난 밤의 일족은 이를 눈치챘다. 꺅꺅 소리를 지르고 저들끼리 때리며 야단을 떨었다.
루나가 부랴부랴 제 손을 열심히 옷에 문지르고 야무지게 내밀었다.
“루, 루나 바르나도트. 210살…… 북부 출신이고, 어. 그림자를 다뤄. 조, 좋아하는 건… 음.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
210살.
에샤의 눈썹이 아주 작게 꿈틀거렸다.
‘200살이나 210살이나 별 차이 없기는 마찬가지야.’
사랑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지니.
“지금까지 고마웠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나, 나도……잘 부탁, 해.”
에샤의 커다란 손이 루나의 손을 두툼하게 감쌌다.
‘크, 크다………’
루나는 에샤의 손이 굉장히 크고, 단단했으며 거친 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선지 얼굴 가득 열기가 올라와 에샤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크흠, 흠.”
‘손이 되게 작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에샤 또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마찬가지. 루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좋을 때군.”
로드가 멀리서 흐뭇하게 이 모습을 바라봤다.
조만간 막내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 * * *
“아니. 이것들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연애질하네.”
열심히 씨앗을 뿌리다가 문득 살펴보니 에샤와 루나가 아주 깨가 떨어지도록 꽁냥거리는 중이었다.
어찌나 풋풋하게 알콩달콩 하는지, 지켜보는 내 입에서 단맛이 날 지경이다.
“후…”
입맛이 쓰다.
한스에 이스칼도 연애하더니, 이제는 에샤 너마저 짝을 찾아 떠나는구나.
사람이 똑같은 일을 세 번 당하면 전설이 되는 법이다.
그래. 이쯤 되면 나는 눈여겨보는 남정네들에게 짝을 내려주는 연애의 신, 뭐 대충 그쯤 되는 것이겠지.
“……행복해라 에샤.”
질투심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고작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히는 저 둘의 모습이 너무 풋풋해서 오히려 지켜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걸릴 지경이었다.
“에휴.”
신이 된 입장에서 남의 연애에 질투하는 것도 못난 일이겠지.
‘…뭐라도 선물을 하나 해줘야 하나?’
둘의 앞길을 축복하는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는 것이 어떨까. 썩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 의미도 있고, 상징성도 충분하다.
그러다 둘이 헤어지면?
음… 유감인 거지.
“그러면 뭐가 좋을까나……”
무난하게 무기나 하나 만들어줄까?
루나는 지금 쓰는 무기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음.
의욕 없이 무기 리스트를 훑다가 살짝 눈이 커졌다.
“비익연리(比翼連理)?”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닷…!! 아앗… 항상 자켜보고 계시다니..!! 이는 마치 CCTV…!! 혹은 밝은 태양과도 같은 은혜로움…!! 구아아앗…!! 작가는 독자님의 사랑에 그만 찬양하고 찬미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