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사슬처럼 묶인 기억 ( 1 )
루나와 에샤에게 비익연리를 전달한 후, 나는 곧바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아직 대놓고 루팡짓 하기에는 너무 일러.’
어째서인지 김덕춘 부장이 나의 루팡짓을 살짝 용인해주려는 듯한 모습도 보였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타다닥, 타탁-
그사이에 제법 쌓인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했다.
‘노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비익연리 덕분에 에샤랑 루나의 전력 증대로 이어지기는 했어.’
전력의 상승은 언제나 옳다.
‘심연에 있는 프리키, 10년 전의 아이야테르 산 몰살 사건과 유일한 생존자 에샤와 프리키의 여동생 루나…’
운명이라는 것이 참 얄궂게도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과 인연이 얽히고설키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만남이지 않은가.
‘이런 걸 두고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는 건가?’
운명이라…
“흠?”
뭔가 가물가물 떠오를 듯하다가…
번뜩!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인연, 실타래, 그리고 운명.
나는 언젠가… 까마득한 무의식 속에서 무언가를 건드린 적 있었다.
아득하게 흔들리는 기억 속에 가라앉은 편린을 열심히 더듬는다.
“음, 으음… 그러니까…”
언제였지?
언제였더라…?
나는… 그러니까 분명 엄청 깊은 바닷속에서, 그래 맞아.
나는 바닷속에 있었다.
그곳에서 뭔가 빛나는 것들을 잔뜩 건드렸던 것 같다.
별처럼 보이기도 했고, 작은 구슬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들을 이리저리 굴리고 움직였다.
인제 와서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 빛나는 구슬 같았던 것들이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그런 건 아니었겠지?
‘에이 설마. 사람이 무슨, 아니 무슨 신이 잠결에 인연이랑 운명을 막 조작해. 그런 게 어딨어?’
하하하.
우습지도 않은 망상이다. 나는 훌훌 털어내며 다시금 업무에 집중했다.
타다닥- 타탁, 다다닥-
‘…아니겠지?’
* * * * *
비익의 검과 연리의 검을 나누어 받은 에샤와 루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서 대련했다.
비익연리의 관계를 돈독히 하겠다는 핑계였지만, 세 살 어린이도 믿지 않았다.
“내, 내가 예상하는데, 30년 안에 우리 막내가 뽀뽀할 것 같아……!”
“히이이익! 3, 30년…?! 너, 너무 이르잖아…! 저, 저, 적어도 50년 정도는 서로를 아, 알아가다가… 그러다가 천천히 뽀, 뽀뽀도 하고…!”
밤의 일족에서는 루나가 언제쯤 뽀뽀를 할 것인지에 대한 내기가 한창이었다.
“흠.”
그런 모습을 보며 모래 마녀는 턱을 쓸었다.
사막에 강이 흐르고, 생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원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다만… 저 사람들은 아직 할 일이 남은 것 아니었나?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는 걸까?”
루나와 에샤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저 둘은 대악마 프리키와 볼 일이 있는 것 아니었나?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아주 손 놓고 놀며 지내는 건 아니다.”
그림자에서 불쑥 로드가 튀어나오며 대답했다.
모래 마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애써 표정을 다스린 모래 마녀가 태연한 척 대꾸했다.
“어머.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사막이라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일족 중에서 나름 부지런한 아이들을 보낸 참이다.”
“정말로 프리키를 상대하려고요? 혹시 단체로 자살을 원하는, 뭐 그런 건가요?”
모래 마녀가 이채를 띠었다.
대악마가 뭔지 모르는 건가? 비록 지금은 마왕의 하수인이라지만, 그들은 한때 넓디넓은 심연을 나누어 다스렸던 악마의 대군주들이다.
“프리키는 불쌍한 아이다. 수천 년간 길 잃고 헤맨 그 아이는 우리의 일족이다. 가족이라는 소리지. 그 아이가 무슨 이유로 아이야테르의 사람들을 몰살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 아이를 구해낼 의무가 있다.”
“…가족이라.”
모래 마녀가 저 멀리 강가에서 물장구치는 사막 부족의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알고 있나요? 프리키는 심연에 있을 텐데 어떻게 만나러 갈 셈이죠?”
“……그걸 알아내기 위해 아이들을 시켜 조사를 보냈다.”
로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성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악마를 불러내거나, 심연에 직접 가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둘 다 쉽지 않더군.”
심연으로 향하는 차원을 가를 수 있는 존재가 있긴 했다.
성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신수, 유니콘.
허나 유니콘에게 접근하려 했던 일족은 되려 성난 유니콘을 마주하고 도망쳐야만 했다.
“뭐라고 했지? 수천 년 묵은 비동정의 악취가 진동한다고 했나…?”
“저런.”
하필이면 만난 것이 루나의 아비였던 탓이다.
그 후로 유니콘은 밤의 일족과의 만남을 일체 거부하고 있었다.
“끄응. 그래서 사방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중이다. 에샤와 루나를 저리 두는 이유도 어차피 뭔가 알아내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으니 그런 것이고.”
“푸흡.”
모래 마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비웃는 건가?
“푸흐흡. 아, 아뇨. 미안해요. 웃기지 않아요? 바로 옆에 악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을 두고 참 멀리서도 찾고 있었다는 게?”
꿀럭ㅡ!
모래 마녀의 어깨에서 검은 점액질이 튀어나와 광소를 터뜨렸다.
《키하하하하! 지금 심연의 제왕이신 이 몸을 두고 심연을 논한 거냐?! 끄륿, 키하하하하!》
“허.”
이런 수가 있었나.
로드가 작게 감탄을 뱉었다.
모래 마녀가 검은 점액질의 악마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뭘 알고 싶다고요?”
* * * * *
“일단 제가 추천하는 방법은 프리키를 이쪽으로 부르는 거예요.”
모래 마녀가 먼지 날리는 두꺼운 책을 쿵! 하고 내려놓았다.
“물론 내키지는 않겠지만… 뭐, 별수 있나요? 이 중에서 차원을 가를 수 있는 분이 있으면 그 방법으로 하죠.”
“……”
“……”
에샤와 루나가 침묵했다.
정확히 에샤는 루나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고, 루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바빴다.
이단 심문관인 자신이 악마를 소환해야 한다니!
이는 정말 크나큰 불경이었다!
파라라락
두꺼운 책을 정신없이 훑던 모래 마녀의 손가락이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아. 여기 있네요. 프리키, 프리키… 으흠. 소환진이랑 의식은…… 재료가, 으음. 동물 쪽으로 대체하려면… 쓰읍.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
무언가 중얼거리던 모래 마녀가 고개를 들어 루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보니까 아가씨가 프리키랑 혈육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내 언니야.”
모래 마녀가 손가락을 경쾌하게 튕겼다.
“잘됐네요! 아가씨의 피로 여기 있는 재료 중에서 8할 이상을 대체할 수 있겠어요.”
“……? 그게 가능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악마랑 혈육 관계인 경우를 찾아보기 매우매우 어려워서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요.”
《키하하하하하하! 악마인 이몸께서 그런 사실도 모를까?》
점액질 형태로 튀어나온 악마를 보며 루나가 비익의 검을 꽉 붙잡았다. 에샤가 손목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분명 검부터 나갔으리라.
“오늘부터 좀 바빠지겠네요.”
“…조건이 있어.”
“뭔가요?”
“도리에 어긋나는 방법들은… 사용하지 마. 생명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루나가 부들부들 떨며 씹어먹듯 내뱉었다.
소환진에 들어가는 불길한 문양과 상징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악마를 소환하는 데 꼭 필요했으니까.
허나,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흐으으음. 그럼 아가씨의 피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할 수 있는데. 괜찮아요?”
“차라리 그렇게 해.”
루나가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 의식에 생명만큼은 희생되지 않게 하겠다는 그녀의 각오였다.
“…나도 함께 돕겠다. 비익연리의 힘을 쓰면, 하루에 한 번은 서로 체력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혼자 짊어질 생각은 마라.”
“읏… 고, 고마워.”
에샤가 루나의 손을 잡으며 그리 말했다.
둘 주변으로 설탕빛 분위기가 가득했다.
“으휴.”
그날부터 모래 마녀는 두꺼운 책을 붙잡고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루나의 피 덕분에 재료의 8할을 생략할 수 있었지만, 그런데도 소환진을 그리고 의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끄으으응. 어휴. 누가 대악마 아니랄까 봐. 뭔 의식 준비가 이렇게 까다로워?”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온 모래 마녀가 투덜거렸다.
아직 소환 의식의 절반도 준비하지 못한 때였다.
* * * * *
대악마, 프리키.
쇠약과 피의 권능을 다루는 대악마.
지금이야 마왕 발가르를 만나 고성의 구석진 방에서 쪽잠을 자는 신세였지만.
발가르를 만나기 이전의 그녀는 여타 다른 대악마와 달리 심연에 영토를 두지 않으려 하는 특이한 악마였다.
“우음…… 음햐아…”
당시의 그녀가 바라던 것은 단 두 가지.
고요한 침묵과 어두운 방.
다만, 심연은 프리키에게 너무 시끄러운 곳이었다.
집다한 하급 악마들이 매일매일 서로를 잡아먹으며 비명을 질렀고, 하늘에서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촉수 마귀가 튀어나왔으니까.
‘시, 시, 시끄러워……’
그래서 조용하게 만들었다.
쇠약의 힘으로.
프리키를 중심으로 퍼진 쇠약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은 빠르게 늙다가 죽었다. 예외는 없었다.
‘……으음, 조, 조용해…… 좋아……’
무거운 침묵 속에서 프리키는 그늘에 몸을 숨기고 하염없이 꿈을 꿨다.
꿈속에서는 행복할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이 멀쩡하던, 심연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
그렇게 하염없이 꿈을 방랑하다 보면, 과거가 꿈이라는 형태를 빌려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아……’
프리키는 자신이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이다.
저 밑, 황야에 드리운 그림자에 몸을 웅크리고 잠에 빠진 또 다른 자신이 보였다.
몽중몽.
꿈속의 꿈이었다.
고성에서 잠든 프리키는 심연을 떠돌던 때를 꿈꿨으며, 심연을 떠돌던 시절의 프리키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꿈꿨다.
흐릿한 안개처럼 어딘가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몽롱한 기억을 더듬던 프리키는 저곳이 어디인지 떠올렸다.
‘……높은 산이 있던 곳……’
차츰 기억이 되살아난다.
프리키가 표정을 구겼다.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ㅡㅡㅡㅡㅡ이다! ㅡㅡ무기로ㅡㅡㅡㅡ!!”
“ㅡㅡㅡ사슬ㅡㅡㅡ와!! ㅡㅡㅡㅡ묶ㅡㅡ!!”
성난 사내들의 목소리, 고함, 피의 향기, 박탈감.
무거운 감각이 프리키의 몸을 억좼다.
단순한 악몽에 불과할지라도, 질척한 사슬의 감촉이 숨통을 조여온다.
“………으……!”
프리키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파직, 눈앞의 풍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얼음처럼 깨지던 풍경은 이윽고 산산이 부서졌다.
“……하아……!”
그림자로 온몸을 꽁꽁 싸맨 프리키가 거센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단단하고 차가운 돌바닥이 만져진다.
마왕님의 고성이다.
“…………꿈……이구나.”
프리키는 한참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온전함을 확인했다.
손, 움직인다.
발, 움직인다.
눈동자와 혓바닥, 머리, 몸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
다시 잠을 청하려 그늘에 몸을 묻은 프리키였지만, 한번 악몽을 꿔서 그런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페, 펜리르한테… 갈까……”
펜리르의 푹신한 털에 몸을 묻으면 잠이 올 것 같다.
펜리르의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온기와 폭신한 털의 조합은 실로 폭력적인 잠의 구도자였다.
“히, 히히…… 그래야겠다……”
프리키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쏙 사라졌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크아아ㅏ악..! 후기 쓰다가 실수로 업로드를…!! 이란 실수를…!!!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글을 목표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 그런 의미에서… 모두모두 불타는 금요일 보내시고…!!! 주말 동안 푹 쉬신 다음에 다음 주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