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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9

       

       

       

       홍옥례의 사기를 다시금 북돋아준 뒤, 우리는 마침내 본관 건물 앞에 이르렀다. 

       

       본관 건물은 전등불 켜진 곳이 없었고, 1층 당직실도 꺼져 있었다. 당직 교직원은 아예 불까지 꺼놓고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본관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생각했다.

       

       ‘……이 학교, 보안이 이래도 돼?’

       

       아무리 내가 비밀정보를 캐러 잠입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직원이라는 인간들이 이렇게 흘러빠졌다니 도무지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히익? 백 동지! 거길 왜 들……”

       

       홍옥례의 만류를 뒤로 하고 당직실에 들어가보니, 역시 잡지책을 보다가 잠든 듯 간이침상 위에 누워 자고있는 놈팽이 하나가 보였다.

       

       오며가며 본 듯한 일반과 교수나 행정직 사무원 같은데, 아무리 대동아공영회 소속 교수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학교에 대한 주인의식과 위기의식이 없을 수가 있다니! 

       

       ……생각해보면, 내가 21세기에서 군생활을 할 때에도 실내 당직근무자들은 자는 게 일이었지. 군대도 그럴진대 여기라고 다를까.

       

       나는 아까 수위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당직 교직원에게도 더욱 더 편하게 숙면할 수 있도록 뺨을 한차례 보듬어주고는 복도로 나왔다. 

       

       “백 동지? 방금 따귀 때리는 소리가 좀 컸는데……”

       “이제 듣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

       

       우리는 본관 건물의 3층으로 걸어올라갔다. 기자재 창고만 가득한 이 층에서도, 복도 한구석에 있어 특히나 눈에 띄지 않는 교실. 그곳에는, ‘제3회의실’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나는 당직실에서 빌려온 열쇠 꾸러미에서 해당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는, 홍옥례에게 말했다.

       

       “그거 불 좀 켜줄래?”

       

       홍옥례는 손에 들고 있던 회중전등—역시 아까 당직실에서 빌려온 것—을 켜고 제3회의실의 내부를 비춰 주었다.

       

       혹시라도 교내에 있을지 모를 누군가가 목격하지 않을까 싶어 복도에서는 회중전등을 안 켰지만, 이곳은 그렇잖아도 항상 두꺼운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기에, 회중전등 불빛 정도는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3회의실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고, 상석 뒤쪽의 벽에는 무전 장비와 각종 설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고. 

       

       전에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얼핏 봐 둔 그대로, 큼지막한 금고 하나가 상석의 뒤쪽 벽에 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 다이얼 잠금 방식이고, 별다른 마력 장치는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회중전등으로 불빛을 비춰주던 홍옥례도 금고를 보며 말했다.

       

       “백 동지는, 저 금고를 열려고 온 거지?” 

       “응.”

       “숫자판 다이얄을 돌려서 여는 금고인 것 같아. 숫자를 알아야 열릴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 여기 좀 비춰 줄래?” 

       

       나는 다시금 품에서 뭔가를 꺼내보았다. 종이 쪽지. 엊그제 요쿠센 시험을 통과하고 받은 전보였다.

       

       전보에는 나를 대동아공영회의 정식 회원으로 인정하며 대동아공영회 회장과 시마즈 당주가 보증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カクシタル モノ ハ ハツクワウイチウ ト バンセイイチケイ ノ ジフジ ヲ モツテ アラハレルベシ」

       (숨겨진 것은 팔굉일우(八紘一宇)와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십자(十字)로써 드러나리라.)

       

       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이걸 처음 봤을 때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었다. 다들 알다시피 ‘팔굉일우 만세일계’는 그냥 일본제국이 전세계를 영원히 지배한다는 뜻의 프로파간다 문구고, 

       

       ‘십자(十字)’는 ‘동그라미 안의 열십자(丸に十字)’를 집안 로고로 쓰는 시마즈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니,

       

       즉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은 시마즈 가문이 앞장선다!’라는 뜻의 문장인 줄 알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나중에 문득 생각해보니 뭔가 조금 수상했다. 

       

       ‘아무래도, 뭔가 숨겨진 뜻이 있는 것 같았단 말이지.’

       

       숨겨진 것이 드러나리라. 이런 말이 붙어있으니, 일종의 암호문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선, 팔굉일우는 뭐고 열십자는 뭘 상징하느니 그런 것은 다 제쳐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문장을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만세일계 팔굉일우의 십자(十字)’라니. 

       

       ……이게 어떻게 10자야?

       

       팔굉일우 만세일계. 한자로 보면 8글자다. 일본어의 가나로 써도 각각 ハツクワウイチウ와 バンセイイチケイ가 되어, 역시 10글자가 아니다. 

       

       내가 이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것은 바로 어젯밤, 렌까와 이유하를 뿌리치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잠들기 전이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상했던 것이다. 

       

       렌까는 혹시 의미를 알까 싶었지만 서로 민망한 상황을 겪었던 렌까에게 밤중에 전화를 걸어 

       

       『자니……?』

       

       하며 물어보기도 뭐했고, 또 나도 혼자 생각해봐야 답이 없겠지 하고 잠들었다가,

       

       오늘 아침, 분대원들을 모아놓고 무슨 의미일까 토론을 나누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 중에 딱히 암호문 해석같은 분야에 조예가 깊은 녀석은 없었고, 그래서 다들 끙끙거리며 머리만 싸매던 와중에……

       

       『저기……』

       

       손을 든 것은, 우리의 토론을 양복자에게 통역받아가며 가만히 듣고있던 아이까와였다. 

       

       『저기, 그거 혹시, 「고로아와세」가 아닐까……?』

       

       고로아와세(語呂合わせ).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뭐더라. 이윽고 이어지는 아이까와의 설명을 들어보니, 단어를 발음이 비슷한 숫자로 대신 표현하는,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어를 쓰는 우리가 ‘빨리빨리’를 8282로 쓰곤 했던 것처럼, 일본어에서도 그런 종류의 언어유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로아와세였다.

       

       『어, 어렸을 때, 친구들과 고로아와세로 말놀이를 하고는 했거든……. 내가 보니까, 팔굉일우 만세일계, 이거…… 숫자로 바꾸면 10자 정도 될 것 같아.』

       

       ‘과연……’

       

       일본어를 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익힌 조선인 학생들과는 달리 아이까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인이었고, 어릴적 친구들도 대부분 일본인이었기에, 이것이 일본어 언어유희일지도 모른다는 발상을 먼저 떠올린 것이리라.

       

       ‘역시 일본인!’

       

       물론 우리 분대원 중에서는 무라사끼 녀석도 일본인이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녀석이 없기도 했고, 있었더라도 딱히 머리가 좋은 녀석이 아니라서 이런 것은 떠올리지 못했으리라. 

       

       『으응. 그러니까 고로아와세는, 오십음도의 어떤 글자를 어떤 숫자로 치환하는지, 그 규칙이 대강 정해져 있어. 그래서 방금의 것을 고로아와세로 고쳐 보면……』

       

       아이까와는 연필을 들고 종이 위에 글자와 숫자를 써나갔다. 우선 한자를 쓰고, 그것을 가나로 풀어서 쓰고, 그 밑에 숫자를 적어나갔다. 

        

       八  紘   一  宇

       ハツ クワウ イチ ウ

       8  9 5 1  5 

       

       万  世  一  系

       バン セイ イチ ケイ

       8  71 1  9

       

       그리고, 이 숫자들을 나열하면, 비로소……

       

       89515 87119

       

       라는 10글자의 숫자 조합이 나왔고, 나는 이것이 대동아공영회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비밀번호이며, 금고의 비밀번호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역시, 잘 모르는 것은 지혜를 모으면 답이 나온다니까. 

       

       그리고 밤이 되어 마침내 금고 앞에 당도한 지금,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는 다이얼을 돌렸다. 

       

       ‘8…… 9…… 5……’

       

       그렇게 숫자 하나하나마다 다이얼을 돌려가며, 마침내 10개의 숫자를 모두 돌렸을 때,

       

       —달깍.

       

       금고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되네……!’

       

       되겠지 확신은 했지만, 그래도 진짜 되니까 신기하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금고의 문이 열리고 내부에 숨겨져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헉.’

       

       속으로 숨을 삼킨 나는 물론, 회중전등을 들고 있던 홍옥례도 작게 감탄을 내질렀다.

       

       “우, 우와! 이게 다 뭐야……!”

       

       황금! 우선 곧장 눈에 띄는 것은, 회중전등의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금괴들이었다. 금괴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지만 지폐 뭉치도 있었고. 

       

       “배, 배, 배배백 동지! 이거 가지고 나갈 수 있어? 금덩이든 돈뭉치든, 조금만—”

       

       홍옥례가 말했다.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안 돼.”

       “요새 마작구락부 장사도 안 되어서, 우리 태극단 식구들 하루걸러 배곯는 형편인데—” 

       “안 돼! 마음은 알지만, 나도 여기 있는 거 하나도 못 가져가.”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챙겨서 가져갈 수는 있었다. 지금 내 안주머니 안에는 적석이 있었고, 잠깐 마문을 열어 그 안으로 던져넣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래서야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금방 발각될 것이다. 당장 들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곳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하면, 대동아공영회에 입회한지 얼마 안 된 내가 의심받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 

       

       물론, 나 역시 금괴 더미와 지폐 뭉치를 보니 시선이 자꾸 고정되고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이거, 도둑이었다면 눈 돌아갈만한 광경이다.

       

       하지만 나는 고작 금괴 따위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고작 금괴……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걸 지금 가져나갈 수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금괴들과 지폐 뭉치는 최대한 시선 밖으로 제쳐두고, 이성적인 마음을 다잡으며 다른 것들을 살펴보았다.

       

       금고 안에는 각종 서류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비나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그중에는 두루마리 형태로 둥그렇게 말린 커다란 지도 한 장도 있었다. 

       

       하나하나가 붉은 색으로 「祕密(비밀)」 인장이 찍혀있거나, 심상치 않아보이는 물건들. 

       

       ‘완전 보물상자네, 이거.’ 

       

       나에게는 금덩이가 아니라,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짜 보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398화를 조금 수정했습니다. 요쿠센 시험 통과하고 나온 뒤 받아보는 전보의 내용을, 이번 화의 내용과 맞도록 조금 추가했어요.

    *작중에서 전보의 내용과 한자를 가나로 풀어쓰는 부분에서는, 1945년 이전에 쓰였던 구(舊)가나표기법을 따랐습니다. 현대 일본어의 문법 및 표기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저 역시 전공자가 아니기에 실수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부디 양해를……!

    *가나를 숫자로 치환하는 고로아와세는 일종의 언어유희 즉 말장난이니만큼 공인된 규칙은 없습니다만, 작중 묘사된 고로아와세는 이 사이트를 이용해서 변환된 결과물입니다:
    https://www.nin-fan.net/tool/goro/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맛난 저녁 드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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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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