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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1

       

       

       

       

       

       

       “오랜만이네요. 왕립 아카데미 졸업 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군요. 제게 뺏어간 수석 졸업장, 요긴하게 잘 쓰고 계셔서 기뻤답니다.”

       

       데론에게 건넨 인사였다.

       직후, 그의 얼굴은 핏기가 가셨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토록 꿈꿔왔던 얼굴이었다.

       통쾌했다.

       

       “머리색이 달라져 못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다행히 저를 기억해주었군요? 영광이에요.”

       

       블런드에게 건넨 인사였다.

       직후, 그의 얼굴엔 지독한 절망이 서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그토록 갈망했던 얼굴이었다.

       시원했다.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어 기뻐요. 다들 적발보다 백발이 잘 어울린다던데, 어때요? 카일 공자가 보기에도 그런가요?”

       

       카일에게 건넨 인사였다.

       직후, 그의 얼굴엔 그날의 자신과 엇비슷한 지옥이 펼쳐졌다.

       짙고 깊어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이.

       카일이 눈을 뒤집으며 혼절했다.

       기뻤다.

       

       “….”

       

       그렇게 마지막, 엘든의 앞에 섰다.

       단상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으리란 다짐이 녹아내렸다.

       기권을 선언한 엘든이 5월의 북부령처럼 변한 것 같다는 겔우드 경의 말대로, 그를 보자마자 5월의 북부령의 설산처럼 굳은 다짐이 녹아내린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이래도, 정녕 제 고백을 거절하실 건가요?”

       

       

       참으로 어설프고 우매한 질문으로써, 그토록 고대했던 순간을 망쳐버린 것은.

       평정과 냉정으로 그의 우위에 서겠단 계획이 망가지고, 생때같은 앙탈을 질문이랍시고 던져버린 것은.

       내뱉고도 부끄러운, 한 명의 성숙한 여인으로서 금해야 할 추파를 던지고 만 것은 전부 엘든 라펠리온, 그 때문이었다.

       

       왜 그의 앞에만 서면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왜 자꾸만 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걸까.

       왜 그와 엮이면 모든 게 꼬여만 가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제는 그 고백을 거절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인데 말이다.

       자신이 에린시아란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대공녀의 은밀한 고백을 거절한 것을 더 뿌듯히 여길지언데 말이다.

       어설픈 자신감이 자만이 되어버리고 만 걸까.

       그렇다면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의 앞에 당당히 서야 할 피해자가 스스로 자만했음을 자책해야 한다는 것이.

       

       ‘이게 아닌데.’

       

       저 순진한 얼굴이 충격과 공포에 이그러져야 하건만, 자신의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수백 번 곱씹어도 웃긴 일일 것이 자명했다.

       데론.

       블런드.

       카일.

       그 셋을 거치며 다져온 평정과 냉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 셋을 지나오며 느낀 통쾌함과 시원함과 기쁨은 기나긴 기다림이 무색하게 사라졌다.

       엘든과 마주한 순간부터 복잡히 뒤엉키기 시작한 속엔 불안과 걱정만이 가득했고, 그의 호기로운 적안이 제 헛점을 꼬집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제발.

       

       한번만 기회를 주길.

       

       딱 한번만이라도 복수할 기회를 주길.

       

       빌었다.

       

       피해자가 빌어야 하는 상황이 우습고 역겨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완고한 태도와 완강한 눈빛은 한낱 기도에 빌어야 할 정도로 우직했으니까.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그는 언제라도 제 손을 빠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이제 고지가 코 앞이다.

       데론과 블런드, 카일은 이미 고지에 올라 비탈길로 밀어졌다.

       비탈길 아래로 끝없이 추락할 그들과 함께 엘든도 굴러야 했다.

       그렇게 지상으로 굴러떨어져 참회의 길을 걸으며 눈물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곧.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을 때, 르미앙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껴야 했다.

       정중한 미소가 두려운 적은 난생 처음인 그녀였다.

       

       “마음은 감사하나, 이렇게 알현하게 되니 더욱 확고해지는군요.”

       

       뭐…?

       뭐가 확고해진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제 3 대공녀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 할 부족한 사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딴 소리 좀 그만 지껄여.

       대체 몇번째야.

       

       “설마, 제가 누구인지 몰라서 이러는 건가요?”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만… 이제는 알기에, 더욱이 대공녀님의 마음을 받을 수 없을 듯 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를 마주하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내가 에린시아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셋과 비슷한 얼굴을 했어야지.

       아니.

       하다 못 해 울상이라도 지었어야지.

       그게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냐?

       이제라도 변하겠다며?

       스스로 못나 물러간다면서 왜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건데?

       

       “왜죠? 왜, 대체 왜 못 받겠다는 거에요?”

       

       알아.

       안다고.

       에린시아임을 아니까 못 받겠다는 거 알겠다고.

       하지만 기권을 철회하고, 혼약대전에서 우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구르란 말이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씀드렸다시피, 그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겸허히 자신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날에 대해선 가슴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

       

       그러니까 결국… 내가 에린시아인 걸 알면서도, 지난 날을 반성하고자 한다면서도, 끝까지 날 위해 구르지 않겠다는 거야?

       

       너, 대체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해?

       왜 이렇게 뻔뻔해?

       왜 이렇게 멀쩡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죄한단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진심을 담아낼 수가 있어?

       내가 그깟 사과 한번 받으려고 이러는 줄 알아?

       그럴 거면 애당초 괴롭히지 말았어야지!

       

       눈물이 일렁였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일렁였다.

       목구멍에 설움이 차올랐다.

       그 알량한 사과 한번에, 목구멍에 설움이 차올랐다.

       그것들을 우겨넣었다.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모습도, 분에 못 이기는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용서한다면요? 자격을 주겠다면요? 그래도 거절하겠다는 건가요? 내게 정말로 미안하다면 오히려 거절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사과가 진심이라면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면 되잖아.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말로 회피하려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거잖아.

       

       어디 대답해봐.

       어디 증명해봐.

       네 사과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말이야…!

       

       하지만.

       

       엘든은 대답 대신 날선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분노와 울분에 사로잡혀있던 르미앙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대공녀님께서는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고백하신 건가요?”

       “……뭐?”

       

       

       

       

       일순간, 눈동자를 촉촉히 적시던 습기가 메말랐다.

       그 눈동자가 언젠가부터 엘든의 모습만 담아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엘든으로 가득했던 시야에 광장의 다채로운 모습이 보였다.

       

       닫혀있던 귀가 열렸다.

       그 귀가 언젠가부터 엘든의 목소리만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엘든의 목소리만 들리던 귀에 광장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좁혀졌던, 닫혀있던 감각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이며 생경한 감각에, 르미앙이 당혹스런 눈으로 엘든을 바라본다.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니.’

       

       라고 대답했다간 복수에 꿰어내기 위해 거짓을 행했던 제 속내를 들킬 것 같아 답할 수 없었다.

       

       ‘맞아.’

       

       라고 대답하는 것은 그냥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엘든을 붙잡아두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까.

       

       “…….”

       

       진퇴양난에 처해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묵과 방황 뿐이었고, 결국 어떠한 대답도 토해내지 못 한 채, 걸음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인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아카데미에서처럼 또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에린시아였다.

       

       

       **

       

       

       “그럼 이것으로써 1차 대면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르미앙이 로건 대공과 함께 광장을 벗어났다.

       작금의 대면식은 식전 행사였다.

       베일에 싸인 대공가의 막내딸을 위해 잡힌 특별 행사이기도 했었다.

       

       ‘큰일날 뻔했네.’

       

       르미앙의 과도한 반응을 잠재우느라 다소 무례한 질문을 던졌었다.

       지금은 아껴둔 패를 깔 때가 아니었고, 그녀의 과도한 반응은 일을 그르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아니었다면 부들대던 르미앙의 손이 내 뺨을 후려칠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그런 파국이 닥쳤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다.

       

       오늘 아침, 울보 길치 노집사의 보고에 따르면 1차 대면식이 끝난 이후 로건 윈터펠이 잠시 수도성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나면 2차 대면식이자 본식이 저녁에 치뤄진다.

       1차 식고문이 치뤄졌던 대전에서 르미앙과 최종 후보 4인방이 모여 본식을 치루는 것이다.

       

       아마 원작에서도 본식에서부터 본격적인 후피집이 시작됐을 거다.

       댓글 반응들도 모두 그것을 기대했고.

       원작이었다면 엘든 라펠리온도 그 후피집에 동참해 눈물의 똥꼬쇼를 펼쳐야 했겠지.

       

       르미앙에게는 미안했다.

       악의도 없고, 의도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의 눈엔 내가 얄밉게 도망치는 미꾸라지로 보일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 이리 집착하고 성질을 부리는 것일 터.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해서 후피집을 찍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부디, 이제야 시작된 후피집에 집중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대전에 도착했다.

       

       아직은 패를 깔 때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좋은 패도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 하면 가지느니만 못 한 법이다.

       좋은 패를 위해선 좋은 때를 인내할 필요도 있는 법.

       

       그렇게 근위병의 검문을 받은 후, 대전으로 들어섰다.

       본식이 시작되기 10분 전이니 모두 도착해있을 터였다.

       늘 이르게 도착해있던 후회캐 3인방이었으니까.

       

       한데.

       

       ‘…음?’

       

       카일이 보이질 않는다.

       

       사약을 앞에 둔 것처럼 사색이 된 데론과 블런드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카일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르미앙 대공녀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본식의 주인공이 도착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

       

       

       ……

       

       

       호오.

       

       

       카일 벨라온 공자?

       

       

       자네.

       

       

       전직 탈주닌자였던 겐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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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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