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사슬처럼 묶인 기억 ( 3 )
루나와 일행의 분위기는 단숨에 무거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프리키를 소환하기 위해 무려 석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소득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고작 은둔형 외톨이 기질 때문이라니!
“…이런. 설마 대악마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런 이유로 소환에 응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모래 마녀의 말에 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대악마, 프리키, 저주, 은둔형 기질, 일족의 족쇄…
‘뭔가 이상해.’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로드. 우리 일족이 태양을 누리지 못하는 족쇄에 걸린 건, 정확히 언제였죠?”
“…으음. 아마도 대격변 이후일 거다. 세상의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갈라졌으며 차원이 부서진 끔찍한 날이었지.”
“……프리키는 그 대격변에 휘말려서 심연에 떨어져 악마가 됐죠.”
“아, 이런. 그렇군. 프리키는 애초부터 우리처럼 족쇄의 저주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로드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일족은 대몰락 이후, 태양을 누리지 못하는 족쇄의 저주를 받았다.
그 때 심연에 떨어진 프리키는 족쇄의 저주를 피했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밤의 일족의 은둔형 외톨이 기질은 태양을 피하기 위해 은둔함으로써 생긴 것.
“……그렇다면, 프리키는 우리 일족처럼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인데…… 도대체 왜?”
루나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기 부모를 바라봤다.
설마 프리키는 애초부터 태어나기를 은둔형 외톨이로 태어난 것인가?
“……그, 그… 애초부터 프리키가 조금 혼자 노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해졌을지는…… 자, 장담할 수 없구나……”
결국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는 뜻.
루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냥 기분이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어……. 변수가 너무 많아.’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루나가 퍼뜩 모래 마녀에게 물었다.
“다른 방법은… 다른 방법은 없어? 뭐라도 좋아……!”
모래 마녀가 잠시 고민했다.
딱 하나 있기는 했다.
“있기는 한데… 아가씨의 피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내 피? 도대체 왜, 아니. 됐어. 얼른 시작하자.”
“그건 프리키가 피의 대악마라서ㅡ”
이어지는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나가 비익의 검으로 제 손바닥을 쭉 그었다.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지며 소환진을 적셨다.
“……피를 좋아하거든요. 뭐, 이 정도면 되겠네요.”
고개를 저은 모래 마녀가 소환진을 살짝 조정했다.
‘아가씨의 피에 맞춰서 살짝 개조한 소환진은 오히려 이쪽 방법에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수천 년의 간극이 있지만 피로 묶인 혈연이라는 걸까?
재밌는 우연이다.
“시작할게요.”
다시금 소환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모래 마녀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불길한 언어를 뱉어냈다.
싸늘하게 멈춰버린 소환지에서 붉은빛이 되살아나며 음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소환진에서 낮은 고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른 식으로 소환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쩌적ㅡ 소환진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 너머로 거대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악의의 총체, 부정의 요람, 살아있는 재해가 균열을 통해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 나온다…!”
균열 너머의 존재와 눈이 마주친 루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 나오는 것이 프리키다.
한 손에 비익의 검을 움켜쥐고 루나가 몸을 쏘아 던졌다. 비도처럼 가볍게 땅을 박차고 곧장 검을 휘두르며, 노리는 것은 일격의 필살.
이윽고 균열 안쪽에서 앙상한 손이 튀어나오더니 억지로 균열을 벌리며, 있는 힘껏 몸을 통과시키는데, 보이는 것은 그림자에 휩싸인 한 쌍의 붉은 눈동자라.
잔뜩 충혈되어 흉험함 발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마귀의 그것이었다.
프리키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아아아아──────!!》
프리키의 고함 섞인 비명과 동시에 쇄도하는 것은 비익의 검이 흩뿌리는 하얀 검날.
촤악ㅡ!
비익의 검이 스치며 프리키의 그림자를 양단했으나 루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손에 남은 감촉은 한없이 얕았다.
프리키는 루나에게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 하나.
《───────!! 아아아아아아아!!! 피, 피의 향기, 기, 기가────!!!》
프리키의 고함과 함께 사방의 공기가 덜덜 떨렸다.
균열을 완전히 통과한 프리키가 소환진의 중앙에 서서 무거운 존재감을 발했다.
사이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사방을 훑으며 미친 듯이 찾는 것은, 프리키를 이곳까지 불러온.
붉은 피.
《아, 아, 하하하하하!! 피, 피!! 부, 붉은 피!! 아, 아아아아!! 달콤한, 피!!!》
허겁지겁 소환진에 흐르는 피를 빨아 마신 프리키가 황홀한 기색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프리키의 몸에서 짙은 회색 연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회색 손길에 닿은 것들이 빠르게 삭기 시작했다.
‘위험…!’
루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회색 연기는 위험했다.
그녀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가세하겠다 루나 !”
루나의 등 뒤로 에샤가 크게 도약하며 달려들었다.
파앗,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히 날아올라 연리의 검을 크게 머리 위로 들더니 힘차게 내리찍는다.
카가각! 연리의 검이 프리키의 그림자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지만, 이번에도 조금 얕았다.
“…프리키!”
“아, 아아…! 프리키, 프리키!!”
찰나의 순간 갈라진 그림자 사이로 프리키의 모습을 확인한 루나의 부모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시체처럼 핏기 없는 얼굴, 붉은 눈동자는 밤의 일족과 똑같았지만, 루비 같은 눈동자 안에 이글거리는 것은 피에 대한 끝없는 갈망뿐.
“그물! 그물을 던져라! 어서ㅡ!”
정신을 차린 로드의 재촉에 그림자로 엮은 그물이 허공을 날았다.
촤악ㅡ 넓게 펼쳐지며 날아간 그물에 회색 연기가 닿았다.
놀랍게도 그림자로 엮은 그물이 휘청거리더니 순식간에 그림자가 옅어졌다.
“으, 으으으으읏……! 저 연기가 그, 그림자를 빠, 빨아먹고 있어요……!!”
“프, 프, 프리키……! 나, 나야…! 바토리……!! 나 알아보는 거지……?!”
“아아아아ㅡ! 프리키, 프리키! 나다, 이, 이 아비를 아, 알아보겠니?”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프리키를 기억하는 일족이 앞으로 나와 그리 외쳤다.
《으, 으히히히…! 다,달다… 달아…!! 맛있어……!》
허나 프리키는 요지부동으로 바닥에 흐르는 루나의 피를 탐하기에 바빴다. 초승달처럼 샐쭉하게 휘어진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진미를 탐하는 미식가의 눈빛.
‘저건… 위험하다.’
로드는 본능적으로 저 존재가 프리키와 완벽하게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다.
인격을 구성하는 근본이, 영혼이 심하게 뒤틀린 것이다. 겉모습만 프리키와 비슷할 뿐, 저 존재는 그들이 알던 프리키가 아니었다.
“……프리키ㅡ!!”
“루나! 조심해라!”
루나가 비익의 검을 낭창하게 휘둘렀다.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진 검이 프리키의 등을 사선으로 내리긋고, 그 뒤를 따라온 연리의 검이 다시 한번 같은 자리를 벤다.
《아……? 킁, 킁킁…이거…… 네, 네 피였구나?》
그제야 프리키가 루나와 에샤를 돌아봤다.
프리키의 손짓에 바닥에 남은 핏방울이 솟구치더니 맹렬하게 회전하며 송곳의 형태로 변한다.
촤자자작!
구슬처럼 작은 핏방울이 바늘처럼 쏘아진다.
루나가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콧잔등에 뜨거운 감촉이 스치며 핏방울이 송골 배어 나온다.
아주 작게 방울진 피가 상처를 따라 흐르더니 이내 송곳처럼 변하며 루나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공격.
루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읍!”
루나의 뒤에서 달려온 에샤가 연리의 검을 풍차처럼 회전시켜 날아오는 핏방울을 쳐냈다.
《흐, 히이…? 너, 너는……? 으, 으으으으……!! 아아아아아아아!!!》
에샤를 바라본 프리키가 돌연 눈을 찌푸리더니 괴성을 터뜨렸다.
《너, 너어어어어……! 사, 산, 산…! 산 사람이구나…!! 아아아악!!》
콰앙!
프리키의 주변으로 회색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회색 손길에 닿는 것들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순식간에 먼지로 변했다.
루나와 에샤, 밤의 일족이 재빨리 물러났다. 회색 손길은 사막의 모래마저도 먼지로 쇠하게 했다.
“어우…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요…”
일찌감찌 뒤로 빠져있던 모래 마녀가 몸을 떨었다. 몸 깊숙한 곳에 숨어버린 모래 악마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쾅, 콰앙!
회색 안개 속에서 연달아 들려오는 살벌한 굉음.
중간중간 화살처럼 날아오는 핏방울이 공기를 꿰뚫었다.
루나와 에샤가 비익연리를 휘두르며 핏방울을 쳐냈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강제로 돌려보낼 준비는 해둬야겠어.”
모래 마녀가 모래를 움직여 땅 깊은 곳으로 제 몸을 숨겼다.
대악마를 지상에 풀어놓으면 전대미문의 재앙이 될 것이니.
그 정도 안전장치는 당연하였다.
* * * * *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박제가 된 존재를 아시오?
그게 바로 나다.
잠깐의 황금과 탐욕에 눈이 멀어 손을 잡아서는 안 되는 존재와 손을 잡아버렸으니.
그 이름도 두려운 박덕춘 부장이라.
오오.
그는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러 나의 생기와 의지를 탐했으며, 그 대가로 막대한 재화를 나누었다.
“……하아.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진짜.”
퇴근길의 택시 안.
막차 버스도 끊겨 새벽 콜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중이다.
막중한 피로에 자꾸 눈이 감긴다.
‘잠깐만 써야겠다.’
택시 기사님의 눈치를 살핀 다음 슬쩍 손에 별빛을 불러낸다. 그걸 움켜쥔 다음 빠르게 별빛을 흡입!
“후…”
잠깐이나마 피로가 가시며 활력이 몸에 감돈다.
얼마 전 별빛으로 이것저것 장난치다가 찾아낸 쓰임새였다. 잠깐의 각성 효과와 피로 회복 효과가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각성제가 아닐까.
“……”
박덕춘 부장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확실히 힘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게 전부 내 총알이야.’
여기에 곧 적금만 만기가 된다면… 진짜 큰 거 한방 온다.
“흐흐흐흐.”
혼자 웃음을 터뜨렸더니 백미러로 기사님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아마 지나친 야근에 미쳐버린 회사원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우웅ㅡ! 우웅ㅡ! 우웅ㅡ!
뒷주머니의 핸드폰이 바쁘게 진동한다.
《비ㅡ상!! 비ㅡ상!! 비ㅡ상!!》
《루나 다운!! 에샤 비상!! 대악마 프리키 등장!!》
“……프리키?”
얼마 전부터 에샤와 루나가 프리키를 소환할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 기어이 소환한 모양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이날을 위해, 내가 돈을 벌었지.
흐흐흐.
내가 지금 모은 돈이면 어? 벼락만 떨구는 게 아니라 정말 온갖 것들이 가능하단 말이야.
“……”
택시 기사님이 혼자 중얼거리는 나를 백미러로 안쓰럽게 바라봤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휴재 공지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