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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11

   종강 파티가 끝났을 무렵부터 아카데미 학장은 수명이 깎여나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온갖 곳에서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점이 된 것은 솔라딘 왕국의 1왕비였다.

   

   종강 파티 당일 변장을 한 채로 찾아와 아카데미를 둘러보았던 그녀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자신의 사람들을 아카데미에 집어 넣겠노라고 통보했다.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 말이다.

   

   처음에는 학장도 아카데미의 독립성을 위해 저항을 해보았지만 아카데미에 자금을 지원하는 귀족들의 압박 앞에서는 그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왕비의 통보는 반쯤 강제적으로 허락됐다.

   

   그 후에는 2왕비가 찾아와 자신의 사람들도 넣겠노라고 이야기를 했다.

   

   1왕비의 부탁을 수락한 순간부터 2왕비가 나설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학장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부탁을 수용했다.

   

   1왕비의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보다야 2왕비의 사람들도 함께 들어와 서로 견제하는 쪽이 아카데미에 득이 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이러한 청탁이 세 달 내내 미친 듯이 이어짐과 동시에 기존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단 점이었다.

   

   아카데미의 독립성은 어디로 간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권력을 통해 들어온 이들이 차지하고 교수들 사이의 알력 관계를 조정하고.

   

   요 몇 달 사이 폭삭 늙어버린 학장은 이번 년도가 끝나는 즉시 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 정신 나간 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다가는 제 명을 다하기도 전에 과로로 죽을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물러날 수 있을까 학장이 고민하던 때에 아카데미의 교수 중 하나인 칼이 학장실을 찾았다.

   

   평소 교수의 일과 자신의 주인을 모시는 일을 병행하느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기사의 등장에 학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알른 가문의 기사가 이 곳에 찾아온 거지? 얼마 전 거리에서 악신의 추종자가 발견된 것과 관련된 일인가?

   

   “아카데미 내부에 악신의 추종자가 잠입했었습니다.”

   

   칼 교수가 꺼낸 말은 학장이 상상하던 그 어떤 최악보다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아카데미 내부에 악신의 추종자가 들어왔다니!?

   

   교회와 함께 만든 안전장치가 전혀 일하지 못했다는 소리이지 않나!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성녀님을 비롯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이미 추종자들을 제압해 두었단 점이었다.

   

   만일 성녀님께서 먼저 움직여주지 않으셨다면 아카데미의 입학식 때 커다란 재앙이 펼쳐졌을 터.

   

   “지금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부상자는 없고, 악신의 추종자들은 성녀님께서 직접 교회에 인도하셨습니다.”

   “…뒷처리도 이미 끝났다는 소리군. 다행이군. 다행이야. 성녀님께서 이 곳에 있어주신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군.”

   “이번 문제를 해결한 건 성녀님이…”

   “…음? 뭐라 했나 칼 교수?”

   “아닙니다. 이야길 끝마쳤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아. 성녀님을 비롯한 귀족 분들에게 감사하단 이야기도 전해주게. 추후 따로 찾아뵙겠지만 그 전에 미리 마음이라도 전해 둬야지.”

   

   허나 학장의 안도는 채 하루가 이어지지 못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조용하게 처리된 일을 어찌 안 것인지 2왕비의 심복이 찾아와 2왕비와 연결된 수정구를 내민 것이다. 

   

   “학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2왕비의 심복이 찾아와 2왕비와 연결된 수정구를 내민 것이다.

   

   얼마 전 공허의 추종자가 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아카데미 내부의 점검을 느슨히 하는 게 말이 되냐면서. 인사의 검증을 하긴 하는 거냐는 2왕비의 항의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기에 학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말을 하자면 할 수는 있었다. 왕가의 권력 다툼 때문에 일어난 혼란 탓에 인사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거나 교회의 사람들을 불러 점검했음에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들을 말이다.

   

   “제 쪽에서 사람을 보내 다시 한 번 결계를 점검할테니 그런 줄 아세요.”

   “예. 알겠습니다. 2왕비님.”

   

   그렇지만 변명을 해봐야 상대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임을 알았기에 학장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학장은 수많은 귀족 가문과 타 아카데미의 항의를 받아냈고 그 때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년처럼 무언가 문제가 생긴 후에서야 문제를 알게 됐다면 물리적으로 목이 날아갔을 테니.

   

   그렇게 온갖 사람들의 항의에 대처하던 학장이 간신히 숨 돌릴 틈을 되찾았을 즈음 학장실에 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왕국에 존재하던 모든 이들에게 멸시를 당했지만 지금은 모든 세력에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인재가 된 사람.

   

   예술 교단의 사도를 비롯한 교단의 신도들이 여신의 현신이라며 극찬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영애.

   

   훗날 대륙의 판도를 뒤바꾸게 될 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천재.

   

   루시 알른이 학장실을 찾은 것이다.

   

   교복 차림을 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학장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보란 듯 다리를 꼬고 학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루시의 모습엔 시건방지다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렸지만 학장은 그녀에게 무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학장의 목이 날아가는 걸 막아준 사람이 바로 눈앞의 영애였으니까.

   

   이번에도 은혜를 입은 학장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루시 알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영애?”

   “우리 불쌍한 학장님의 수명을 줄여줄 소식이 있어서요.”

   “…수명을 줄일만한 소식이요?”

   “궁금하세요? 꼭 듣고 싶으시다고 부탁하시면 제가 특별히 말씀해드릴 수도 있는데.”

   “뭐. 뭐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푸하핳. 목소리 떨리는 게 엄청 겁 먹으셨나 보네요. 곤란하네. 이렇게 겁이 많으신데 이 소식을 들려드렸다만 숨이 멎어버리실 것 같은데.”

   

   어떡하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루시가 턱을 두드리자 학장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알른 영애.”

   “흐응. 학장님의 꼴이 하도 처량해 보이시니 착한 제가 도와드릴게요.”

   

   루시는 키득키득 웃으며 품 안에서 편지지 하나를 꺼냈다. 그걸 받은 학장은 편지지의 인장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학장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편지에 담긴 인장은 주신 교회의 것이었으니까.

   

   “뭐해요? 열어서 읽어봐요. 분명 재밌어하실 거에요.”

   

   재촉에 못 이겨 편지지를 뜯은 학장은 그 안에 담긴 글귀를 보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편지지 안에 적힌 것은 주신 교회에서 직접 이번 일에 대한 규탄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재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종교가 직접 학장의 죄를 묻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와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기쁘셨어요? 그렇게 좋아하시니 저도 기쁘네요.”

   “이게. 이게 정말입니까?”

   “너무 밤을 많이 새셔서 기억력에 이상이 생기셨나요? 제 친구가 누구인데 설마 거짓이겠어요.”

   

   루시 알른의 옆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떠올린 학장은 눈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걸 굳이 내게 가져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내가 죽어가는 꼴을 지켜 보면 그만이셨을 테니!

   

   “무얼. 무얼 바라십니까. 영애.”

   “저요? 무능한 학장님께서 발악하시다가 처량하게 뒤져가는 꼴을 보면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제발 부탁드립니다. 무어라도 하겠습니다. 무어라도 할 테니 도와주십시오.”

   

   다른 귀족들의 규탄이야 어떻게든 넘길 수 있다. 학장 또한 솔라딘 왕국의 귀족이고 권력자이니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가능하지.

   

   허나 주신 교회는 아니다. 주신 교회에서 직접 그를 규탄하게 되면 그의 지인들도, 그의 가문도, 그의 나라도, 모두 다 그를 내버릴 테니까.

   

   “정말 뭐라도 하실 건가요?”

   

   몇 번이나 땅에 머리를 박으며 빌던 학장은 루시 알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갤 들었다.

   

   “예. 물론입니다. 영애.”

   “그럼 핥아요.”

   “…예?”

   “제가 외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나요?”

   

   눈앞에서 까닥이는 신발을 본 학장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허나 루시는 그걸 허락하는 대신 그의 이마를 밀어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푸흐흫. 농담삼아 한 말인데 진짜 하려 들 줄은. 나이도 드실대로 드신 분이 추하게 버둥대면서라도 살고 싶으셨나봐요?”

   “…”

   “저를 위해 일하겠노라 맹세하세요. 그럼 주신 교회의 규탄을 막아 드릴게요. 노망난 학장님이라도 이 정도는 알아들으시겠죠?”

   “…예. 알겠습니다. 영애.”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학장님이라면 들어주실 수 있는 거에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제 시종 하나를 데리고 오려고요.”

   

   *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은 몰랐네요.’

   

   학장과의 맹세를 끝마치고 나온 나는 너무도 쉽게 일이 진행됐단 사실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내민 계획이니 잘 될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어쩌겠느냐. 저 쪽의 과실이 명확하니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지.>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이 알려지지 않았단 사실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애초에 아카데미에 악신의 추종자들이 침입했었다는 사실은 그 어디에도 퍼지지 않았다. 아카데미 거리에서의 소란과 달리 이번 일은 조용하게 처리가 되었으니까.

   

   추종자들을 데려간 교회의 사제들도 페이비가 한 건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아카데미에서 문제가 일어났다는 걸 추측하지도 못하고 있지.

   

   그럼 여태 학장을 압박한 것들은 뭐냐고?

   

   맨 처음 시작인 2왕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뉴먼 가문과 카리아의 부하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가짜들이야. 그러니까 학장은 위조된 항의에 지레 겁을 먹고 굴복한 거지.

   

   할아버지의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나와 연이 있는 2왕비를 통해 겁을 준다.

   

   그리고 나서 내 인맥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진짜 항의 와 위조를 섞어 압박을 준 후 마지막으로 교회의 편지를 이용해 결정타를 꽂으면 끝.

   

   학장실에서 일부러 강한 매도를 던진 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그래야 학장이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맹세를 하게 될 테니까.

   

   <뭐 어떠냐. 저 녀석이 멍청한 덕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이제 목줄만 잘 잡으면 된다.>

   ‘그렇겠죠.’

   

   머잖아 학장은 자신이 완벽히 속아넘어갔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 땐 이미 늦었다.

   

   이미 나와 맹세를 맺어버린 이상 그는 어지간해선 내 말에 따라야만 한다.

   

   학자이자 귀족인 그가 맹세를 어겼단 불명예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으니. 이로써 나는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루카 대신 제대로 된 정보원을 구한 셈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이래서 좋아. 루카나 라샤 같은 광인들과 달리 생각을 따라갈 수 있으니까 안심하고 일을 시켜먹을 수 있잖아.

   

   <근데 말이다. 루시. 네 시녀는 왜 데려오려고 하는 게냐?>

   ‘별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에린이 있어야 완벽하게 화장을 할 수 있으니까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계약의 내용을 더했다고?>

   ‘겨우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이거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라고요.’

   

   할아버지 당신이 모시는 신께서 제가 화장하고 기도하길 원한단 말이에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스가키 탱커의 이모티콘이 출시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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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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