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신 세계 ( 2 )
《후……》
하늘을 우러르던 발가르가 크게 호흡을 다듬었다.
그의 검은 심장은 더 없을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이렇게 심장이 뛴 것이 얼마 만이지?
‘저번에 붉은 머리의 인간과 싸웠을 때 이후로 두 번째인가.’
발가르는 그 당시보다 더 거세게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무려 지상이다!
지상!
어버이께서 직접 출입을 금지하신 유일한 차원이자 발가르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금단의 차원!
평소 어버이께서 지상에 지극히 많은 관심을 두고 아끼시는 것 또한 알기에, 발가르는 지상에 가고 싶은 마음을 꼭꼭 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크후후후…》
작게 미소를 흘린 발가르가 걸음을 서둘렀다.
만마의 제왕 된 입장으로 가볍게 나들이하듯 외유를 할 수는 없는 법.
더불어 어버이께서 하명하신 것 또한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를 부단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
꽈릉ㅡ!
발가르가 진심을 다해 바닥을 굴렀고, 한 줄기 검은 번개가 심연을 가로질렀다.
* * * * *
무언가를 함에 있어 동기 부여는 굉장히 중요하다.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되는 동시에 길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이정표의 역할을 겸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또한 허다하니.
사람은 항상 살아가면 꾸준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과거를 새기고, 고개를 들어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말이 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어, 으음. 그러니까.”
살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
나는 지금 모래사장에 정좌하고 있다.
사신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보는 케넬름이 무서워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한 손으로 꿈틀거리며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장도리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구조의 신호를 담은 눈빛을 저 뒤에 떨어진 리아에게 보낸다.
눈이 마주친 리아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이 떨어졌다.
“지금 어디를 보시는 거죠?”
“아, 아니야. 어, 음. 우리 어디까지 말했었지?”
미안한데 진짜 까먹었어…
내 질문에 케넬름이 푹 한숨을 쉬고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하… 진짜 이런 표정도 귀여워 보이면 안 되는데 진짜……”
“어? 뭐라고?”
“아니에요. 어디까지 얘기하고 있었냐고요? 위대하신 분께서 발가르, 그 썩을, 아니. 상종 못 할 종자에게 지상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죠.”
“아, 맞아.”
꿈틀
케넬름의 손이 움찔하며 장도리에 더 가까워졌다.
단어 선택에 조금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쓰읍… 후우… 쓰으으읍… 후우우… 좋아요. 좋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종자를 지상으로 보내신 겁니까? 거기에!! 이제야 겨우 자식을 되찾은 루나 어미 아비는 무슨 죄입니까? 간신히 만난 자식을 다시 심연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건 너무하십니다!”
저 뒤에서 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였구나.
“그게 말이지. 어, 나도 나름의 계획이 다 있단 말이야. 일단 우리 대화를 좀 하지 않을래? ……손에 든 장도리에서 힘 좀 빼고.”
“……제가 감히 불경을 저지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위대하신 분께서 계획이라는 단어를 말한 것치고 멀쩡하게 돌아간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이죠.”
“하지만 결과는 좋았죠?”
“후우우…”
케넬름이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더 하다가는 정말 저 장도리로 내 머리를 내려칠 것 같아.
“크흠, 내 계획은 말이지? 지금 내가 만든 탄탈로스 있잖아.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 확장 프로젝트야.”
“…확장이요?”
참을 인을 외우고 있던 케넬름이 드디어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케넬름이 진정된 것 같으니, 저 멀리 도망가 있던 리아도 슬쩍 다가왔다.
“나도 이제는 어? 발가르라는 어엿한 자식이 있는 부모로서… 자식인가? 아무튼, 내가 막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지는 않는 말이야. 저번에 무당 선생님한테 인생 체험 당하고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지리산인가 설악산 어딘가에서 수련한다고 하시던 무당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수천 명의 인생을 체험한 덕분에 제가 조금은 신답게 행동하려 합니다.
크흠.
조금 무게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목소리를 깔았다.
《너, 최초의 성녀 케넬름아. 케니스의 어미 되는 리아야. 나의 질문에 답하여라.》
온몸으로 별빛을 뿜어내며 그리 말한다.
털썩 무릎 꿇은 케넬름과 리아의 정수리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다. 내 시야가 높아지는 걸까.
“여기 당신의 종이 듣고 있나이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언제라도 깨어있는 당신의 하인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내 묻노니. 죽은 자의 영혼은 어디로 향하느냐?》
이에 케넬름과 리아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대답하기를.
“전사의 영혼이라면 위대하신 분의 황금 기마대에 속하여 영원토록 영광과 승리를 위해 싸울 것이며, 죄지은 자의 영혼이라면 탄탈로스로 떨어져 억겁을 지옥 불에 탈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온 범인은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여 평온과 고요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죽은 자의 행방입니다.”
전사는 죽어서 내가 만든 황금 기마대로 향한다.
죄지은 자 또한 내가 만든 탄탈로스로 향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의 영혼은?
《너희들이 말하는 영원한 안식이란 저기 보이는 영혼의 바다일 터. 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실로 맞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대부분 사람의 혼은 영혼의 바다로 온다.
영혼의 바다에 섞이며 바다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평화 속에 잠들기도 한다.
그건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말하건대, 죽은 이의 영혼은 영혼의 바다에게 온다.
그리고 영혼의 바다는 다섯 조각으로 찢어진, 스스로 약해지기를 선택한 내 힘의 원천.
‘이 세계에서는 영혼이 계속 소비만 되는 상황 아닌가?’
죽은 이의 영혼은 계속 바다로 향하는데, 계속 새로운 영혼이 공급되는 기묘한 상황.
생명 탄생의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리.
‘이걸 멈춰야 해.’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계속 영혼의 바다로 온다.
나는 영혼의 바다에서 힘을 끌어다 쓴다.
어? 그런데 영혼이 자꾸 늘어나네?
어라? 숨만 쉬어도 자꾸 힘이 세지네?
‘아직 본신의 힘은커녕 전에 흡수한 7할의 힘도 컨트롤 못 하는데, 여기서 더 강해지면 진짜 차원 부서진다……’
어딘가의 웹소설 제목도 아니고, 진짜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판국이라니.
이러다 진짜 과거의 대참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은 그것으로 한 번이라. 그 끝은 너무나 짧고 필사적이다. 영원토록 억겁의 우주에 비하면 그들의 삶은 얼마나 찬란하고 짧으냐? 내 이를 어여삐 여기노라.》
점점 내 시야가 높아진다. 하염없이 높아져 이제는 고개를 한참이나 숙여야 케넬름과 리아가 보일 지경이다.
《하나의 영혼이 어찌 한 번으로 끝나겠느냐. 신실한 이에게는 마땅히 상이 따라야 할 것이며, 경미한 죄를 지은 자에게는 경미한 처벌이, 갱생하여 마음을 고친 자에게는 마땅한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탄탈로스에서 예전처럼 ‘비명’을 뽑아내지 못하는 녀석들이 늘고 있다. 나름대로 과거의 죄를 거의 다 청산했다는 뜻이다.
그게 마음까지 고쳐먹었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는 몇 명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내 이를 위해 창대한 뜻을 널리 펼치노니.》
양손을 펼치자 온 사방으로 별빛이 퍼져가며 천지를 환하게 밝힌다.
밤하늘 가득 쏟아지는 유성우가 꼬리를 길게 그리며 나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내가 곧 별빛이자, 모든 것의 중심이다.
《큰일을 행함에 있어 너희들의 도움을 받고자 함이라.》
그 말에 케넬름과 리아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뜻에 쓰시옵소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응애.
나 아기 신, 할 일이 생겼어.
케넬름이랑 리아가 옆에서 도와줘.
‘잘 풀리면 프리키는 물론이고, 영혼의 바다에 쌓이는 영혼도 한번에 처리할 수 있어!’
이번에는 진짜 완벽한 계획이야.
* * * * *
왕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왕을 호위할 수많은 군대?
왕이 곧 군대이기에 불필요하다.
권위를 상징할 반짝이는 금은보화?
왕은 이미 저 찬란한 태양처럼 빛나거늘, 어찌 감히 땅속의 광물로 이를 대신하는가?
왕의 영광을 노래할 찬란한 음악과 함성?
한낱 금속 쪼가리의 합주와 만민의 목소리가 왕의 손짓 한 번보다 무거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왕을 왕으로서 존재하게 하는가.
태어나기를 만마의 제왕으로 태어난 발가르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힘. 모든 것은 힘으로서 증명되고 실존한다.》
압도적인 힘.
그것이야말로 왕의 증명이며 자격이자 왕관.
《이제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보여줄 때가 되었도다. 진정한 왕이 무엇인지.》
뚜둑, 가볍게 몸을 푸는 발가르의 뒤로 펜리르가 부복하였다.
“왕이시여, 부디… 즐거운 외유 되시기를.”
펜리르는 땀을 흘릴 수 없는 늑대의 몸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아마 식은땀을 흘렸다면 발밑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으리라.
‘아리오크가 죽고, 테니아가 실종되었으며 프리키 또한 지상으로 사라졌다. 이런 때에 왕께서 몸소 지상으로 행차하시다니.’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분명 지상에 어마어마한 혈겁이 몰아치리라.
시체가 산처럼 쌓여 피가 강을 이루고, 비명과 통곡이 천하를 메우겠지.
펜리르는 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깊게 머리를 숙였다.
펜리르의 뒤로 까만 바다처럼 보일 정도로 가득한 무수한 악마들이 가득하였다.
일제히 머리를 낮추고 만마의 제왕을 우러르며 발가르의 외유를 바라보았다.
《펜리르여. 그럼 다녀오마.》
“예, 저의 영원한 제왕이시여.”
스걱!
얼어붙은 탄식이 허공을 베어 가르자, 차원이 가볍게 갈라지며 틈이 벌어졌다.
발가르는 차원의 틈 너머로 사라졌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2월이 시작된, 가벼운 비와 함께하는 월요일입니다…!!
다들 우산은 챙기셨나요? 항상 건강하고 즐거운 일만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크후후후…!! 케넬름의 일러스트 러프본이 나왔습니다…!! 러프본을 받은 저는 그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1231번 돌았습니다!! 너무 예뻐요!!
그런데 독자님들한테는 안 보여줄꺼야!! 나 혼자 볼꺼야!!! 우헤헤헤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