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뉴 하우징
무릇 이 땅 위에 온갖 신비와 신화가 거닐던 시절이 있었다.
날개를 펼치면 하늘을 가득 뒤덮는 거대한 새가 비상하였고,
용의 먼 친척쯤 되는 존재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지상을 활보하던 시절이었다.
케넬름이 감히 그 시절을 평가하자면, 그야말로 신화의 시대.
온갖 신화적 존재가 땅 위를 거닐며 신비를 흩뿌리던, 야만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
케넬름은 그런 존재들 사이에서 인간들을 이끌며 당당히 인간의 영역을 차지했다.
이는 무슨 말이냐.
“내가 너 같은 것들을 아주 신물 나도록 잡아봤어!”
꽈앙!
케넬름이 땅을 구름과 동시에 신형이 흐릿하게 번진다. 중간 과정을 뚝 잘라서 원인과 결과만을 남긴 것처럼, 케넬름은 어느새 발가르의 코앞에 서 있었다.
《넌, 설마ㅡ!》
케넬름을 알아본 발가르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느려진 시간 속, 케넬름의 작은 망치가 운석과도 같은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막아야……!’
하필이면 다리가 한 짝인 터라 자세가 불안정했다.
가까스로 갖다 댄 검의 표면을 타고 작은 망치가 카가가각! 미친 듯이 불똥이 튀어 오른다.
“이건 케니스의 몫이다, 이 새끼야!”
케넬름의 발차기가 날아들며 발가르의 옆구리를 두들기는데, 옆구리 쪽에서 우드득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끄허어억!》
한참이나 밀려난 발가르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태어나기를 제왕이자 강자로 태어난 발가르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고통이었다.
“하. 딱 보니까 견적이 나오네. 타고난 신체에 재능만 믿고 깝죽거리는 새끼.”
신화의 시대에 그런 괴물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산에 비견되는 거인이 있었으며, 한번 본 기술은 모조리 따라하는 부조리한 종족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병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우오오오오!! 하늘에서! 하늘에서 성녀님이 내려오셨다!!”
“케넬름 성녀님! 케넬름 성녀니이이임!!”
“신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반응해준 케넬름이 장도리에 묻은 초록색 피를 툭툭 털었다.
“타고난 신체, 압도적인 재능, 불합리한 이능… 그런 거 가지고 깝죽거리는 녀석들, 내가 모조리 보내 버렸어. 알아?”
《꺽, 끄흑, 넌, 넌, 도대체 뭐냐… 계집!》
“계집? 계집?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를!”
《장난은 여기까지다! 죽어라!》
몸을 일으킨 발가르가 자세를 취하더니 곧장 검을 휘두른다.
검로를 따라 검푸른 얼음이 태산처럼 일어나며 케넬름을 덮쳤다.
콰가가가각!
“서, 성녀님!!”
갑작스러운 일에 어찌 끼어들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던 케니스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발가르의 일격은 위력적이었으며 위협적이었고, 장엄했다.
일격에 솟구친 얼음은 거대한 빙산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그 안에 케넬름을 품은 채로.
“서, 성녀님이…”
“얼음에, 얼음에 갇혔어……”
“오오. 오오오… 하나 된 분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하늘에서 강림한 성녀가 마왕의 일격에 봉인 당했다.
전사들이 충격에 휩싸이며 침묵에 빠졌다.
움푹 파인 옆구리를 부여잡은 발가르가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외발이라서 일어나는 것이 불편했다.
《끄으윽, 하하…! 별것도 아닌 계집 주제에. 퉷.》
평소 어버이의 눈을 빌려 몰래 훔쳐보는 것밖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제법 강한 계집이었다. 이 몸에게 통증이라는 것을 선사하다니.
《이 몸 앞에서는 한낱 범부에 불과한 것을.》
쩍ㅡ
《……?》
머리 위에서 무언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쩌저저적ㅡ! 콰앙! 마치 알에서 용이 태어나는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차이점이라면 알 대신 얼음에서, 용 대신 케넬름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이야아아아아아아ㅡ!”
실로 우렁찬 기합과 함께 얼음을 깨고 나온 케넬름이 운석처럼 떨어지며 발가르를 향해 날아갔다.
꽈앙!
작은 망치에서 길한 빛이 터져 나오며 무수한 궤적을 그린다. 한번 한 번의 망치질에 담긴 것은 오묘한 묘리와 이치가 담긴 일격.
《끄으으윽! 제법이구나!》
발가르 또한 타고난 신체를 십분 활용하며 이를 받아쳤다.
서릿빛의 검이 이리저리 환영으로 일그러지다가 뱀 같은 궤적을 그리기도 하더니, 패도적으로 찌르고 베며 어지러이 검로를 그린다.
《흐아아아아! 계집! 가만두지 않겠다!》
“네가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꽝, 꽈르릉! 콰앙! 콰가강!
두 초월적인 존재가 맞부딪히며 일대의 지형을 뒤틀기 시작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뒤집어지는 풍경에 정신을 놓고 있던 성기사들이 부리나케 진형을 물리기 시작했다.
“케니스! 어서 뒤로 빠지자! 얼른!”
“…자, 잠깐만요. 아주 잠깐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성녀님을 보면 뭔가, 뭔가 알 것 같아요.”
한스의 재촉에도 케니스는 움직이지 않고 눈에 힘을 부릅 주며 케넬름을 바라봤다.
소리에 비견될 정도의 움직임이기에 눈으로 좇는 것조차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보인다.
케넬름의 신경 줄기와 근육 한 올, 작은 뼈마디에 깃든 별빛이 정밀하게 작동하는 것이. 이를 알아본 케니스의 입이 떡 벌어진다.
별빛은 상상의 구현이다.
그 말인즉, 케넬름은 지금 저 별빛들을 작은 부위 하나하나 모조리 상상하며 구현하는 동시에 싸움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게 사람의 두뇌로 가능한…?’
“얼른 가야 해! 얼른!”
결국 케니스는 한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그리하여 발가르와 케넬름, 단둘만이 남았다.
잠시 싸움이 멈추며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흐으. 이제 듣는 귀도 없으니 대답해라 계집. 네년이 설마 홀로 내려왔을 리는 없을 터. 어버이의 뜻이냐?》
“그 더러운 입으로 고귀한 이름을 함부로 올리지 마라.”
《맞군. 끄응. 잠시 한눈을 팔았거니와 어버이께서 곧장 알아차리셨을 줄은.》
움푹 파인 옆구리를 매만지며 신음하던 발가르가 케넬름을 노려보더니, 먼저 검을 납도했다.
《나의 잘못이니 겸허히 반성하겠다. 물론, 계집 너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께 나의 잘못을 고하는 것이다.》
“……”
《그러니 이제 이쯤 하도록 하지. 나는 어버이께 임무를 하명받은 몸이다.》
생각 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발가르의 모습에 케넬름이 잠시 고민하다가 장도리를 거뒀다.
이에 발가르가 물러나는 척하면서 반동을 이용해 순식간에 뛰어들어, 케넬름의 명치를 향해 손톱을 휘두르는데ㅡ
“그럼 그렇지 이 새끼!”
눈 깜짝할 사이에 옆으로 물러난 케넬름이 있는 힘껏 치켜올린 장도리를 아래로 쾅 내리찍었다.
《커헉…》
정수리가 살짝 오목해진 발가르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새끼가 뒤통수를 치려면 눈빛이나 좀 숨기고 하던가.”
기절한 발가르를 발끝으로 툭툭 굴린 케넬름이 잠시 고민하다가 장도리를 휙휙 휘둘러 발가르의 팔 한쪽을 뚝 떼어냈다.
발가르에게는 경고의 의미를, 성도 쪽 인간들에게는 승리의 표식으로 남기기 위함이다.
“자. 이제 얌전히 동쪽으로 가자.”
이대로 두면 깨어나서 또 무슨 성질을 부릴지 모르는 녀석이니 동쪽으로 미리 옮겨두는 것이 옳았다.
차마 손으로 만지기는 싫어서 발로 툭툭 굴리며 발가르를 동쪽으로 보내는데,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모양새는 제왕의 품위가 땅에 떨어진 모습이라.
발가르를 데굴데굴 굴리며 동쪽으로 가던 케넬름이 성도와 동쪽 해 뜰 녘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툭, 데구르르.
툭, 데구르르.
일정한 리듬으로 발가르를 툭툭 차면서 말이다.
* * * * *
“오우……”
그 뭐냐.
어린 시절 고질라와 울트라맨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ㅡ에 대해 심오하고 진지한 토론을 나눈 적이 있다.
아버지는 울트라맨의 설정이 어쩌구 저쩌구 우주적 마피아라는 둥 떠들면서 울트라맨의 승리를 점쳤고, 어머니는 그래봤자 3분 컵라면 아니냐 하시며 고질라의 승리를 예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생산적인 토론이 아닌가 싶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존나 큰 거인과 존나 큰 공룡이 싸운다는 상상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다.
요지는 그거다
“………진짜 무슨 거인들이 싸운 것도 아니고.”
고질라와 울트라맨이 싸우고 난 자리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땅이 갈라지고 부서져서 협곡을 만들었으며, 작은 언덕은 사라졌고, 일대의 지형이 뒤바뀌었다.
케넬름과 발가르의 진심 전투를 구경한 나는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케넬름의 진심?
‘앞으로 조심해서 깝쳐야겠다…’
케넬름이 발가르를 축구공처럼 굴리며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지상에서 눈을 돌렸다.
금쪽이 발가르를 수습했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차례.
저 멀리 열린 균열을 통해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향했다.
쑤욱, 몸을 통과함과 동시에 낯선 이질감이 몸을 휘감는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이렇게 직접 차원을 꾸미는 건 또 처음이지 않나?’
탄탈로스를 만들고 꾸밀 적에는 핸드폰을 통해서 꾸몄는데,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하는 것은 또 색다른 경험이다.
“일단 컨셉은, 음…”
평범한 이들을 위한 저승.
윤회를 위한 장소, 새로운 기회 혹은 경미한 벌을 받는 심판장.
참 오묘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아마 나 혼자서 이런 것을 만들라했으면 고민하다가 머리가 터졌을지도.
다행히 앞선 선배님들이 탄탄하게 구축해놓은 보기 좋은 세계관이 두 개나 있었으니, 하나는 연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도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예수 선배님! 부처 선배님!’
미흡한 후배가 살짝 좀 빌려 쓰겠습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이제 설 연휴의 시작이군요!! 독자님들 모두 즐거운 연휴 보내세욧…!!!
금요일은 슈뢰딩거의 휴재입니다…! 일단 본가로 올라가서 글을 쓸 환경이 되면 최대한 써보겠습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후원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을까요? 저에게는 너무나 감사하고 또 소중한 응원과 사랑입니다…!! 언제라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싸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