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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

       학생회에 발목이 잡혀 점심시간을 날려먹었지만, 괜찮았다.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오후 수업이 끝난 직후에 다시 중앙광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버멜과 이르카가 같이 따라왔다. 동아리 하나 들려다가 졸지에 5인 파티를 결성해버렸다.

         

       “…저번에는 고마웠어.”

         

       이르카는 날 볼 때마다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난번 황자를 때려눕힌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느라 진을 다 뺐다. 나로서는 친구 사이에 이런 식으로 상명하복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였으니까.

         

       서로 필요만 만큼 돕고 살면 얼마나 좋은가. 어차피 난 여기 남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 떠나버릴 몸이라면 최대한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떠나는 게 예의였다.

         

       생각해보니 지금 구성원을 데리고 다니면 금방 도감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로테는 화계마도, 프레이는 지계마도. 이르카와 버멜은 각각 수계마도와 공계마도였다. 심지어 어정쩡한 실력자도 아니고, 특별반에서도 인재 취급을 받는 요주의 인물들이었다.

         

       운이 좋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선 화계마도. 화계마도의 완성은 플레어를 개발해내면 사실상 끝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일 어려운 걸 해내고 나면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처음에는 플레어 개발에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로테와 머리를 맞대고 나서부터는 진척속도가 빨라졌다.

         

       다음은 지계마도다. 현재 나는 헤를라인 선생님 밑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연성술에 능한 프레이의 도움이 합쳐진다면 핵개발에 필요한 실험장비를 준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수계마도나 공계마도는 아직 덜 배워서 잘 모르겠지만, 조만간 알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이르카나 버멜이 나중에 도와주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버멜은 몰라도, 이르카는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황자를 두 번이나 내쫓아줬으니까. 수계마도를 알려달라고 하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으음, 김칫국부터 마시진 말자. 그런 건 화계마도를 완성하고 나서 부탁해도 늦지 않다.

         

       플레어를 완성하기 위해선 여러 실험 장비가 필요했다. 그 비싼 걸 1학년 신분으로는 대여하기 어려웠으니, 나는 학술 동아리에 들기로 했다.

         

       학술 동아리의 종류는 다양하다. 원소마도를 수련하는 곳, 스크롤 작성법을 배우는 곳 등등.

         

       그중에서도 내가 눈여겨보는 건 많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연성술 동아리였다.

         

       “연성술 동아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이 이번에 부장직을 물려받았다고 들었어. 한 번 가 볼래?”

       “좋지.”

         

       로테가 아는 사람? 먼저 입학한 형제자매라도 있나?

         

       로테의 제안으로 우리 일행은 분수대 옆에 난 경사를 올라갔다. 예상과는 달리 꽤 많은 학술 동아리가 이쪽에 몰려있는 상태였다. 놀기 좋아하는 신입생에겐 이 오르막이 통곡의 구간이겠지.

         

       그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존재한다. 차려놓은 규모도 크고, 처음 보는 합성 마석도 여러 개 놓인 부스였다. 그 중심에는 진홍색 머리칼의 남학생이 후배들에게 연금술로 만들어낸 물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남학생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로르웰’, 뒷산에서 아이언 드레이크를 잡았을 때 우연히 만난 이후로 가끔가다 얼굴을 트고 지내던 한 학년 선배였다. 보아하니 로르웰이 로테가 말한 지인인 것 같았다.

         

       “오라버니!”

         

       로테가 얼굴을 밝히며 쪼르르 달려갔다.

         

       “동생, 여긴 어쩐 일이니?”

       “오라버니가 있는 동아리에 가입하려고요. 친구들도 데려왔어요.”

         

       어쩐지 둘이 똑 닮았다 싶더라니. 나는 팔짱을 풀며 로테의 오빠에게 묵례를 했다. 나를 발견한 로르웰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뗐다.

         

       “선배님?”

         

       아마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로르웰은 날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말실수를 하곤 했다. 내가 하스펠트 교수의 노예로 있던 시절 그에게 몇 가지 일을 도와줬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에게 높임말을 사용하던 것이 아직 버릇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입학한 후배한테 ‘선배’라니, 모두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말실수였다.

         

       “선배…요?”

       “아, 잠시 다른 사람이랑 헛갈렸나 봐…! 그래, 어디 보자…. 우리 동아리에 관심 있니?”

        “네. 바로 등록해도 되나요?”

         

       지금 로르웰이 홍보하고 있는 동아리는 틸레트에서도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알아본 바로는 금전적인 지원도 최상위권, 아카데미에서 허락만 해 준다면 동아리 부원 신분으로 교내 연구실이나 박물관에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박물관의 물품을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박물관에선 마수의 사체를 모아놓다가, 종종 연구실에 판매하여 수익을 남긴다. 플레어의 위력을 시험하려면 그곳에서 재앙급 마수의 장갑을 빌려야 했다.

         

       우리는 로르웰 선배가 운영하는 동아리에 속전속결로 가입했다. 나와 로테가 먼저 사인을 했고, 뒤이어 연성술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 프레이가 펜을 잡고 제 이름을 끄적거렸다. 글씨는, 영 못 쓴다.

         

       “거기 뒤에 두 학생은 어때?”

         

       이르카와 버멜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졌다. 이르카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 다른 곳에도 입부하려고 해서….”

       “매일 참석할 필요는 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등록만 해 두고 원하는 게 있으면 그때마다 와서 활동해도 되니까.”

       “아.”

         

       이르카 또한 로르웰 선배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청서류를 작성했다.

         

       “엘프 남학생은?”

       “그럼 저도 들어갈게요.”

         

       순식간에 부원 다섯이 늘어난 게 좋았는지 로르웰은 한껏 밝아진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내가 로테와 프레이를 데리고 부실을 찾은 건 다음 날의 일이었다.

         

       넓은 곳이었다. 그에 비해 사람은 없어서 한산했다. 우리가 이른 시간대에 찾아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다른 부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품실은 마석이나 마전지를 포함한 여러 실험 재료들로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비품실 구석에 [편한 대로 사용하세요]라고 적혀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첫날부터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래서 뭘 보여줄 건데?”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프레이, 넌 설계도와 재료만 주어지면 어떤 장치라도 금방 만들어낼 수 있는 거 맞지?”

       “칫, 날 뭐로 보고? 원하면 화포나 비행선도 연성해낼 수 있어! 어릴 때부터 그런 것만 보고 자랐으니까! 그러니까 뭘 보여 줄 건데! 빨리 말해봐!”

         

       프레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알았다, 알았어.”

         

       나는 들고 온 가방에서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A3 용지 크기에 달하는 색지였다. 돌돌 말려있던 용지가 펴지자 그 안쪽에 그려져 있던 정교한 그림과 수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부터 틈날 때마다 구상해서 그리고 이었던 설계도였다.

         

       “우와, 이게 뭐야? 도넛처럼 생겼는데!”

       “도넛 아니야.”

       “그럼 뭔데?”

         

       두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입을 열어서 우선 한 마디를 내뱉었다.

         

       “토카막.”

         

       **

         

       연구실에는 클라이스 홀로 있었다.

         

       그녀는 식각용 펜으로 마전지를 끄적거리며 스크롤을 제작하던 중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마소-에너지 교환성 정리.]

         

       무명의 저자가 만들어낸 그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후로 클라이스의 연구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곧 있으면 플레어를 완성할 수 있어요.’

         

       마소와 에너지가 서로 교환된다는 수학적 이론은 간단명료하면서도 플레어 개발을 급속도로 진행시킬 만한 파괴력을 지녔다. 수 년간 막혀있던 부분이 한 번에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손목을 움직이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식각용 펜을 내려놓은 뒤로는 일반 깃펜을 잡아 계산을 이어갔다.

         

       ‘마소가 에너지와 교환한다면, 응축되어있는 마력 덩어리를 마소로 환원하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그걸 잘 활용하면 스크롤에 무리를 주지 않고도 플레어를 격발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지금의 클라이스에겐 즐거웠다. 자신의 오랜 비원이 머지않아 풀릴 것이라는 기대로 그녀의 머릿속은 꽃밭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마소와 에너지가 교환 가능하단 걸 증명해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해야겠어요.’

         

       에테르는 클라이스에게서 등을 돌렸기에 플레어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거들떠도 보고 있지 않겠지. 오히려 그녀는 학급 친구들과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는데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처음에 클라이스는 에테르를 다시 회유해서 플레어를 개발하려고 했다. 오죽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기초화계마도의 조교로 들어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비록 제2황자의 방해와 에테르의 거절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무슨 짓을 했더라도 연구가 진행되질 않았고, 클라이스는 한창 조급해할 때였다. 금안족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건 아렌스 대륙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에테르의 도움 없이는 플레어를 개발하기 어려우리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마소-에너지 교환성 정리’는 경제성도 겸비한 공식이었다. 해당 정리는 플레어의 설계 과정에서 비용을 절감해주는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나라에서의 지원 없이 최소한의 마전지와 공식만 가지고 클라이스가 연구를 진척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존재했다.

         

       이 정리를 바탕으로 스크롤을 제작한다면 출력부의 손상을 최소화한 채 마법을 전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생각에 요 며칠은 숙면을 취하지도 못했다.

         

       연구에 몰두하다보니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외부활동을 제대로 안 했네요.’

         

       기껏해야 조례를 끝내고 화계마도를 두 시간 가르친 게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은 플레어를 연구하는데 쏟아부었다.

         

       화장도 최소한으로만 하고 다녔으며, 세수한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커피는 또 얼마나 마셨는지, 심호흡을 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순환계를 진정시키고자 담배를 물었다. 연구실에 탁한 스모그가 드리우자 심신이 누그러졌다.

         

       기분 좋을 때 피우는 마력초는 특상의 쾌락을 제공한다. 그녀가 실실 웃으며 연기로 고리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

         

       그간 모두가 포기했다. 화계마도로는 절멸급을 상대할 수 없다고, 모든 사람이 얘기했다.

         

       ‘이젠 아니에요.’

         

       그 모멸과 핍박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

         

       플레어 연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클라이스 자신의 독점 연구로만 출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에게 공적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으로써 학계에서 인정받고, 다른 분야로 도망간 비겁자들 앞에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낼 것이다.

         

       그 시기를 위해서라면 당장의 고통을 인내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후우, 클라이스는 뿌연 연기를 다시금 내뱉었다. 다크써클이 내려오고 피부는 푸석거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클라이스에겐 플레어만이 전부였으니까.

         

       이 공적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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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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