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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

       적멧돼지가 사람이 없는 건물을 들이박았다. 나무벽이 부서지고 기둥이 날아가자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다. 지붕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며 먼지구름을 만들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굉음이 울렸지만 정작 집채만 한 적멧돼지는 멀쩡한 상태로 먼지구름을 뚫고 다가왔다. 그리고 자경대들이 공포에 질린 채 창을 겨누자 걸음을 멈췄다.

         

       으아아.

         

       집채만 한 붉은 멧돼지!

         

       “저 친구 왜 저래요?!”

         

       파스텔은 검을 꼭 끌어안고 덜덜 떨었다.

         

       적멧돼지는 누가 성질이라도 긁었는지 완전 흥분된 기색으로 자경대를 노려봤다. 거친 콧김이 먼지 낀 대기를 밀어냈다.

         

       “원수진 듯이 보는데요?!”

       “말을 탄 누군가가 저놈을 이끌고 마을로 도망쳐 왔어요! 그 자식이 성질을 긁어놓은 모양입니다!”

         

       자경대 대장이 기름먹인 천을 감은 막대에 횃불을 대서 새 횃불을 만들곤 외쳤다.

         

       파스텔은 입이 벌어졌다.

         

       “네에?! 뭐 그런 나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일단 저놈부터 쫓아내야 합니다! 횃불 들어!”

         

       이슬비는 그친 지 오래였다. 횃불들이 금세 만들어졌다.

         

       횃불 든 사람들이 창을 든 자경대와 함께 적멧돼지에게 주춤주춤 접근했다. 적멧돼지가 덩치에 안 맞게 움찔했다.

         

       헛.

         

       야생 동물 쫓아내기구나!

         

       하긴 집채만 한 야수를 상대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당장 파스텔 키의 세 배는 가뿐히 넘는 덩치였다.

         

       “저, 저도 횃불 주세요!”

         

       파스텔은 떨면서도 용기를 내 횃불을 하나 받았다. 안 떨어지는 발을 억지로 옮겨 선두로 이동했다.

         

       적멧돼지에게 횃불을 들이댔다. 적멧돼지가 거친 콧김을 뿜으며 파스텔을 노려봤다. 멧돼지의 눈동자에 분홍 형상이 들어찼다. 소녀가 든 붉은 횃불이 점점 떨렸다.

         

       덜덜덜덜.

         

       으아아.

         

       불멧돼지 친구우!

         

       우리 화해하자!

         

       너도 통바비큐가 되고 싶진 않잖아!

         

       간절한 소망을 들은 듯이 적멧돼지가 반걸음 물러났다. 거체가 기세에 밀리자 역으로 사람들의 공포가 가셨다.

         

       “천천히 앞으로!”

         

       자경대 대장이 지휘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밀어붙였다. 창날과 횃불이 뒤섞인 진형이 거대한 야수를 뒷걸음질 치게 했다.

         

       선두의 분홍 소녀는 열심히 횃불을 휘저었다.

         

       통바비큐가 되고 싶지 않잖아아!

         

       보호받지 못하는 성벽 밖에 사는 마을 사람들의 대응은 훌륭한 효과를 냈다. 적멧돼지가 마을 울타리 근처까지 밀려났다.

         

       마을을 지키던 빽빽한 나무 울타리는 한차례의 소동으로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야수를 울타리 밖으로 쫓아낼 넉넉한 출구로 활용됐다.

         

       “조금만 더! 긴장 놓지 말고! 충분히 몰아낼 수 있어!”

         

       자경대 대장이 진형을 가다듬었다.

         

       “맞아요! 맞아요!”

         

       분홍 소녀는 횃불을 휘저으며 선두를 지켰다.

         

       적멧돼지가 콧김을 뿜었다. 그리고 뒷걸음치다 울타리 통나무를 밟더니 물러나길 멈췄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더니 몸을 털었다. 팔뚝만 한 붉은 털들이 흔들리는 광경은 화염의 웅성거림 같았다. 화염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친 모습이었다.

         

       기세를 올리던 사람들이 경직됐다.

         

       우아앗.

         

       분홍 소녀는 몸을 떨었다.

         

       횃불이 덜덜덜.

         

       나, 나 어제도 통돼지구이 먹었어!

         

       너희 사촌동생이라구우!

         

       진짜야아!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공포가 서서히 퍼졌다. 누군가 움직이는 순간 깨질듯한 찰나의 고요였다. 모두가 미래를 알아챈 상태로 몸을 굳혔다.

         

       문득 울타리 너머 평야에서 말 탄 사람 무리가 마을로 질주했다. 검은 복면에 야성적인 복장의 사람들이었다.

         

       “강도떼다!”

         

       순식간에 당도한 강도 무리가 무너진 울타리를 가뿐히 넘어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고 적멧돼지와 자경대 주위를 돌며 유유히 구경했다.

         

       “잘 유인했군!”

         

       강도 두목이 비웃더니 향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가 자경대 진형을 맞췄다. 정체 모를 가루가 터졌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콜록대고 진형이 흐트러졌다.

         

       “이 자식들……!”

         

       가루 냄새를 맡은 적멧돼지가 흥분하며 괴성을 질렀다.

         

       강도 두목이 칼을 빼 들었다.

         

       “도망치는 겁쟁이부터 죽여주마! 가족을 위해 용감하게 희생해라! 너희가 지킨 가족은 우리가 잘 돌봐 줄 테니!”

         

       강도 무리가 박장대소했다. 자경대 대장이 분노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자경대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적멧돼지가 몸을 털며 달려들 듯이 머리를 숙였다. 다리가 지면을 박차려 했다.

         

       직후 분홍 소녀가 튀어 나갔다. 자경대 진형을 벗어나 야수를 유인하듯 울타리로 질주했다. 멧돼지의 눈동자가 화려한 분홍색을 따라왔다. 거체가 달려들었다.

         

       파스텔은 통나무로 된 높은 울타리로 달려갔다. 울타리에 접근하자 그대로 벽을 타듯 위로 달렸다. 수직으로 질주하던 몸이 순간 중력에 이끌려 멈췄다.

         

       소녀는 울타리를 박찼다. 몸이 뒤집히고 수평으로 날았다. 쫓아온 거체가 소녀 아래를 스쳤다. 울타리와 충돌했다. 충격이 일었다. 통나무가 산산이 부서지고 비산했다.

         

       소녀는 그대로 한 바퀴 돌아 지면에 착지했다. 품에서 나이프가 떠올랐다.

         

       손짓하자 은빛이 대기를 질주했다. 야수가 통나무 잔해를 털며 돌아봤다. 순간 나이프가 야수의 눈동자를 관통했다. 체내를 뚫고 뇌에 닿았다.

         

       소녀는 손을 휘저었다. 나이프가 회전하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야수가 괴성을 질렀다. 거체가 휘청였다.

         

       손을 뻗자 나이프가 역행해 움직였다. 은색 궤적이 체내를 지나쳐 대기를 갈랐다. 역행하듯 소녀의 손에 잡혔다. 허공을 베자 붉은 잔해가 털어졌다.

         

       소녀는 몸을 돌렸다. 자경단과 강도떼가 멍하니 바라봤다.

         

       분홍 눈동자가 강도떼를 차갑게 응시했다.

         

       “뭘 한다고요?”

         

       소녀의 뒤편으로 거체가 쓰러졌다. 굉음이 일었다. 먼지바람이 일고 옷자락이 흔들렸다.

         

       강도 두목이 딸꾹질을 했다.

         

         

         

       #

         

         

         

       마왕 파스텔!

         

       “당연한 결과!”

         

       에헴.

         

       샤워를 마친 파스텔은 마음껏 으스댔다. 도망치는 강도들을 학살해 피범벅이 됐던 상태와는 다르게 깨끗한 자태였다.

         

       여관 소녀가 눈을 빛냈다.

         

       “저만한 적멧돼지를 단번에 죽이셨다고요?!”

       “맞아! 맞아!”

         

       에헴.

         

       “똑똑한 난 애초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적멧돼지가 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계획을 구상했거든!”

       “오오!”

         

       여관 소녀가 감탄했다.

         

       “저라면 마주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을 거예요! 아니면 몸을 떨며 울거나요!”

       “떨다니?!”

         

       허억, 그런 상상도 못 할 일이?

         

       파스텔은 당당히 말했다.

         

       “난 전혀 떨지 않았어! 파스텔의 인생에 두려움은 없거든! 대신 용감하게 횃불을 들고 다가가서 이렇게 말해줬지!”

         

       횃불을 들 듯 팔을 번쩍 들었다.

         

       “널 통돼지구이로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실시간으로 구워지고 잘리는 적멧돼지를 가리켰다.

         

       “빠밤~!”

         

       적멧돼지 통구이~.

         

       여관 소녀가 경악했다.

         

       “정말 말대로네요!”

         

       같이 듣던 마을 사람들도 감탄했다.

         

       엄청난 호응.

         

       파스텔의 고개가 더 뻣뻣해졌다.

         

       정당한 평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평가!

         

       옆자리의 멜리사가 미안해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제 일을 넘겨버렸네요.”

       “그럴 리가! 멜리사도 1인분은 했어! 강도들의 본거지를 없애고 돌아왔잖아!”

       “본대는 마을을 습격한다고 빠진 상태였지만요.”

       “후환을 없앴으니 1인분은 한 거야!”

         

       파스텔은 큼지막한 적멧돼지 살점에 마석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리고 포크로 쿡 찍어 통째로 우와앙 입에 넣었다.

         

       우와앙.

         

       입가에 기름이 덕지덕지 묻었다.

         

       우물우물.

         

       육즙이 펑펑 터졌다.

         

       파스텔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이 풍부한 맛은?

         

       마치 돼지 가족이 춤을 추는 거 같아!

         

       설마 불멧돼지 통구이, 내 뱃속에서 사촌동생 통돼지구이와 만난 거야?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

         

       파스텔은 감동해 버렸다.

         

       오늘도 착한 일을 했어.

         

       나, 완전 착한 아이.

         

       이런 애를 돌보는 악마님은 행복하겠지?

         

       허억.

         

       진리를 깨달아 버렸다.

         

       보호자의 마음을 이해해 버렸어!

         

       어쩐지 옷을 대충 벗어놔도 화를 안 내시더라! 파스텔 옷 줍기가 너무 행복하셨던 거야!

         

       파스텔은 뿌듯해졌다.

         

       이 제자,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해 버렸습니다.

         

       오예.

         

       만찬을 즐기고 파스텔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슬슬 해가 질 시간대기도 해서 하룻밤 자고 돌아가기로 했다.

         

       개인 방에서 기지개를 켰다.

         

       우하!

         

       좋네!

         

       “악마님! 악마님! 앞으로 저를 보호자를 이해하는 착한 파스텔이라고 불러주세요!”

         

       마검이 정장 차림의 악마로 변했다. 악마가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를 살피고 돌아왔다.

         

       『새벽에 일어나는 버릇을 들이면 그렇게 불러주마.』

       “허억!”

         

       경악.

         

       “완전 불가능한 미션!”

       『그보다 나이프를 줘봐라. 생산물을 처리해야지.』

       “앗, 네.”

         

       파스텔은 순순히 나이프를 건넸다.

         

       악마가 나이프에서 검은 점액질을 뽑아냈다. 마기가 존재의 격과 뒤섞여 물방울 젤리처럼 부유했다.

         

       파스텔은 순수한 눈동자로 물었다.

         

       “그거 어떻게 뽑아요?”

         

       완전 순수.

         

       『몰라도 된다.』

         

       완전 단호.

         

       악마가 점액질을 들여봤다.

         

       『강도떼와 적멧돼지가 가진 존재의 격이 뽑혔나. 죽인 건 강도가 많지만 정작 모인 격 자체는 적멧돼지의 비중이 더 높군. 짐승도 가리지 않다니, 정신에 악영향을 줄 걸 고려하지도 않는 건가.』

         

       룰루랄라.

         

       파스텔은 관심 없다는 양 창문을 바라봤다. 노을 진 저녁의 광경이 보였다.

         

       “어? 악마님!”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흠?』

         

       악마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파스텔은 후다닥 움직여 점프했다. 멍멍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허공의 점액질을 노렸다.

         

       우와앙-!

         

       악마가 보지도 않고 손을 슥 움직였다. 점액질이 손바닥에 밀려났다. 소녀는 허공을 냠냠 했다.

         

       으엣?

         

       공기 맛?

         

       『어림도 없어.』

         

       악마가 창가를 대충 살피고 돌아봤다.

         

       『이런 위험한 건 버릴 거다. 먹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라.』

         

       완전 단호!

         

       “그, 그럴 수가!”

         

       수성 친구를 되살릴 존재의 격이……!

         

       으아아.

         

       “수성 친구우!”

       『도대체 그 수성 친구는 뭐냐.』

       “악마님이 두 번 죽인 친구요오!”

         

       파스텔은 울상을 지으며 비틀거렸다.

         

       절망.

         

       절마앙.

         

       『그래도 안 돼.』

         

       악마가 단호하게 바라봤다.

         

       더 절마앙.

         

       파스텔은 격렬히 비틀거렸다. 그러다 실수로 테이블에 부딪혀 휘청였다.

         

       “아?”

       『어린 크래프트?』

         

       중심을 잡으려 발을 디디려다가 힘이 빠져 헛딛고 미끄러졌다. 악마가 놀라며 양손을 뻗었다.

         

       순간 완전 착한 파스텔의 눈빛이 변했다. 재빨리 지면을 박차더니 악마를 피해 도약했다.

         

       입을 우와앙 벌렸다.

         

       우와앙-!

         

       검은 젤리를 낚아챘다.

         

       냠냠!

         

       지면에 촥 착지해 슥 입을 닦았다.

         

       파스텔은 의기양양하게 악마를 응시했다. 악마가 붙잡아주려 손을 뻗던 엉거주춤한 자세로 경악했다.

         

       『어린 크래프트?』

         

       한 팔을 번쩍 들었다.

         

       “사악한 악마에게서 수성 친구를 구했다!”

         

       이것이 착한 파스텔!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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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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