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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

     

    나는 경기장으로 뛰어내려 아셀라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경기장 위를 검게 덮은 거대한 사룡이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면 모래폭풍이 인다.

     

    ‘사천왕, 사룡 빌헬름.’

     

    아무리 드래곤이지만 수백 번이고 본 얼굴을 내가 착각할 리는 없었다.

     

    수도 없이 싸워봤던 적이다.

     

    아다만티움 갑주도 입지 않았고, 내가 아는 모습보다 크기도 작다.

     

    아직 사천왕이 되기 전인 성장기다.

     

    ‘갑자기 이놈이 나타난 이유는.’

     

    추측은 간다.

     

    아셀라가 방금 시전한 리콜 마법.

     

    다른 생물을 시전자의 곁으로 데려올 수 있는 마법이다.

     

    10년 후에서도 이 마법은 아셀라만 쓸 수 있었다.

     

    리콜을 계속 개발해 위계를 올린 마법으로 용군단도 소환했겠지.

     

    ‘방금 아셀라의 마법을 목격한 누군가가 흉내 내서 시전한 거야.’

     

    새로운 마법을 처음 보고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으며, 아셀라보다도 강력한 위력으로 쓸 수 있는 마법사.

     

    시모어는 비무대회에 오지 않았으니 범인은 하나뿐이다.

     

    ‘카밀라 황비다.’

     

    무슨 생각으로 이 짓거리를 벌였는지는 나중에 추궁해야겠다.

     

    ‘빌헬름에 대해서는 아셀라가 얘기한 적이 있었어.’

     

     

    ―다음은 사룡 토벌이로군. 십 년 전쯤인가, 짐은 그 새까만 도마뱀과 경합한 적이 있었다. 마왕군의 중역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을 걸 그랬구나.

     

    ―뭘, 너희에겐 용사가 있으니 그 정도 마물이야 손쉽게 토벌하지 않겠느냐.

     

     

    말이야 쉽지, 빌헬름에게도 다섯 번은 전멸했던 기억이 있다.

     

    아셀라가 말했던 경합이 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허세였다는 것도 잘 알겠다.

     

    멀리서 보이는 아셀라의 모습은, 자신의 강대함을 자랑하며 무용담을 늘어놓은 10년 후의 묘사와는 꽤 차이가 있었다.

     

    움츠러든 다리, 지팡이를 꽉 쥔 두 손, 깨질 듯 꽉 깨문 이빨.

     

    잔뜩 공포에 질린 근육은 얼어붙어 움직일 생각이 없다.

     

    무의식이 상체를 수그리고 배를 보호하는 어정쩡한 자세를 만들었다.

     

    복부에서 상당한 고통이 느껴지기에 본능적으로 취하는 자세였다.

     

    ‘뭘 숨통을 끊어. 네가 용케도 살아남았네.’

     

     

    [No. 101 : 마력폭주 4% → 71%]

    [변동중]

     

     

    아셀라가 사망해서 발생하는 마력폭주 엔딩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금 사룡이 아셀라의 목숨에 지대한 위협을 끼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구경만 할 순 없어.’

     

    아셀라의 대가를 치료하기 전에 그녀가 죽어버리면 마력이 폭주한다.

    제도 정도는 쉽게 날아갈 위력이다.

     

    휘말린 나도 절대 무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방어다.

     

    아셀라가 혼자서 위협적인 드래곤 앞에 서서 벌벌 떨고 있으니 좀 도와줄까, 같은 값싼 동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황가 친족 전원이 자기 몸만 지키느라 바쁘고, 아셀라를 나몰라라 내팽개친다고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나를 수도 없이 죽인 여자다.

    동정은 내가 받아야 할 입장이다.

     

    별 전투능력도 없는 나는 사룡을 직접 쓰러트릴 수단도 없다.

     

    ‘그래도, 뭐.’

     

    주치의가 환자의 안부를 챙기는 건 의무기도 하고.

     

    회귀하고서 내가 아셀라의 지원을 상당히 받아온 건 사실이다.

     

    황실 주치의가 된 덕분에 여러 특혜를 누리면서 의사 일을 하기 편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는 가능한 만큼 아셀라를 보좌해야겠지.

     

    대가 지불이다.

     

     

    “황녀 전하!”

     

    아셀라에게 거의 도착해서 외쳤건만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지간히도 긴장했다. 일종의 패닉 상태.

     

    이럴 땐 다른 외부 자극이 필요하다.

     

    뺨을 때리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차마 그럴 순 없어서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황녀님.”

     

    그제야 아셀라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눈에서 금빛 마나가 빙글, 돌았다.

     

    “라스.”

     

    “예, 접니다.”

     

    “…여기서 뭐 해?”

     

    당황이 짙게 묻은 목소리.

     

    “아프실 때 드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품에서 약병을 꺼내 달그락, 무통약을 하나 집어들었다.

     

    “…싫어. 쓰잖아.”

     

    “주치의 말 들으세요.”

     

    무통약을 아셀라의 입 근처로 가져간다.

     

    손가락을 가져가니 알겠다. 호흡이 거칠고 뜨겁다.

     

    내 예상보다 훨씬 힘들어한다.

     

    거부하면 막무가내로 밀어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내가 입술 사이로 넣어주는 약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마른 침과 함께 무통약을 삼키는 아셀라.

     

    “…후우.”

     

    조금씩 호흡이 안정을 찾아간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주었다.

     

    “좀 괜찮으세요?”

     

    “…머리가 멍해.”

     

    “무통약 효과도 있고, 마나가 바닥나셔서 그래요. 마침 마나 수급 비약도 있습니다. 일회성이긴 한데, 아까 보여주신 리콜은 세 번 정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품에서 주사형 비약을 꺼낸다.

     

    아셀라는 정신이 몽롱한지 주사기는 못 알아보고 뚱딴지같은 질문을 해왔다.

     

    “…내 마법, 봤어?”

     

    “그럼요. 관람석에서 똑똑히 봤죠.”

     

    “어땠어?”

     

    “우아하며, 강인하고, 멋졌습니다.”

     

    “…그렇지?”

     

    아셀라는 당장에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눈으로 실없이 웃었다.

     

    “최후의 마법으로는 조금 아쉽지만.”

     

    “최후라니요?”

     

    ―콰아앙!

     

    관중석에서 검은 구체가 폭발한다. 사룡의 공격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이 저주에 휩싸이며 공중을 날았다.

     

    성질 급한 이들이 사룡을 향해 창을 던져 주의를 끌다가 대가를 치러버렸다.

     

    사룡이 희번득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아셀라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저 사룡을 봐. 곧 이 자리의 모든 인간을 향해 대량의 저주를 쏟아낼 거야. 너도 운이 없구나, 라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셀라의 양쪽 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무, 뭐해?”

     

    그녀를 슬쩍 앞으로 밀어 사룡을 향해 똑바로 세운다.

     

    “사용하신 얼음 마법의 상성이 나빴을 뿐입니다. 사룡 빌헬름, 공략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말을 걸면서 몰래 목에 마나 비약을 주사했다.

     

    “읏, 따가워.”

     

    “싸울 준비는 됐군요.”

     

    아셀라의 눈이 커다래진다.

     

    “싸워? 나보고 저걸 쓰러트리라고?”

     

    “그럼요.”

     

    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황녀님이 이 자리 최고의 마법사 아니시겠습니까.”

     

    네가 저거 잡아야 다 사는 거야.

     

    실력 보여줘, 아셀라.

     

     

     

    ***

     

     

     

    마법 시연이 끝나고, 가장 먼저 아셀라의 머릿속을 파고든 감정은 혼란이었다.

     

    수많은 의문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왜 내 마법은 인정받지 못했을까.

     

    나는 황가에서 어떤 존재일까.

     

    어마마마는 정말 나를 포기했을까.

     

    황제가 되면 이 모든게 나아질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왜 여기에 라스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금방 대답이 나오는 의문이었다.

     

    라스는 항상 아셀라의 옆에 있었다.

     

    노란 장미가 만발하던 꽃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혼약자이기 때문일까, 주치의이기 때문일까.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셀라는 라스를 만난다.

     

    매일 밤 자기 전에도 라스를 만난다.

     

    그리고 지금도.

     

    ‘…왜 너는 이럴 때마다 늘.’

     

    내 옆에 있는 거니.

     

    차마 대답을 요구할 순 없다.

     

    그랬다가 의도가 뭔지 읽을 수 없는 그의 행동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어쩐지 라스와의 관계가 변해버릴 것만 같아서, 아셀라는 질문을 아꼈다.

     

     

    그녀를 따르는 부하들은 모두 뜻이 명확하며 읽기 쉬웠다.

     

    충성에는 달콤한 보상이 따른다.

     

    물질적인 대가 없는 명예를 지키는 이는 요즘 시대엔 어디에도 없다.

     

    시종들은 규율을 따르며 소속과 안정을 얻는다.

     

    기사들은 차기 황제의 측근이라는 지위와 권력을 얻는다.

     

    하지만 라스는 다르다.

     

    아셀라에게 충성을 바치는 듯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절대적으로 복종할 듯하면서도 자꾸만 심기를 거스른다.

     

    아부는 잘 하지만 시키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쯤 되면 엎드려 절 받는 수준이다.

     

    금전이든 권력이든, 아셀라가 황녀라서 굴러떨어질 이익을 노리고 옆에 붙어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럼 혼약자라는 관계를 이용하려는, 그저 글러먹은 망나니일까?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이 편했겠지.

    멍청한 기둥서방은 안방에 가둬놓고 아셀라는 오히려 사교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는 놈팽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며, 언제나 성실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의학으로 뚝딱 새로운 걸 만들고는 매뉴얼을 제안한다.

     

     

    대체 이 남자는 뭐가 목적일까.

     

    아셀라가 처음 라스에게 흥미가 갔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소문과는 다른 멀쩡한 인상에, 더더욱 진의를 알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지금 그에게 잘못된 질문을 하면.

     

    가령, 너는 왜 여기 죽으러 왔냐고.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내 편이냐고.

     

    함부로 물었다가는 지금까지 이어진 오묘한 균형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아셀라는 어느새 그게 두려워진 자신을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지는 미숙한 경험 때문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반되게도, 그 두려움 덕분에.

     

    ‘싸울 수 있어.’

     

    흉흉한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저주를 준비하는 사룡 앞에서, 지팡이를 쥘 수 있었다.

     

     

    약 기운 때문에 정신은 몽롱하다.

     

    하지만 귓가에 스며드는 라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깨끗했다.

     

    “많이 아프세요?”

     

    아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치유사도 고치지 못했던 아셀라의 통증이었다.

     

    라스는 겨우 조그마한 알약 하나로 그것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게 마법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 끝까지 들려온다.

     

    “황녀님, 잘 들으세요. 사룡에게 원소 계열 마법은 효과가 없습니다. 같은 드래곤이어도 사룡은 계통이 좀 다르거든요. 원소 이뮨, 저항 수치가 굉장히 높아요.”

     

    처음 듣는 단어를 마구 쏟아내는 라스였다.

     

    “다른 속성 마법을 쓰면 오히려 효과적으로 먹힙니다. 빛 속성이면 더 좋고요. 아직 어린놈이에요. 충분히 토벌할 수 있어요.”

     

    “내 마법으로, 저 드래곤을?”

     

    “그럼요.”

     

    라스가 확신을 담은 얼굴로 대답한다.

     

    …어째서일까.

     

    평생 황녀로서 세상의 모든 걸 일 초도 빠짐없이 인식하며 살아온 아셀라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시야에는 라스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의심 한 치 없는 주치의의 얼굴이.

     

    “후우.”

     

    아셀라가 호흡을 정돈한다.

     

    그려지는 금색의 마법진은 네 개.

    관통하여 하나.

     

    회전하고, 발광한다.

     

    담담하게 읊조리면.

     

    “리콜.”

     

    ―파아아앙!!

     

    어느새 사룡한 거대한 한쪽 날개가 사라지고,

     

    ―쿠우웅!!

     

    두 사람의 뒤로 떨어진다.

     

    날개를 잃은 드래곤이 추락한 것도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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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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