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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0

       그리고 놀랍게도 더 내려놓을 것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 있는 여자애들은 10대 소녀치고는 상당히 점잖은 편이었다. 애초에 귀족이나 왕족, 황족으로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그나마 활발한 성격의 클레어조차도 남작 집안에서 자랐다.

        

       판타지 소설에서야 남작이 오등작 중 가장 낮은 위치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영지를 가진 영주다. 절대로 낮다고 할 수 있는 가문이 아니고, 실제로 교육도 철저하게 받았다. 그냥 클레어 천성이 워낙 활발했을 뿐.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 기간 동안 가장 자신을 드러낸 사람은 나 정도뿐이었다.

        

       내가 사는 집을 공개하게 되고, 무표정을 허물어버리고, 좋아하는 취미를 들키고……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상황에도 처하고.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낸 존재는 나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제일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클레어였다.

        

       “…….”

        

       우리는 클레어가 우리 방 벽에 붙여둔 포스터를 한참 동안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클레어, 이 포스터는 뭔가요?”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 포스터를 바라보던 샤를로트가 결국 추론을 포기하고 그렇게 물었다.

        

       벽에 붙어있는 것은 헬스장 홍보용 포스터였다. 어느 엄청나게 몸매 좋은 여성이 포즈를 잡고 서 있었다. 단순히 스포츠 브라를 입고 자세만 잡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셔츠를 입고 가운데를 풀어헤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바디 프로필이나 그런 것인 모양이다.

        

       근육질이기는 한데,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니라 복근이 보이는 정도의, 아주 보기 좋은 몸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클레어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서 가지고 온 포스터입니까?”

        

       “저 아래에서 떼어왔는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다시 돌려두고 오세요.”

        

       “아니, 각자 원하는 대로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하지만 무언가를 훔쳐 오는 건 곤란합니다.”

        

       그래, 왠지 포스터 끄트머리가 찢어져 있더라. 어디 벽에 붙어있던 홍보용 포스터를 통째로 떼어온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 언제 혼자 나갔다 온 거야?

        

       “…….”

        

       누구랑 나갔다 왔나 해서 아이들을 둘러보는데 미아가 시선을 피했다.

        

       지난번에 나갔다 오더니 그때 가지고 온 거였나? 왠지 가방을 들고 나가더라. 다시 보니 포스터에는 여기저기 접혔다 펴진 부분도 있었다.

        

       “어? 거기 광고 금지라고 되어있던데? 원래 붙이면 안 되는 곳에 붙어있던 건데, 가지고 오면 안 되는 거야?”

        

       “……그래도 안 됩니다.”

        

       법적으로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더 곤란하다.

        

       물론 이제 와서 다시 붙이러 갔다가는 이번엔 우리가 걸릴 수 있으니 안 되겠지만.

        

       “……새것으로 사다 줄 테니 그걸로 붙이도록 하세요. 조금 있다가 다시 고르도록 하죠.”

        

       “이게 마음에 들었는데…….”

        

       “…….”

        

       “아, 알았어, 언니.”

        

       “그나저나, 평소에 그렇게 운동하는데 저런 몸이 아닌 거야?”

        

       “음…… 그게 나는 아무리 운동해도 저런 몸은 안되더라고.”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평소에 가장 자주 하는 운동이 유산소 운동이라 그런 거 아닐까? 클레어가 에너지를 가장 많이 쏟을 때는 우리가 탁 트인 공터에 갔을 때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거나 하니까. 내가 헬스 트레이너는 아니지만 ‘근손실’ 어쩌구 할 때 유산소 운동이 별로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이상 자세히 들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정확한 건 모르지만.

        

       “저런 몸이 되고 싶다면 헬스장을 가는 게 맞겠습니다만.”

        

       아직 떼어내지는 않은 포스터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하자,

        

       “어? 그럼 언니도 같이 갈래?”

        

       “저는 스스로를 고문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능력 있었을 때는 그렇게 총이랑 칼에 맞았으면서.”

        

       “그건 이기려고 어쩔 수 없이 한 것입니다만.”

        

       내가 딱 잘라 대답하는 것을 듣고 투덜거리는 클레어에게 나는 어이없이 대답했다.

        

       뭐, 그래도.

        

       “……확실히, 아직도 서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하지 않은 부분은 있는 모양입니다.”

        

       남자끼리 있을 때처럼 트렁크에 티셔츠만 대충 입고 돌아다닌다든가 하지는 못할 거다. 여자들도 뭐 팬티만 입고 잔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서는 허들이 높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우리는 각자 방을 나름대로 꾸며두긴 했지만 이런 포스터 같은 것을 걸어두거나, 좋아하는 아이돌 음반을 사다 모으거나 뭐 그러지는 않았으니까.

        

       “돈은 거의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만, 모이는 돈 대부분은 여러분도 함께 번 돈입니다. 이미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쓰는 것도 여러분 편하신 대로 쓰면 되는 겁니다.”

        

       솔직히 복권 산 것도 내가 잘되겠다고 샀다기보다는 그냥 집 좀 이사 가고 싶어서 사본 거니까. 애초에 얘네들 없을 때는 평소에 복권을 거의 산 적이 없기도 했다.

        

       나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평소에 내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조금 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방송국과의 약속은 조금 더 뒤로 잡혔다. 만나서 협의를 한 번 더 가지고, 그 뒤에 방송 일정을 잡아 집 안까지 들어와 촬영해가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아직 우리끼리 하는 방송에는 밝히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

        

       아니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마음 놓고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자는 이야기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으로 택배가 몇 개 왔다.

        

       하나는 꽤 커다란 상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그보다는 조금 작은 상자였는데 모양이 조금 특이했다.

        

       길쭉하고 얇은 모양.

        

       택배 상자를 들여놓고 클레어를 보았더니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우리 집은 할로윈—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있었기에 혹시 클레어가 새해용 장식을 미리 산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이건 내 거야.”

        

       꽤 큰 상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오며 앨리스가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면서? 그래서 샀어.”

        

       나와 눈이 마주친 앨리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걸 보면, 아마 안에 들어있는 것이 예사로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이건 제 거에요.”

        

       그리고 미아는 얇고 가느다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쪽도 얼굴이 새빨간 것을 보니, 역시 안에 있는 것이 매우 개인적인 물건인 모양이었다.

        

       뭐, 이쪽이야 포스터일거고.

        

       당장은 앨리스의 커다란 상자 쪽이 더 궁금했다.

        

       어차피 어디서 어떻게 뜯어도 우리가 내용물을 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앨리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상자를 뜯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것은—

        

       “……이게 뭐야.”

        

       클레어가 정색했다.

        

       정말 보기 드문 정색이었다.

        

       “TV 앞에는 내 모습을 한 피규어랑 실비아 모습을 한 피규어뿐이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의 피규어를 사는 건 어떨까 해서. 물론 아직 모두의 상품이 발매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니걸 피규어를 사!? 심지어 저기 있는 두 개보다 더 큰 제품이잖아!”

        

       “아니, 마침 네 피규어로 이런 게 발매되어서.”

        

       “차라리 중고로 이전 피규어를 사!”

        

       클레어가 절규했다.

        

       그렇다. 클레어가 그렇게 싫어하던, ‘회귀 전 클레어’의 모습이 담긴 클레어보다도 숭한 디자인이었다.

        

       그래도 그 모습은 바지라도 멀쩡히 입고 있지.

        

       “웃어? 지금 웃어? 바로 조금 전까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으면서!?”

        

       “네 반응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달까…….”

        

       앨리스의 그 발언에 결국 뚜껑이 열린 클레어가 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뛰어다니면 아랫집에 민폐이니 조심해주세요.”

        

       샤를로트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말하자, 두 사람은 발끝을 들고 소리 없는 추격전을 펼쳤다.

        

       그나저나, 앨리스는 역시 오타쿠의 편린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기서 몇 년만 더 살면 나중에는 신작 애니메이션도 꼬박꼬박 챙겨보는 거 아닐까.

        

       클레어도 미아와 함께 은근히 마법소녀물을 보고 있는 걸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왜 저를 그렇게 보시나요?”

        

       나와 눈이 마주친 샤를로트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샤를로트는 아닌가?

        

       태생이 게임 세계관과 꼭 닮은 세계에서 넘어온, 그 게임의 캐릭터들과 꼭 닮은 인물들이라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샤를로트는 그런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무슨 물건입니까?”

        

       “아, 이건, 포스터에요!”

        

       시선을 미아 쪽으로 돌려 물어보자, 미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앨리스가 상자를 열 때 쓴 커터칼로 상자를 열자, 안에서는 포스터…… 천에 인쇄되어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린 포스터가 나왔다.

        

       태피스트리라고 하던가?

        

       당연히 그려진 건 마법 소녀였다. 나는 잘 모르는 시리즈였지만.

        

       그래도 미아가 사서 들고 있으니 엄청나게 어울렸다.

        

       “방에 걸 생각이신가요?”

        

       “네!”

        

       미아의 해맑은 답변에 샤를로트가 웃었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네.

        

       샤를로트는 덕질하게 된다면 뭘 덕질하려나.

        

       파고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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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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