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예? 뭐가 있다고요?
“이런 일이 다 생기네.”
열심히 일하던 와중 느닷없이 핸드폰이 쥐약 먹은 것처럼 덜덜 떠는 것이 뭔 일인가 싶었다.
알람이 왔다고 하기에는 진동이 너무 약하고, 그렇다고 무시하게는 신경 쓰이는 정도의 진동!
운 좋게도 박덕춘 부장이 흡연을 위해 자리를 비운 덕에 사무실을 빠져나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내가 만든 재판장에서 나를 증인으로 세울 줄이야.’
가이에드라고 했었나.
아주 재밌는 일을 저지른 녀석이다.
나를 직접 부를 정도로 깡도 좋고, 능력도 좋다.
그런 녀석은 가까이에 두고 오래도록 부려 먹는 것이 상책.
박덕춘 부장에게 배웠다.
가뜩이나 일손 딸리는 미카에르 옆에 붙여줬으니 한동안 요긴하게 써먹겠지.
‘그건 그렇고…. 폴 영감님이랑 마리 할머님은 잘 마무리된 거겠지?’
부부의 연,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이다.
폴 영감님의 인연의 실은 이미 마리 할머님과 이어져 있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다음 생에서 분명 만났을 정도로.
다만 그렇게 되면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어, 폴 영감에게 선물로 줬던 제비꽃에 ‘작은 장난’을 쳤다.
‘폴 영감님. 행복 하십쇼!’
회귀, 빙의, 환생!
웹 소설 3대 국밥 요소 중 하나인 환생을 폴 영감님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놨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트리거는 제비꽃.
다시 태어난 폴 영감님이 언젠가 제비꽃의 향기를 맡으면 단숨에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재밌는 구경을 한 대가라고 봐도 좋았다.
“아ㅡ! 연옥에 대해 마구마구 알리고 싶다!!”
이런 개쩌는 나의 연옥을 죽은 사람들만 알고 있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다.
이제는 폴 영감님도 알고 있겠지만, 막 환생해서 겨우 젖먹이 아기일 테니….
폴 영감님의 입을 통해 연옥이 알려지려면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승인 욕구가 마구마구 솟구친다.
지금의 나는 말릴 수 없는 한 마리의 승인 욕구 몬스터…!
연옥에 대해 알려지면 죽어 나갈 신학 조교들의 통곡과 절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너희들의 슬픔과 절망, 하늘에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구나.’
굳세게 크라는 신의 뜻이다.
견디고 또 견뎌라.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케넬름의 눈을 피해서 연옥을 알릴 수 있지?’
연옥의 특징, 죽은 사람만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아하! 가사 상태로 만들고 다시 살리면 되겠구나!’
기가 막힌 명안이다.
나는 곧바로 연옥을 지상에 알릴 영광의 파발마를 물색했다.
역사는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는 법.
여기, 3층 남자 화장실 구석에서 연옥을 알리기 위한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 * * * *
사람의 말에는 힘이 깃든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그 말이 새겨지는 것이다.
요컨대, 혈기 넘치는 20대 남자들의 3대 유언.
괜찮아, 안 죽어. 비켜봐 내가 할게. 쫄았냐? 쫄았네.
이런 말들에도 보이지 않는 신비가 깃든다.
“허억!”
끓어오르는 청춘, 21살의 페닐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 아니라 커다란 수레바퀴와 노을빛 하늘.
페닐은 생각했다.
‘아. 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헛것이 보이는구나.’
지끈지끈.
“끄윽. 머리야.”
기분 탓인지 숙취로 쑤셔오는 머리를 붙잡고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어젯밤 페닐과 그의 친우들은 그야말로 술을 진탕 마셨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들며 길을 걷다가….
유난히도 밝은 보름달을 보고는 누군가 소리쳤다.
– “지금 보니까 저 보름달이 술집에서 일하는 로자일의 가슴을 닮았어!”
– “오. 동그랗고 하얗고 커다란 것이 똑같네!
술은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평소였다면 엄두도 못 낼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문제였다.
취기 섞인 알 수 없는 충동이 몰려온 것이다.
파바바밧!
허공에 허리 놀리기!
– “으하하하하! 나는 지금 로자일의 가슴을 범하고 있다!”
–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푸하하하하하!”
페닐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리며 보름달을 범하는 시늉을 했다.
오가는 처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도망갔고, 그 무식하다는 오크들마저 혀를 찼다.
– “취췩, 쯧쯧. 사내로 태어나서 명예도 모르는 것들.”
– “우리 오크들도 안 할 짓을 하는군! 취잇.”
오크들은 무식한 거였지 명예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술에 취해 주변을 볼 수 없었던 페닐과 친구들의 행동은 점점 더 과감해졌다.
– “날 봐라! 나는 거꾸로 서서 달을 범할 수 있다!
– “우오오오옷!”
점점 묘기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행위!
이에 오기가 생긴 페닐은 2층 상점의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갔다.
– “어, 어어! 이봐 페닐. 그러다 크게 다친다고!”
– “걱정 마, 안 죽어. 두고 보라고.”
그렇게 나와버린 20대 남자의 유언 중 하나!
기어코 지붕의 꼭대기에 올라간 페닐은 위태롭게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달빛 아래, 유려하게 앞뒤로 움직이는 그의 허리.
– “우오오옷!! 간다 로자일의 젖가슴! 나의 아기를 낳아라!!”
– “으하하하하하하! 인정한다 페닐! 네가 진짜 미친놈이다!”
페닐은 그 순간 보름달을, 아니! 로자일의 가슴을 범하고 있었다.
페닐의 만행은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졌고, 소란에 달려온 경비병마저 감탄할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끄하아아아악! 내, 내가 그런 짓을 했다니!’
거기까지 기억이 떠오른 페닐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수치스러운 기억이 밀려온다.
‘그, 그다음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된 거지?’
물구나무 선 채로 허리를 놀리던 페닐은 손을 삐끗하며 그만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정신을 차렸다니 지금 같은 상황이다.
“하.”
페닐은 제 손이 반투명한 것을 깨달았다.
죽은 것이다.
차라리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몰려온다.
‘그래, 이 정도면 차라리 죽는 것이 맞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물구나무 서서 로자일의 이름을 외치며 허공의 보름달을 범했다.
그러다가 추락사.
이 정도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다.
“크흠. 토트에서 살던 페닐 씨? 맞으신가요?”
“아, 예에. 제가 페닐입니다.”
페닐을 찾는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날개 달린 천사가 활짝 웃으며 페닐을 반긴다.
“반갑습니다! 저는 페닐 씨의 인도와 안내를 맡은ㅡ”
날개 달린 천사의 인도를 따라 페닐은 연옥을 걸었다.
인제 보니 주변이 온통 반투명한 사람으로 한가득이다.
안타깝게도, 페닐은 모르는 나쁜 소식 한 가지와 더 나쁜 소식 한 가지가 있었다.
나쁜 소식은 페닐은 일주일 후, 연옥 구경을 마친 다음 부활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수 상태에 빠진 그의 육체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었지만.
더 나쁜 소식은, 달밤 아래 펼쳐진 페닐의 만행이 온 도시에 소문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페닐의 별명은 ‘보름달 강간마’였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져서 구태여 그리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페닐이 다시 정신을 차린다면….
그 사실을 모르는 페닐은 희희낙락 연옥을 만끽했다.
그리고 대망의 일주일 후, 페닐의 재판 당일.
《피고인은 망자 아니므로, 피고의 자격이 없다!》
“…예?”
여섯 개의 날개를 달고 있는, 어쩐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천사가 그리 판결했다.
미리 언질을 받아둔 가이에드의 판결 아래, 페닐의 영혼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다.
“……흐어어업!!”
크게 숨을 마시며 일어난 페닐.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지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페, 페닐! 페닐이 일어났다!”
“세상에…! 2층에서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어떻게 깨어난 거지?”
“역시 보름달을 범한 남자는 달라도 뭔가 다르군!”
페닐의 병문안을 왔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황망한 와중에도 페닐은 저들의 속삭임을 듣고는 그만 다시 죽고 싶었다.
‘끄하아아아악!’
페닐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지난 바보짓의 괴로움이 더욱 컸다.
급하게 달려온 사제가 페닐의 몸을 살폈다.
“……정말 놀랍군요. 신의 은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 두개골이 박살 나서 평생 누워만 있어야 했을 텐데.”
“아.”
신의 은총이라.
듣고 나니 그제야 연옥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페닐은 도시에서 누구보다 신학에 박식할 사제에게 연옥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그저 우습지도 않은 꿈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사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제님께서는 제 이야기를 믿으시는 건가요?”
“예, 믿습니다. 이미 앞서 탄탈로스라는 지옥을 탐험하고 온 이들이 있으니까요.”
불가능이 일어나는 기적의 시대, 신의 시대!
거리에는 수인과 오크가 거닐고, 물가에는 인어들이,숲에는 엘프가 돌아다니는 신비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리고…프흡! 다, 달을 범한 남자의 말이니, 큽!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
달을 강간한 남자, 페닐!
그 별명 뒤에는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라는 별명도 추가됐지만, 사람들은 페닐을 보름달 강간마라고 불렀다.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는 너무 멋있잖아. 보름달 강간마가 훨씬 재밌고, 크흐흡! 익숙하지.”
“보름달을 강간한 남자! 크으. 얼마나 멋있어? 뭐?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고? 그게 보름달을 따먹은 것보다 쩌는건가?”
고작 별명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페닐은 한동안 보름달 강간마라고 불려야 했다.
“너, 이 씨발 페닐! 내 인생 책임져! 이거 어쩔 거야!”
“…로자일? 네가 여긴 왜…….”
“네가 보름달을 따먹으면서 내 이름을 외친 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보고 보름달 젖가슴이라고 부르잖아! 어쩔 거야! 아직 시집도 못 간 처녀 인생을 네가 조졌잖아! 책임져! 책임지라고!!”
로자일이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달려와 페닐의 멱살을 흔들었다.
출렁출렁, 로자일의 가슴을 닮은 보름달이, 아니 보름달을 닮은 가슴도 흔들렸다.
“어, 으음. 이, 일단 들어와서 말하자.”
몇 달 후, 페닐은 로자일과 결혼했다.
보름달 젖가슴과 보름달 강간마의 결혼은 만인의 축복 아래 성대하게 치러졌다.
《…거, 보름달 강간마라니…. 미안하게 됐다. 오래오래 행복해라.》
신이 축복하는 결혼이었다.
* * * * *
페닐에게서 연옥에 대해 들은 사제는 아주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페닐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적었으며, 페닐의 도움을 받아 그림도 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는 양피지 23장.
이것도 줄이고 줄인 것이었다.
쿵.
단단히 봉인된 편지 위로 찍히는 극비 인장.
사제는 조금 묵직한 편지의 무게를 느끼며 깊이 고민했다.
그는 한 도시의 신전을 대표하는 상급 사제였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도 성도에서 승급을 위해 열심히 논문을 쓰고 있을 신학 조교들의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했다.
수습 사제 6년, 하급 사제 5년, 조교 생활은 무기한.
이후 논문이 통과되면 그제야 비로소 중급 사제!
중급 사제부터는 끝없는 수양으로 신성력을 갈고닦은 다음, 주변의 평판과 인성, 지적 수준과 성법술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상급 사제가 될 수 있었다.
보통 수습 사제들의 나이가 13살 내외라는 것을 생각하면, 조교들은 꽃다운 20대에 골방에서 썩어가며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 편지가 만신전으로 전해진다면…….’
사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총명했다.
자신이 쓴 편지가 불러올 파급력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치밀한 전후 조사가 이루어지겠지. 탄탈로스와 달리 저승으로 향하는 문이 발견된 것도 아니니까 증명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야.’
말 그대로 파란을 몰고 올 씨앗이다.
아마 연옥에 대해 증명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을 것이며, 길고 긴 토론과 논쟁이 이어지리라.
허나 상급 사제는 연옥이 실존한다고 선언 될 것임을 예감했다.
오랫동안 수양한 사제의 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만약 그렇다면… 사후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뒤바뀐다. 신학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손볼 부분이 넘쳐날 것이고, 대사제 분들도 다시 배움에 열중하시겠지.’
이는 간접적인 피해에 지나지 않는다.
‘조교 후배님들이 죽어나겠군.’
배움에 대해 한창 열중해야 할 조교 생활!
실시간으로 바뀌는 신학 과정에서 조교들은 피를 토하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리라.
“……대의를 위해서.”
허나, 가끔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더 큰 대의를 위해서!
사제는 결연한 표정으로 편지를 전령에게 넘겼다.
다그닥! 다그닥!
만신전의 깃발을 단 전령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성도로, 만신전으로!
“…급보? 그것도 극비 인장이 찍혔네?”
그리고 단단히 봉인된 편지를 받은 조교는 편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끄를륵르륵.”
쿵!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얼마 전 사후세계에 관해 논문을 썼던 조교였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어느새 한 주의 끝인 금요일입니다!! 포근하게 풀린 날씨만큼 사람의 마음도 풀려가는 2월의 중간!!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완…결!!! 까ㅏ득한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쓰다보면 한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는 날이 올테지요…!! 언젠가, 그 날을 위해! 좋은 이야기였노라 회상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