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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4

       

       

       나는 열린 철문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모를 나선형 계단이, 빛이 비치지 않는 깊은 지하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고글을 쓰며 말했다. 

       

       “내가 앞장설게. 다들 손 잡고 천천히 내려 와.” 

       

       나는 기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전방에서 혹여나 느껴질 인기척이나 함정의 존재를 주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꽤나 깊게 내려갔다고 싶었을 즈음, 나선계단이 끝나고 긴 복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 긴 복도의 끝, 꺾어지는 모퉁이 너머로 전등불 빛이 보이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쉿.” 

       

       나는 일행을 뒤에 세워두고는, 복도가 꺾어지는 곳까지 조용히 다가가서 모퉁이 너머를 슬쩍 바라보았다. 

       

       모퉁이 너머에는 붉은 색의 철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앞을 서양인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냥 서양인도 아니고……

       

       ‘……독일군? 나치?!’

       

       이건 딱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21세기의 삶에서, 영화나 게임에서 자주 보던 전형적인 나치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아무리 아까 들어올 때의 문에 독일어가 쓰여있었다지만, 진짜 나치가 있다니…….

       

       나는 일행에게 돌아와, 내가 본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구로베 교수가 소리를 차단하는 역장을 우리 주변으로 펼쳐주었기에, 굳이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송병오 녀석이 말했다. 

       

       “뭘 기다리나? 제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세.”

       “아니야. 잠깐 기다려 봐.”

       

       아까 잠깐 보니, 나치 병사가 서있는 바로 옆의 벽에는 마치 소화전 버튼마냥 커다란 빨간 버튼이 달려 있었다. 분명 경고음을 울리는 버튼이리라. 

       

       “이대로 들이닥치면 분명 한 놈이 버튼을 누를 거야.”

       

       게다가 서로 마주보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어서, 한 놈씩 조용히 처리할 수도 없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무라사끼 녀석에게 말했다.

       

       『야, 무라사끼.』 

       『뭐냐.』

       『너 담배 있지. 상자 채로 잠깐 빌려줘.』

       

       불량배 생활을 청산했다고는 해도 가끔 담배를 피우던 무라사끼 녀석이었다. 무라사끼 녀석은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앞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나에게 빌려주었다.

       

       녀석이 갖고 있던 담배는 카이다 담배. 담배갑에 해태가 그려져 있는데, 조선에서 판매되는 것들 중 가장 비싼 편에 속하는 담배였다. 이런걸 어찌 아냐고? 동네 구멍가게를 운영하다보면 알게 된다.

       

       『비싼 거 피우는구나.』  

       『흥! 불만 있냐!』

       

       하긴, 종로경찰서장 아들이니까. 아무튼 비싼 담배면 더 좋지. 나는 담배갑을 복도 모퉁이 가까이에, 아슬아슬하게 보이도록 던졌다. 두 병사 중 한 놈의 시야각에만 걸쳐지게끔……

       

       잠시 뒤,

       

       „오! 지가레터! 바스 퓌어 아이너 보이터 이스트 다스!“

       

       모퉁이 너머에서 웬 횡재냐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군화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병사 한 명이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려는 그 때,

       

       『당수!』

       

       나와 미리 합을 맞춘 무라사끼 녀석이 작게 기합을 외치며 나치 병사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좋아. 한 놈은 제압했고, 아직 문 앞에 있을 나머지 한 놈만……

       

       „아인 펠레츠타!“ 

       

       이런! 쓰러진 나치 병사의 발 끝이 모퉁이 너머의 동료에게 보인 모양이었다. 붉은 철문 앞에 남겨진 나치 병사는, 

       

       „지 하벤 앙게그리펜! 알람! 알람!“

       

       하고 외치며 몸을 돌렸다.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람’을 외치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벽에 달린 빨간 버튼을 누르려는 것이다! 그 때,

       

       “게 섯거라!”

       

       이유하가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날카롭게 외쳤고, 손에 들린 작은 완드로부터 빙결이 쏟아져 나와 나치 병사의 발을 묶어버렸다. 발이 묶인 나치 병사는,

       

       „스피온! 슈테헨 블라이벤! 할트……“

       

       —짜악!

       

       내가 따귀로 기절시켜 주었다. 

       

       “후우. 게임이랑은 다르네…….”

       

       어떤 게임에서는 담배갑으로 나치 병사 유인해서 잘만 잡던데. 역시 현실은 쉽지 않구나. 

       

       기절한 두 나치 병사는 홍옥례가 어딘가에서 밧줄을 꺼내서 포박했고, 구로베 교수가 아까처럼 기억소거제 주사를 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곁으로 다가온 이유하가 나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어떠하였소?”

       

       어쩐지 조심스러우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아까 자신의 활약에 대해 묻는 건가. 나는 솔직하게 칭찬해 주었다. 

       

       “잘 했어.”

       “이잇. 그것이 아니라……”

       

       내가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자 이유하는 내 손을 슬쩍 밀어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까부터 다들 뭔가 하나씩 외치며 재주를 부리기에, 나도 한번 그리 하여 보았소만……”

       “…….”

       

       아니, 방금 ‘게 섯거라!’라고 당당하게 외친게 그런 이유에서였냐고. 자기만 아무 말 없이 스킬 쓰는게 괜히 허전해서 그랬던 거냐고……!  

       

       “……어쩐지 응답이 시원치 않구려. 그닥이었소?”

       “그게,”

       

       아무리 그래도 ‘게 섯거라’는 좀 아니지. 물론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을테니 나는 돌려서 말해주었다.

       

       “지금이야 구로베 선생이 소리를 차단해줘서 그렇지, 적진에서는 소리를 안 내는게 좋아. 뭐 할 때마다 기술명 외치는 무라사끼 녀석이나 홍옥례가 이상한 거지.”

       “그, 그렇소?”

       “응. 그러니까 굳이구태여 뭔가 말하면서 네 의도를 드러낼 필요는 없어. 방금같은 빠른 판단력과 활약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를 드러내기에 충분했으니까.”

       “……고맙소.”

       

       사실, 21세기에서도 자신만의 트레이드마크 느낌으로 손수 지은 기술명을 외치는 헌터들은 꽤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유하는 그런 쪽으로는 센스가 없는 것 같아서 만류한 것이다. 기술명을 지으려면 차라리 한자로 지어다오. 

       

       『자, 주목!』

       

       나치 병사들이 치워지자 나는 일행의 주목을 끌었다.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할텐데. 혹시, 이거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나는 빨간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빨간 철문의 가운데에는 뚜렷한 흰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칼인지 나무인지 수직으로 그려진 뭔가의 위에, 두 날개가 양옆으로 뻗어나온 모습의 T자형 로고. 

       

       날개달린 T자 문양의 아래에는 ‘Ahnenerbe’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고, 그 밑에는 ‘Fernöstlicher 3. Zweig’ 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문양을 응시하던 구로베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넨에르베’로군.』 

       

       구로베 교수가 뭔가 아는 것 같았기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넨, 뭐……? 그게 뭐죠?』

       『아넨에르베. 독일국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친위대 산하 독일유산학술협회.』 

       

       구로베 교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도 구체적으로는 모른다. 다만, 평범한 학회같은 명칭과는 달리 나치당의 은밀한 연구기관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뿐.』

       『……!』

       『이 문에 쓰여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아넨에르베의 극동 제3지부라고 하는 것 같군.』

       

       그러니까 나치 중에서도 비밀집단, 그것의 동양 전담팀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건가. 

       

       ‘나치가 왜 여기에……’

       

       라고 새삼스럽게 의문을 가져봐야 그저 새삼스러울 뿐이다. 애초에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은 동맹이었고, 몇년 전에는 둘이서 함께 공산주의를 몰아내자는 핑계로 방공협정도 맺었으니까. 

       

       그러니, 각자의 비밀스러운 연구기관끼리 어떤 기술적인 교류나 제휴가 있다고는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긴 한데……

       

       [“저기, 있어.”]

       

       내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까뜨린느, 아니 방숙자가 진동하며 소리를 내었다.

       

       “응? 뭐가.”

       [“저 안짝에 말여. 느낌이 와. 핵교 밑에 있던 그것마냥, 막 영혼을 끌어댕길려고 하는 그거…… 그게 저 안짝에 있어. 것도 무쟈게 쎄.”]

       

       령입자흡인기. 

       

       물론 방숙자는 까뜨린느라는 인형의 몸에 완전히 안착했기에 갑자기 유체이탈해서 빨려들어갈 염려는 없었지만, 영혼 에너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니만큼 령입자흡인기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 령입자흡인기가, 그것도 어떤 원천기술에 가까운 것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가도 되나.’ 

       

       나는 나치 병사의 허리띠를 뒤져서 열쇠를 찾아내어 손에 쥐고도,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까부터 어느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일본 뿐만 아니라 나치독일까지 얽혀있는 일이다. 

       

       ‘너무 스케일이 커지는데.’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내가 감당할 수 없이 일이 커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오이! 멍하니 뭘 하는 거냐, 시라바야시 놈!』

       

       무라사끼 녀석의 호통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똑바로 해라! 네놈이 지시해야 들어가든 말든 할 것 아니냐!』

       “무라사끼의 말이 맞네. 이제 어찌할 텐가?”

       “백 동지! 지시를……”

       

       녀석들이 나만 바라보고 서 있었고, 이유하도 내 곁에 다가와, 내 한쪽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구태여 말하지 아니하여도, 내 뜻은 아시리라 믿소.” 

       

       이유하의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후우.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가 봐야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들어갈테면 서두르도록. 아침까지 기다릴 셈인가.』

       

       우리 분대원 모두를 합쳐도 이기지 못했던,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진 구로베 교수까지 함께 있다. 이만한 전투력이 있는데 나치 소굴에 들어간다고 무서울 것이 뭐가 있어. 

       

       『좋아. 연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철문을 열었고, 육중한 철문이 삐걱거리며 활짝 열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작중 독일어 대사는 독일식 따옴표(Gänsefüßche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Achtung!“ ←이런 식인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따옴표 시작이 아래에 붙는 것도 이상한데 방향마저도 거꾸로 되어서 이상하지용? 그래서 오타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이게, 독일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독일식 따옴표랍니다. 독일어 전공자 분들이나, 아니면 나치독일이 등장하는 게임을 해보신 분들은 종종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코만도스 시리즈라든가, 울펜슈타인 시리즈라든가…….

    덧붙여 작중 나온 독일어인
    „Ein Verletzter!“ (부상자다!)
    „Sie haben angegriffen!“ (공격당하고 있다!)
    같은 대사도 그런 게임들 속 독일군 대사에서 가져왔으니, 이런 게임들을 해보신 분들은 귀에 익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제가 독일어는 완전히 문외한인지라 이런저런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고 부드러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흑흑……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맛난 저녁 드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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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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