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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25

    <425 – 선배의 거래조건>

     

    그림리퍼의 공방은 입구부터 공방주의 취향이 듬뿍 묻어났다.

     

    ━━━

    [생명약탈의 문]

    문을 열지 못하는 자, 불귀의 객이 되리라.

    ━━━

     

    공방거리의 입장이 유물급 아티팩트로 자격을 시험한다면 그림리퍼의 공방은 생명약탈의 문을 넘어서는 자에게만 손님의 자격을 허락한다.

    공방거리의 기준만으로는 손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걸린 시험!

     

    “선배는 어디로 들어갈래요? 문에 난 구멍에 손바닥을 집어넣으면 대량의 생명력을 빨리지만 확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고, 문고리를 잡으면 흡착의 마법을 이겨내야 문고리에서 손을 뗄 수 있어요!”

     

    식물동아리 선배가 불퉁한 얼굴로 발길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역시 3학년 선배답게 정해진 길로 가기를 싫어하는 반골기질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대번에 지뢰를 밟는 어수룩함이 4학년이 아닌 이유를 알려준다고 해야할까?

     

    “걷어차면 그보다 빠른 속도로 문이 돌진공격을 해올 텐데 감당 되겠어요?”

     

    무슨 문이 사람을 공격해?

    황당하다는 시선에 보란 듯이 근처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하나 주워다가 문짝에 던졌다.

     

    쾅!!

     

    돌멩이에 맞은 부위의 문짝이 로케트처럼 불쑥 튀어나와서 돌을 던졌던 장소의 허공을 가격했다.

    미리 알고 돌을 던지자마자 <신속가동>을 펼쳤음에도 오싹함이 들 정도로 신속한 속도!

     

    “머 방법이 틀린 건 아닌데요. 사람이 지나가려면 엄청 크게 한방 먹여야하고 피격부위가 커지면 문의 반격도 더 거세지는데 찰나지간에 회피와 돌파가 전부 가능하겠어요?”

     

    선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결국은 얌전히 구멍에 손바닥을 넣고 생명력을 마구 빨리며 얼굴이 핼쑥해진 선배.

    평소에 좋은 걸 잔뜩 먹고 다녀서 그런지 생명약탈의 문이 요구하는 대량의 생명력을 그냥 통으로 다 때워버렸다.

    열린 문을 터덜터덜 걸어서 통과하는 선배.

    지금이닷!

     

    <신속기동>

    <정면도약>

    <잠행>

    <대담함>

     

    선배가 문을 통과하고 생명약탈의 문이 스스로 닫히기 직전, 총알처럼 정면으로 쇄도하며 돌진했다.

    <근 력올인한방캐릭이조아 해병> 시절에는 반강제로 납치해온 파티원을 구멍에 억지로 손바닥을 넣게 하고 휙 집어던진 뒤에 같이 돌격해서 우당탕탕 들어갔던 통로!

    하지만 덩치가 작아진 지금은 선배를 몸통박치기로 날리지 않아도 문틈과 선배 사이를 비집고 쏙 들어갈 수 있다.

     

    “무임승차 성공!”

     

    부들부들 어깨를 떨던 선배가 주먹질을 해댔다.

    슈슉 슈슉 가볍게 피하고 있으려니 안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번 손님은 센스가 있군. 동료를 등쳐먹는 그 악랄함,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림리퍼의 호감도가 5 상승합니다.]

     

    무기를 제작하는 망치질 소리가 멎은 공방.

    만들다 만 낫을 두고 팔짱을 끼며 고민하던 그림리퍼 선배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제작재료로 고민 중이세요?”

    “거의 다 모으긴 했는데 조금 모자라군.”

    “뭐뭐 부족한데요?”

    “겨울눈의 꽃. 태양의 보석, 꿀수박의 씨앗.”

    “우와. 거의 다 모으셨구나!”

    “15강 농부의 낫. 새앙쥐의 한숨. 그믐달의 피막. 내셔의 발톱. 자이언트골렘의 톱날. 만년설의 정수. 타락천사의 깃털. 하이블루메탈. 세계수의 나뭇가지. 크라켄의 촉수.”

    “…우와. 거의 다 못 모으셨구나!”

     

    밖에 나가서 재료 채집해도 모자를 시간에 이 선배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이 선배는 정규스토리대로 게임진행을 하지 않고 NPC들의 성장이 막히는 억까이벤트, 소위 말하는 <심마>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암살. 살육. 제작. 어떤 의뢰를 맡기러 왔나.”

    “돈 되는 제작재료 팔러 왔어요!”

    “무슨 재료.”

    “뚠뚠초랑 거미초! 줄기도 스무 개가 넘어요.”

    “용케도 그 정도로 자라났군.”

     

    개별로 자라는 뚠뚠초랑 거미초는 자연적인 생태계 내에서는 자라기 전에 말라죽는다.

    근방의 모든 다른 식물들이 자신들을 죽일 천적이 나타났음을 본능적으로 눈치 채기 때문이다.

    양분을 빼앗고 물 한 방울 새지 않게 틀어막으며 햇볕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괜히 뚠뚠초와 거미초가 초희귀식물몹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리는?”

    “팔려고 아카데미로 가져왔어요!”

    “물건을 보여라.”

    “에헤이. 선배님은 4학년인데 어떻게 바로 보여드릴 수가 있겠어요? 대신 줄기를 하나씩 꺾어왔어요.”

     

    씨앗을 뿌리고 전개한 직후에 재작재료로 쓸 겸 꺾었던 줄기를 보여주었다.

    물건이 진품임을 확인한 그림리퍼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뚠뚠초와 거미초는 몇 가지 재료와 교체할 수 있는 훌륭한 제작재료지. 가격은?”

    “줄기 하나당 천 포인트에 마흔 개!”

    “선금은 10분의 일만 지급하지. 안내해라. 정보가 사실로 판명되면 나머지를 지급하겠다.”

     

    4만 포인트 중에 4천 포인트만 지불한 선배였지만 나나 그림리퍼 선배나 이 정도 금액으로 사기를 칠 정도로 처지가 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값을 깎겠다고 흠을 잡지 않으니 생각보다 빠르게 쿨거래가 되었다.

     

    “근데 선배님은 무슨 고민이 있으시기에 재료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데도 공방에 있으세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꺾으라고 숲에 보낸 부하들이 연락두절이 되었다.”

    “저런!”

    “크라켄의 촉수를 구하러 간 녀석들도 무소식이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온 세상이 억까하는 것처럼 괴롭혀서 재료가 모이질 않는다.“

     

    누구 때문인진 몰라도 정말 나쁜 사람이네.

    사다코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할 정도로 용맹하고 인내심 깊은 선배님을 상심시키다니!

    공방거리를 벗어난 덕분에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식물동아리 선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재료를 타협하면 사신베기의 업적은 멀어지겠지만 이제는 현실과도 타협해야겠지…”

    “저, 실례지만 사신은 왜 베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12악신 내에서도 필두로 손꼽히는 죽음의 신이 부리는 죽음의 전령 아닙니까?”

    “죽음의 전령이 수명을 모아서 주인에게 갖다 바치길 좋아하는 멍청이들을 말한다면 우리가 같은 존재를 논하고 있는 건 맞겠군.”

     

    그림리퍼 선배는 야심이 투철한 4학년 선배님이었다.

     

    “본디 생명의 업이란 먹이사슬과 생태계를 통해 윤회하며 순환한다. 천독개구리는 백독뱀을 잡아먹고 만독벌레는 천독개구리를 잡아먹지. 하지만 만독벌레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거든 축적된 독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재앙이 될 거다.”

     

    그만한 독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토양을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키기에.

    누군가는 만독벌레를 죽여서 자연이 병들고 무너지기 전에 살려내야만 했다.

     

    “죽음의 신이 부리는 사신들은 자연계의 만독벌레가 될 존재들을 해치우고 다닌다. 그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초월을 바라보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지.”

    “인간이 초월을 이루면 신이 되니 세상의 섭리가 하나 더 늘어나서 좋은 것 아닙니까?”

    “죽음의 신은 그런 초월종의 탄생을 세상을 병들게 만드는 만독벌레의 재앙이라 여기고 있다. 동시에 나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지.”

     

    적당히 미친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만 아주 심하게 미친 사람은 경이만을 불러일으킨다.

     

    “초월종과 신격의 탄생이 만독벌레의 재앙이라면 죽음의 신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이 아닌가. 24주신은 가장 오래된 초월종이니 누군가는 그를 죽여야 한다, 라고.”

    “맙소사. 선배님은 신살자가 되려는 겁니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하지. 신살의 첫 걸음으로 졸업과제를 사신의 낫 제작으로 삼았고. 졸업 후에는 죽음의 신 토벌에 앞서 사신베기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첫 걸음부터 원인 모를 억까로 인해 저지되었으니 이렇게 실의에 빠지실 만도 했다.

     

    “사다코 교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은 없으세요? 해치운 사신의 시체를 드리겠다고 하면 무지 좋아하실 텐데!”

    “뭣 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그림리퍼 선배의 다크써클이 드리운 시커먼 눈두덩이가 정색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사다코 교수는 죽음의 신의 전령, 사신보다 위험한 존재다. 그 여자는 자신을 저승으로 인도하려던 사신을 베고 중간계에 남은 사신베기 업적달성자니까.”

    “그만큼 사신을 싫어하시니까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너는… 평생 죽지 않고 부려먹을 수 있는 대학원생을 얻고자 하는 교수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은가?”

     

    아앗. 그건 좀.

    그림리퍼 선배의 두려움이 이제는 내게도 전염됐다.

     

    “너는 절대로 사다코 교수의 강의를 듣지 마라. 암흑마나의 적성이 상당하게 느껴지는데 교수가 딱 좋아할 체질이군.”

    “저 이미 듣고 있는데요? 지난 학기에도 들었고 이번 학기에도 듣고 있어요!”

     

    선배의 얼굴에 어리석은 운명을 자처한 비극의 주인공을 보듯이 동정심이 떠올랐다.

     

    “절대로 조교만 되지 마라. 너는 팔자를 보아하니 한 번 조교가 되거든 평생 사다코 교수에게 끌려 다니고도 남았다. 애초에 그 강의는 왜 들은 거냐.”

    “사다코 교수님은 앞머리가 길잖아요?”

    “그렇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장발의 여자가 실은 머리카락을 치우니 엄청난 미녀였다, 라고 밝혀지면 두근두근한 상황이잖아요?”

    “…”

    “그래서 들었어요!”

     

    그림리퍼 선배가 미치광이를 쳐다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식물동아리 선배도 만만찮게 충격과 공포가 섞인 눈으로 내게서 거리를 벌린다.

    왜들 저러지?

     

    “용무부터 서두르지.”

     

    말도 섞고 싶지 않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탓에 공터에는 금방 도착했다.

     

    “나한테 판다는 뚠뚠초와 거미초가 저거냐.”

    “넹!”

    “저걸 사라고?”

     

    그림리퍼 선배가 가리킨 곳에는 이곳에서 보여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용사가 공터 한 구석에 처박혀있고, 어디서 많이 본 기술이 레어식물군락지 주변에 펼쳐졌다.

     

    <홀리 미러>

    <백팔방위진>

     

    거울에 힘을 흡수, 다른 방향의 거울로 전송해서 적을 기습하는 용사 이슈타르의 기술.

    그것을 레어식물군락지가 사용하며 이슈타르를 지키느라 애를 먹는 성녀 유피와 궁수 스콜라를 리타이어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다.

    출입금지 푯말을 손에 든 식물동아리 선배가 근처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난 말렸다?”

    “더 말렸어야죠!”

    “근데 될 줄 알았지. 지가 현직 용사에 자신감도 있다는데 발릴 줄 낸들 알았겠냐고.”

     

    악질레어식물군락지가 용사의 마법을 습득했다.

     

    “반액할인 해드릴까요?”

    “안 사.”

    “십분의 일!”

    “안 사.”

    “힝잉잉. 제발요!”

     

    그림리퍼 선배가 썩은 동태눈깔처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건 반대로 토벌의뢰를 맡겨도 거절하고 싶을 정도의 골칫거리다.”

    “힝.”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 후배를 위해 특별히 무료로 손을 써줄 수도 있지.”

    “무슨 조건인데요?”

    “사다코 교수의 강의를 수강포기해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재분 업로드 미스로 연참이 되었습니다.
    근로자의 날의 휴식을 자진반납한 멍청한 테디베어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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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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